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할 무렵 직장에서 맘스터치 버거를 받았다. 남편이 좋아하는 케이준 감자튀김도 챙겼다. 원래 같으면 하나로 못 나눠 먹겠지만 나도 양이 줄었고 남편도 다이어트를 하니까 다른 음식을 곁들여 버거 하나를 나눠 먹을 수 있다. 곁들일 음식을 생각하다가 당근 수프와 버섯 샐러드를 만들었다.
마트에 가니 흙 묻은 국산 당근이 1780원이다. 1000원만 더 주면 깨끗이 씻고 손질까지 되어 있는 중국산 당근을 살 수 있다. 평소 같으면 손질된 걸 샀겠지만 즐겨 먹던 중국산 마늘종에서 농약이 기준치 이상으로 검출됐다는 뉴스가 나온 후로 중국산 식재료가 꺼려진다. 우리 땅에서 난 흙 묻은 당근에 좀 더 정이 간다.
야채는 다 좋아하지만 당근만큼은 강한 향과 익혔을 때의 물컹한 식감이 싫다. 어렸을 때는 억지로 먹다가 헛구역질을 하기도 했다. 여전히 당근은 맛이 없지만 이제는 맛보다도 건강을 이유로 먹는 음식들이 늘어간다. 제철 식재료가 주는 맛과 영양이 있다. 겨울은 뿌리채소의 계절이다. 당근 맛이 강한 건 먹기 어렵지만 수프나 케이크처럼 맛을 살짝 죽인 음식들은 괜찮다.
당근 수프는 단순한 생김새에 비해 당근을 깎고, 굽고, 삶고, 가는 아주 귀찮은 요리다. 거기에 버섯을 살짝 볶아 넣은 버섯 샐러드까지 곁들이기로 한다. 햄버거 하나 나눠 먹으려다가 일이 커졌다. 일을 키우는 솜씨가 일품이다.
당근 수프를 만드는데 무럭무럭 생각이 피어오른다.
‘오늘은 왜 이렇게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까?’
겉으로 보기엔 주어진 일을 잘 해내고, 사람들과도 잘 지내지만 홀로 남몰래 불만족스러운 부분들이 있어 자존감이 낮아지고 어딘가 부자연스러울 때가 있다. 나이가 들수록 여유 있는 사람들이 멋있어 보이는데, 여전히 굳어 있는 내 모습이 싫다.
중요한 일들을 잘 끝내고 여유로운 겨울을 보내고 있으면서도 마음이 참 부지런히 땅굴을 판다. 당근같이 딱딱한 상념들을 냄비에 툭툭 넣는다. 푹 삶다 보면 으깨어지고 뭉근한 수프가 되겠지. 부드럽게 익어 쓸모 있는 무언가가 되겠지.
딱딱하고 향과 색이 강해 먹기 힘들었던 당근이 생크림, 우유와 섞여 부드러움과 은근한 단맛을 내는 당근 수프로 재탄생한다. 막상 먹어보니 맛있다. 쓸모없는 상념은 없는 것이지. 오늘따라 주방이 아늑하다.
제철 음식 먹는 재미로 각 계절들을 보낸다. 같은 재료여도 제철엔 맛과 향이 풍부해진다. 모든 것에는 제철이 있다. 나의 계절도 왔다가 가고, 갔다가 또 온다. 매번 좋을 순 없어도 또 좋은 날이 오니까 좀 더 여유를 가져도 될 것 같다. 제철, 그 외엔 익어가는 시간. 설익어서 땡감 같은 그런 날들을 잘 지나가면 부드럽고 달콤한 날이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