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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수연 Jul 29. 2023

후회는 항상 늦게 온다

내 인생에도 시 같은 순간이 있었다.


나는 그 친구가 좋았다. 학교 동창이며 친했다. 친구는 A도시에서 나는 고향인 B도시에서  일을 했다.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며 그 친구와 가끔만 만나게 되었다. 중간부터였는지 처음부터였는지 그 친구와 나의 관심사는 서로 멀었다. 친구는 점차 나의 일정과 취향을 고려하지 않았다. 내 직업을 깎아내리고 내가 하지 않은 일로 나를 비난했다. 나와 관련 없는 주제로 다른 사람들의 흉을 보다가 내게 화를 냈다. ‘이 친구가 왜 이러지? 피곤한가? 기분 나쁜 일이 있었나?’라고 생각했고 몇 번은 ‘나는 그러지 않아’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친구는 내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점차 친구를 만나는 날이 지쳐갈 때였다. 직장에서 계약이 만료된 나는 잠시 A도시에 머물기로 했다. A도시에 있는 친구와도 약속을 정해 만났다. 마음이 좀 힘들었지만 오랜만이라 반가움도 있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만날 것이라 생각했으나, 다음 날 친구의 연락으로 또 만나게 됐다. 이 글의 주인공은 친구가 아니기에 간략하게만 쓴다. 친구와 있던 중 내가 발을 다쳤다. 너무 아파 병원에 가야겠다고 말했지만 친구는 나의 말을 반복해 못 들은 척하며 그 순간에도 내 외양을 평가했다. 나는 그 후 두 달 동안 발에 깁스를 했다.


마음이 다칠 때는 알지 못한 것을 다친 발을 보며 알게 되었다. 그 친구는 나를 이용해 자존감을 채우려 했고, 나는 그 친구에게 맞추려 애쓰고 있었다. 그 당시 둘 다 낮은 자존감을 가진 것을 공통점으로 친구 관계가 굴러가고 있었나 보다. 그 친구는 해마다 내 생일에 문자도 보낸 적 없었다는 것을 알았고 그 친구 집 근처에서 만날 때도 친구는 매번 약속 시간에 늦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를 막대해도 된다는 빌미를 준 것이었는지 고민하느라 괴로웠다. 이후에 내가 안부를 묻지 않았더니 그 친구와는 만날 일이 없었다. 그 친구는 내가 본인을 떠났는지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관심이 스스로에게 가있으므로. 그 친구는 내가 더 이상 필요 없어졌을 것이다. 사이가 요원해지는 흔한 이야기다.


직장에서 재계약하자는 연락이 왔지만 나는 B도시 돌아가지 않았다. 깁스는 거들뿐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고 A도시로 이사를 해야 했다. 깁스를 풀고 난 후에도 나는 취업을 시도하지 못했다. 발은 계속 아팠다. 가진 것이 없는 나는 낮이고 밤이고 방에 누워 있었다. 바깥에서 나는 생활 소음을 들으며 백석 작가의 「남신의주박시봉방」을 떠올렸다. 시의 외로움을 알아 가던 시기다. 그 사이 무릎에도 합병증이 생겼다. 병원 외에는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연락을 할 사람이 없었다. 갈 곳도 없었다. 나만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


<헤엄3>, 80.3X116.8cm, 장지에 분채, 2015


좋아하던 그림을 배우러 나가는 것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점차 친구들과 연락을 하고 공연을 보고 새로운 것을 익히고 새로운 사람들도 알게 됐다. 명절에 친척 집도 갔다. 발은 아픈 채로 살았다. 자꾸 아프니 할머니께선 ‘그 한의원’에 가보라고 하셨다. 할머니 지인이 하시는 한의원이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미취학 아동이던 때부터 내가 미취학 아동이던 때까지 B도시의 C동에서 작은 가게를 하셨고 나는 태어난 후 C동에서 잠깐 살았다. 할머니의 거래처 사장님의 아들이  한의사가 되셨는데, 한의대를 다니던 학생 시절에, 통풍을 앓던 이웃을 낫게 했다는 전설이 C동에 내려오고 있었다. D동으로 이사 간 나는 중학생 때까지, 가깝지는 않지만 신뢰가 있는 그 한의원에 다녔다. 이후 한의원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갔고 난 한의사 선생님을 못 뵌 지 오래됐다.


한의원은 A도시에 있었다. 할머니께 들은 병원명을 웹에 검색해 찾아갔다. 아파트 단지 옆 상가 2층에 있는 작은 한의원이었다. 옆에는 소아과, 치과 등 다른 병원이 있었다. 접수를 하고 차례를 기다렸다. 대기실엔 기역자 소파와 안마 기능이 있는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진료실로 이어지는 벽에는 세로가 60cm 정도고 가로는 더 짧은 액자가 걸려 있었다. 미니멀한 형태의 추상화였다. 진료실에 들어가자 선생님은 내게 ‘D동 조00?’이라고 물으셨다. 조00은 내 아버지 성함이다. 난 좀 놀라서 선생님 앞에 놓인 내 진료 문서를 봤다. 접수할 때 썼던 내 이름, 생년월일과 증상을 적는 빈칸이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나를 알아보셨을까. 의료보험 때문에 아버지 성함이 나오나. 이 진료실엔 컴퓨터가 없는데. 어리둥절해하며 진료를 받았다. 선생님은 내가 어릴 때와 체질이 바뀌었다고 하셨다. 나는 건강의 소중함을 모르는 청소년이었기에 그때의 내 체질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선생님은 천재이신 걸까. 내 인생에도 시 같은 순간이 있었다. 이 순간 이후로 백석 작가의 「고향」을 다른 기분으로 읽게 됐다. 나는 향수병 또한 앓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체질에 맞는 음식이 적힌 종이를 받아와 권장사항을 대체로 잘 지키고 가끔 지키지 않았다. 내게 맞지 않는 음식을 먹을 때 선생님은 아셨다. ‘체질 안 맞는 거 먹었죠?’가 아니라 ‘상추 먹었어요?’처럼 구체적인 물음이 우연하고 신기하게 맞아떨어졌다. 내 체질에 안 맞는 음식 중 하나를 말씀하신 것일 텐데, 마침 그 음식을 먹은 참이었다. 한의원에 갈 때 자주 선생님은 평범한 진료보다 더 긴 시간 침을 놓아주셨다. 아마도 비싼 치료였을 것이다. 다른 환자에게도 종종 그러셨다. 물리치료를 하느라 누워있으면 커튼 너머로 다른 환자들에게 오랫동안 처지를 하며 증상을 설명을 하는 말소리가 드문드문 들렸다. 발의 통증은 잘 나았다. 그 한의원은 이상하게 진료비가 너무나 저렴했다. 이 비용으로 운영이 되나 의문이 들었다. 주말에는 멀리서도 환자들이 찾아와 좁은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잘 낫고 저렴해서 환자들이 더 부담 없이 오는 걸까 생각하기도 했다. 발이 아프지 않게 된 후에도 가끔 아픈 곳이 있으면 그 한의원에 갔다. 대기실에서 기다릴 때마다 벽에 걸린 액자를 보면서 그림을 좀 잘 그리게 되면 내 그림을 선물하자는 생각을 했다.


다시 회사에 입사하고 부터는 삶이 많이 힘들었다. 퇴근 후 집에 오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연차도 월차도 없이 가끔 토요일도 출근했다. 내 뇌는 출근 없는 주말에도 시달리고 있었다. 상사는 컴퓨터를 다루지 못했고 나를 심리적으로 지배했다. 나는 업무 과다에 시달리다가 손에 병이 생겼다. 상사는 내가 병원에 가지도 못하게 하고 회사를 그만 두지도 못하게 했다. 상사는 집안 일도 안 하면서 왜 아프냐고 물었다. 상사는 자기 손목이 더 아프다며 회사 근처의 병원에 다녔다. 자기가 다 나은 후에 나를 병원에 보내주겠다고 했다. 힘들어서 기다릴 수가 없었다. 점심시간에 밥을 굶고 회사 근처의 병원에 갔더니 큰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보라는 말을 들었다. 상사는 병원에 가는 나를 아니꼬워하며 집요하게 괴롭혔다. 오른손은 깁스를 하고 왼손은 숟가락도 못 들 정도가 돼서 쓸모 없어진 나는 퇴사를 할 수 있었다. 그 상사를 빨리 벗어나지 못한 나를 질책했다. 이 글의 주인공은 상사가 아니기에 이만 줄인다. 회사 다니면서 힘들었던 흔한 이야기다. 퇴사의 과정은 길었고 그 후에도 구질했다. 열심히 병원에 다니며 치료에 집중했지만 손은 잘 낫지 않았다.


<헤엄4>, 91X91cm, 장지에 분채, 2016

퇴사하기 전 손이 많이 망가지지 않았던 시기에도 그 한의원에 간 적이 있었다. 출근하지 않은 토요일에 갔더니 문이 닫혀 있었다. 한의원 쉬는 날인가. 퇴사 후 평일에 가봤을 때도 문이 닫혀 있었다. 몇 번 전화도 해봤다. 신호음이 들리지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중에는 신호가 연결되지도 않았다. 선생님이 천재시니 더 좋은 자리로 옮기시나. 웹에 한의원 이름과 선생님 성함을 여러 번 검색해 봤지만 새로 얻는 정보가 없었다. 선생님이 아프신가. 한의원이 있는 상가에 가서 상인들께 한의원의 영업 상황에 대해 여쭤봤다. 슬픈 대답이 들렸다. 선생님이 돌아가셨다고 하신다. 다른 사람들 치료만 해주시던 분이 건강 때문에 돌아가셨다.


불편한 사람을 만나며 지치는 중에도 빛나는 사람은 나를 기억해 준다. 나쁜 사람을 만나 괴로운 사이 고마운 사람이 스러져 간다. 그 당시 낯선 도시에서 나의 건강을 걱정해 주는 타인은 선생님이 유일하셨다. 내가 화가가 되면 최초로 그림을 선물하고 싶은 분이셨다. 손이 아파서 그리지 못한 그림, 실력이 부족해 여전히 못 그리는 그림인데 뭐 대단한 작품 그릴 거라고 미뤘을까. ‘그 한의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을 때 어설픈 그림을 선물하고 감사함을 표현했으면 좋았을 텐데. 후회는 항상 늦게 온다. 많은 눈물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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