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BK의 드로잉 수업에 대해.
미술을 업으로 삼고 있지만, 희한하게도 나는 학창시절 내내 그림에 영 소질이 없다는 평가를 달고 살았다.
예고를 다닐 때 미술과 전교생 120명 중 소묘 시험 점수는 항상 115등 이후였다. 정확하게 석고상을 그릴 줄 몰랐고, 정물 수채화는 엉망이었다. 소조 두상들은 잘 봐줘도 사람 닮은 고구마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게으른 것도 아니었다. 다만 입시 미술 스타일의 야무진 손과 눈, 재주가 없었다.
대학교 입시를 치룰 때 화실 선생님이 취중 진담으로 ‘너는 진짜…..어떻게 하니’ 라고 말하며 한숨을 쉬었던 것이 생생히 기억난다.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열심히 일하지만 일머리가 없는 사람이 직장의 트루 빌런이라던데, 나는 그때 선생님에겐 소묘 화실의 빌런이 아니었을까.
내 그림을 칭찬한 선생님은 인생 딱 두 분 뿐이었다. 중학교 때 지나가는 말로 ‘너는 색을 참 특이하게 잘 쓴다’ 라고 했던 미술 선생님. 고등학교 때 다른 선생님들이 내 소묘들을 혹독하게 비판하며 ‘말로 사람을 팬다는게 어떤건지’ 몸소 보여줄 때 ‘필력이 특이하게 좋다’고 유일하게 내 편을 들어주었던 조소 선생님. 칭찬은 과연 고래도 춤추게 하고 소묘 열등생도 대학에 보낸다. 나는 그 두 사람의 말만 머릿속에 심고 입시 시절을 보냈으니까.
대학교에 진학한 후 부터는 입시 미술의 정확성이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더이상 석고상과 빗자루와 사과와 북어와 군화 따위를 반복해서 그리지 않아도 되는 커리큘럼 덕분에 내 인생은 좀 더 편해졌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소묘와 드로잉에 엄청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학교 친구들이 흔히 하는 소묘 학원 강사도 하지 않았다. 내 주제에 누굴 가르친단 말인가. 나는 잘 그리는 사람이 아닌데.
그런데 네덜란드에서 유학을 하면서, 나는 ‘잘 그린 그림’이 어떤 것인지 재 정의 하게 되었다.
KABK의 패션&텍스타일 디자인 커리큘럼엔 매주 3시간 반 씩 누드 드로잉 수업이 포함되어 있다. 한국에서의 학부 시절에도 누드 드로잉은 3학년 때 까지 했기 때문에 나는 그때와 비슷할것이라 생각했다. 원하는 재료를 가지고 모델을 보며 그림을 그린다. 어려울 것이 없었다. 첫 수업 시간에 들어가며 나는 온 몸에 힘이 빡 들어가 있었다. ‘잘해야 한다’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들어차있었다.
“내가 아무리 소묘 열등생 이라지만, 그래도 10년이나 어린 ‘초보자’들과 똑같아선 안되지. 나는 한국의 예고 입시, 미대 입시 미술을 거쳤고 미대 졸업전시 두 번을 끝낸 사람이야, 본때를 보여주겠어.”
글로 쓰자니 정말 부끄럽다.
나는 그렇게 건방졌다.
게다가 첫 날 드로잉 선생님 에릭 Erik 의 평가가 내 시건방진 콧대를 더욱 높여주었다. 내 그림을 본 에릭이 ‘너는 여기 입학하기 전에 이미 체계적인 미술 교육을 받고 왔구나, 선이 달라’ 라고 단박에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에릭은 다른 학생들에게 내 그림을 보여주며 ‘인체 비율은 이렇게 잡는것이다’ 라고 보여주기까지 했다.
솔직히 말해서 다른 학생들의 드로잉은 한국 입시미술에선 절대 살아남을 수 없을 스타일이었다. 입시 미술의 열등생이었던 나조차 ‘쟤들은 입학 시험을 어떻게 거친거지?’ 라고 생각할만한 그림들 이었다. 한국의 입시 화실에서 저렇게 그리면 당장 모든 강사들이 총출동해서 그림을 ‘봐줘야’ 한다. ‘봐준다’는 것은, 강사가 앉아서 학생이 그린 그림을 수정하고 ‘이 스타일로 그려라’ 라고 말하는 것이다.
‘유럽애들은 미대에 들어올때 포트폴리오 비중이 높아서 객관적으로 잘 그리는 건 못해.’
나는 입시 시절 강사 선생님들이 외국의 미대 입학 과정을 ‘비웃으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소묘를 잘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모든 선생님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객관적으로 잘 그릴 줄 알아야, 그 뒤에 추상적으로 변형을 하든 말든 그게 말이 되지. 처음부터 괴발개발 그리면서 추상 이랍시고 건방을 떠는건 말이 안돼. 기초가 탄탄해야지 기초가. 입시 미술을 우습게 보는 것들은 기역 니은 모르고 소설 쓰려는 놈들이야.’
입시 미술을 증오하던 나 역시, 그들의 ‘기초’에 대해서만큼은 반론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항상 예시로 드는 사람은 피카소였다. 피카소는 어릴 때 이미 소묘 마스터였고 그래서 그가 입체파로 넘어간 것 역시 실력없는 자의 객기가 아니라 정당한 실험이라고. 그래서였나보다, 내가 동급생들의 그림을 내심 나보다 열등하게 보는 부끄러운 짓을 하고 우쭐해 진 것은.
내 오만함이 박살난 것은 드로잉 수업 셋째주였다.
"민, 네가 저 모델에게서 보고싶은게 뭐지?"
에릭이 나에게 이렇게 물었을때, 처음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나는 한 가지 재료로 드로잉을 통일하지 않아서 그런거냐고 물었다. 에릭은 고개를 저었다.
“네가 잘 훈련받은 손과 눈을 가졌고, 객관적으로 잘 그린다는 건 알겠어. 그런데 네가 ‘말하고 싶은게’ 뭔지 잘 모르겠어. 너는 저 모델의 무엇을 보고, 무엇을 표현하고 싶지?”
에릭이 친절하게 돌려 말하고 있었다, ‘지금 너에겐 네 스타일이 없다’고.
그때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나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드로잉 시간은 누가 더 잘 그리는지 경쟁하는 경연이나 서커스가 아니었는데.
“100미터 밖에서도 ‘이건 네 그림이구나’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해.”
에릭은 미소지으며 내 어깨를 토닥이고 옆 학생에게 향했다. 에릭은 나를, 내 건방짐을, 나의 게으른 과거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나는 아주 잘 그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아주 기똥찬 개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정쩡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대학교와 대학원을 거치며 입시 미술의 틀을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입시 미술 스타일을 그렇게 욕해왔는데, 사실 내 뼛속까지 입시 미술의 가치관이 스며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내 의견을 어떻게 잘 펼쳐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로 예고와 미대와 대학원을 다녔고, 내 작업은 '누군가를 만족시키고자' '칭찬받고자' 노력한 결과물이었을 뿐이다. 나에겐 개성이 없었고, 개성을 표현할 의지는 있었지만 어떻게 발산해야할지 몰랐다. '그 잘난 미대 석사' 씩이나 했는데도. 내 학위는 종잇장이나 다름 없었다.
나는 너무나 부끄러웠다.
입시 미술 시절에 선생님들이 수도 없이 '너는 왜 이렇게 못그리냐'고 구박을 할 때도 느껴보지 못한 부끄러움이었다.
분명히 밝힌다. 한국에도 물론 유학 경험 없이, 입시 미술을 멀쩡히 잘 거치고도 너무나 좋은 작업을 하는 개성과 재능 넘치는 작가들이 굉장히, 아주 많다. 그들과 내가 다른 점은 순수한 재능의 차이이기도 하고, 본인의 욕구를 얼마나 잘 펼쳐내는 ‘줏대’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이기도 하다.
나는 줏대 없고 게으른 모범생이었다.
드로잉 수업은 나에게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네덜란드에서, KABK에서 똑같이 줏대 없이 살고싶지 않았다. 나의 유학 목표는 완전히 바뀌었다. 텍스타일을 배우는 것 보다도, '내가 누구인지' 찾는 것으로.
학부 유학을 한다는 것은, 한 나라의 교육 시스템이 어떻게 학생들을 교육하는가를 긴 호흡으로 진실하게 느낄 수 있는 기회다. 처음에 내가 은근히 ‘저렇게 그려도 이 학교에 입학 하는구나’ 라고 무의식적으로 오만하게 판단했던 친구들. 그들은 2년 3년이 지나면서 질투 나도록 ‘잘 그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그림은 정말이지 100미터 밖에서도 그들만의 그림이었다. 어느 누군가의 스타일도 아닌, 본인만의 그림들.
객관적으로 잘 그리는 것은, 본인의 작업이 ‘객관적으로 잘 그리는 것을’ 필요로 하는 주제일때나 중요한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본인을 어떻게 잘 표현하느냐, 본인이 어떤 재료를 좋아하고, 어떤 질감을 좋아하고, 어떤 마감을 좋아하는가, 이런 것들이 훨씬 더 중요하다. 본인의 욕구에 솔직해야 하고, 그 욕구를 성실하게 이행해야 한다. KABK의 교육 시스템은 학생이 전력으로 그 '욕구'를 이행할 수 있도록 돕는데 집중되어 있다. 좀 더 어릴때 이런 환경에서 미술 교육을 받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늙었기 때문에, 느리게 돌아왔기에 더 잘 보이는 것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네덜란드에서의 유학이 내게 준 가장 값진 교훈.
‘어떻게 해야 내 것을 발견할 수 있는가’.
그리고 아직도 모자란 나는 매일 그 교훈을 되뇌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