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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수연 Apr 26. 2022

꽃말은 중간고사

중간고사 기간에는 덕수궁에 간다.

벚꽃은 꽃말은 ‘중간고사’라지. 4월엔 캠퍼스가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강의실과 도서관과 과방을 오가며 사진을 찍는 것으로 벚꽃놀이를 대신하고 ‘벚꽃놀이 가고 싶다’는 말을 주고받던 일상이 흘렀다. 중간고사가 끝나는 날 강의실을 나서면 벚꽃은 지고 겹벚꽃이 한창이었다. 중간고사 기간에 학교 밖의 장소로 벚꽃놀이를 갈 생각도 못하던 나는 성실하고 존재감 없는 학생이었다. 졸업을 하고 보니 사람들이 주말에 대학교로 벚꽃놀이를 간다는 걸 알게 됐다. 내가 있던 곳이 꽃대궐인 것을 그 안에 있을 땐 모른다.


대학원에 입학해 미술을 공부하면서 중간고사 기간은 다시 찾아왔다. 나는 졸업한 학부의 전공과 대학원 졸업 기준에 따라 학부에서 세 개의 수업을 들어야 했다. 강의 계획서를 보고 시간을 맞춰 수강 신청을 했는데, ㅁ 교수님의 ‘수묵화’ 수업을 신청한 일은 대학원 동기들의 부러움을 받았다. 작품 활동에도 열정적인 ㅁ 교수님의 수업을 잘 신청한 것이었다. ‘수묵화’는 실기 수업이었다. 한지를 B5 용지 크기로 자른다. 우드락을 그보다 조금 더 크게 잘라 화판으로 만들었다. 학생들은 가벼운 화판에 한지를 받치고 벼루와 먹, 세필붓을 함께 들었다. 수업 시간마다 캠퍼스를 돌아다니며 돌과 나무를 그렸다. 어느 날은 건물도 그리고 비 내리는 풍경도 그렸다. 수업이 없는 날엔 ​『계자원 화보』를 보며 따라 그리고 주위의 자연과 사물을 그렸다.


날씨 좋은 4월에는 야외스케치 수업이 있었다. 야외스케치 땐 편의를 위해 드로잉북과 펜을 준비하라는 안내와 함께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중간고사 기간에는 덕수궁에 가야 해.”


이전에 수문장 교대식을 보며 덕수궁 앞을 지나간 적만 있었다. 나는 야외스케치 수업 날 덕수궁의 대한문으로 처음 들어가 보았다. 평일 낮임에도 카메라를 든 관람객들로 북적였다. 수업 모임 장소인 함녕전과 정관헌 사이로 갔다. 그곳에는 <화왕계>의 호화스러운 품위를 간직한 모란이 피어 있었다. 모두들 모란의 아름다움을 보러 온 것이다. 관람객들은 모란을 감상하며 사진을 찍는다. 학생들은 작은 드로잉북과 펜을 꺼낸다. 그리고 모란을 관찰하며 그린다. 함녕전 뒤편의 모란은 높이가 1m가 되지 않는다. 자주색, 분홍색, 흰색의 꽃송이가 손바닥보다 커다랗다. 모란은 얇은 꽃잎이 여러 겹 쌓인 모습으로 꽃잎의 가장자리가 매끄럽지 않아 저마다 개성 있다. 꽃송이 안에는 붉은색 암술이 서너 개 있고 노란색 수술이 가득하다. 꽃받침은 다섯 개, 잎은 세 갈래로 나눠진다.



햇살이 뜨거웠다. 가만히 앉아 모란을 그리고 있으니 교수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자세가 됐어. 넌 진짜 화가가 되겠다.”


교수님은 평소 다른 학생에게도 화가가 될 거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를 향한 말을 듣는 것은 새롭고 특이한 일이었다. 교수님에게는 일상적인 담소이자 의미 없는 격려였겠지만 내 마음엔 자리를 차지했다. 오래 기억할 찰나였다.

일주일 후 피드백하는 날 보니 다른 학생들이 느낌 있게 그린 모란이 많았다. 내 모란은 그저 그랬다.


졸업 후에도 나는 봄의 중간고사 기간에는 덕수궁에 간다. 입구의 오른쪽엔 함녕전과 정광헌 사이보다 더 높은 2m 정도의 키로 모란이 피어있다. 모란이 피는 시기엔 철쭉, 매발톱꽃, 죽단화, 금낭화도 덕수궁을 아름답게 만든다. 멋진 말을 들었던 찰나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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