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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 in Lowland May 29. 2020

루프의 미학, 니팅knitting에 대한 잡담

KABK 텍스타일 디자인 수업에 대한 단상 (1)



니팅 (Knitting)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게된 것은 내 인생에서 비교적 최근, KABK에서 텍스타일 디자인 공부를 시작하면서 부터다. 


7년 전의 나에게 천, 즉 패브릭은 관심 밖의 대상이었다. 커텐, 컵 받침, 옷, 목도리, 비니 같은 것의 재료, 혹은 면이나 마, 실크로 된 팔랑팔랑한 옷감. 목화 솜과 문익점. 내가 천을 보고 떠올리는 물리적 개념은 고작 이 정도였다. 나는 백화점에서 침구나 옷 보는 것을 좋아했지만 천에 대해서는 정작 아무것도 몰랐다. 


아마 이런 사람이 과거의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천이 대체 구조적으로 어떤 것인지 묻는다면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텍스타일 디자인/엔지니어링 전공자나 패션업계 종사자가 아니고서야 찾기 힘들다. 굉장한 아이러니다. 인간의 인생에서 천 만큼 신체와 긴히 밀착하고 일상 생활을 장악하는 것은 공기와 물 정도 일텐데.


일상적으로 ‘천’이라 뭉뚱그려 일컫는 많은 것들이 각각 얼마나 다양한 재료와 기법으로 만든 것인지, 과거의 내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특히 니팅은 테크닉이 아니라 아지랑이 같이 희뿌연 이미지에 가까웠다. 한국어로 ‘뜨개질’ 이라고 번역 할 때 나는 항상 특정 이미지를 떠올렸다. 외국 할머니들이 겨울 명절 때 난롯가에 앉아 손녀들을 위해 젓가락같은 나무 스틱을 이리저리 꼬아서 만드는 털실 공예품. 그 정성 때문에 몇 번 쓰다가 결국 유행이 지나 옷장 속에서 10년 간 썩다가 재활용 쓰레기 더미 속에 섞여버리는 물건. 향수를 자극하는 노인의 취미 생활. 좋아하는 남자애에게 선물할 목도리를 만들려 한 코 한 코 뜨는 즐거운 손뜨개질.



그러나 내가 KABK에서 겪은 니팅은 그런 예쁘고 몽글몽글한, 여유로운 행위와는 거리가 멀다. 



Intarsia sample, made by Min van der Plus, 2018








니트 직물을 간단히 정의하자면, ‘긴 실이 끊김 없이 루프로 연결 된 유연성이 높은 직물’이다. 


전통적인 직물 제조 기법은 크게 직조 Weaving 과 니팅 Knitting 두 가지다. 

잠시 텍스타일 오타쿠가 되어 역사와 기법을 소개해본다.


직조의 역사는 니팅 보다 훨씬 더 오래됐다. 직조는 기원 전 부터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는 반면, 가장 오래된 니팅 직물은 11세기 이집트에서 만든 양말이다. 


역사적으로 니팅 직물의 사용은 아시아 보다는 중세 유럽에서 좀 더 많이 보인다. 직조 기법으로 옷감을 짜내는 (길쌈, 베짜기) 기법은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 무렵부터 사용되었지만, 니팅은 좀 더 중동/유러피안 적인 기법이다. 이것은 실의 원 재료가 대륙간 어떻게 분포되어있냐에 따라 다르다. 니팅은 기본적으로 동물의 털, 즉 특히 양털같은 소재로 만든 실에 특화된 기법이다. 모직의 탄성이 루프와 루프 사이를 넘나드는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유럽의 기후에 비해 한국에선 면양 사육이 어려웠고, 게다가 유목 민족도 아니기 때문에 때문에 모직 보다는 면직이나 마직, 견직이 더 발달했을 것이다. 


네덜란드에 살면서 굉장히 신기했던 것은 많은 더치들이 정말로 '할머니가 짜준 양말' 혹은 '할머니가 만든 스웨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유럽에선 니팅이 전통적으로 널리 쓰인 텍스타일 기법이다. 



니팅과 위빙의 구조적 차이


직조가 그리드 Grid 라면 니팅은 루프 loop 다. 하나의 선을 규칙적인 루프로 꼬아서 생긴 구멍이 이어지고 이어져 면을 구성하기 시작한다. 종횡으로 실이 엇갈려 만나는 직조에 비해 실과 실 사이의 간격이 상대적으로 크다. 간격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실이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넓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니팅 직물은 유연하고 구김이 적다. 즉, 탄성이 좋다. 흔히 스웨터나 스타킹, 양말같이 살에 달라붙은 기능을 가진 천이 니팅 기법으로 짜인 이유가 이것이다. 니팅 구조의 탄성때문에 몸의 곡선에 맞춰 변형되기 쉽다.


영어에 ‘tight-knit’ 혹은 ‘close-knit’ 라는 형용사가 있다. 두 명 이상의 모임, 혹은 공동체가 ’공통된 관심사를 가지고 끈끈하게 모였을때’ 이런 표현을 쓴다. 니팅의 성질을 떠올리자면 굉장히 공감가는 비유다. 니팅의 한 바늘코, 한 루프가 풀리는 즉시 모든 루프가 주르륵 풀리기 시작한다. 스타킹을 신을 때 한 올이 나가면 일직선으로 올이 계속 나가는 것도 그런 이유다. 


끈끈한 관계를 벗어날 때 많은 문제가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니팅의 루프가 풀린다는 것은 니터들에겐 악몽이다. 흔히 니팅 하면 떠올리는 ‘나무바늘 손뜨개질’과 프로페셔널한 니팅 머신은 스트레스의 차원이 다르다. 수동 니팅 머신을 다룬다는 것은, 200개의 가느다란 바늘과 제각기 다른 물성을 가진 실, 그리고 기계의 매커니즘 사이에서 치열하게 밀고 당기기를 거듭하는 것이다. 단 한 바늘코의 실수가 그동안 해온 모든 작업을 망칠 수 있다. 


니팅 머신 작동 영상.




니팅 머신은 아무 실이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앞서 밝혔다시피 니팅에서 중요한 것은 탄성이다. 니팅 머신이 ‘좋아하는’ 실과 ‘싫어하는 실’은 주로 이 탄성에서 많이 갈린다. 니팅 머신의 종류에 따라 실의 굵기와 질감도 다르게 쓸 수 있는데, 흥미로운 니팅 작업을 만들기 위해선 여러가지 실로 샘플을 만들어 보는 것이 중요하다. 


게다가 실을 끼우고 머신 니팅 캐리지를 움직이는 것 만으로는 니팅 작업은 완성되지 않는다. 니팅 머신을 다룰 때는 아주 많은 것을 동시에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캐리지의 소리는 어떤가, 실의 탄력은 어떤가, 바늘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그리고 상황에 맞게 니팅 머신의 상태를 조절해주는 것이 실수를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니팅 머신이 좋아하는 실 한두가지 만으로 흥미로운 샘플을 만들기는 힘들다. 텍스타일 전공자, 특히 니팅 전공자라면 ‘얼마나 창의적이고 기술적으로 흥미롭고 아름다운 니팅 샘플을 만들어내느냐’가 중요하다. 니팅 디자이너라면 거기에 '대량 생산을 할 수 있는가' 같은 복잡한 계산까지 곁들여 해야한다. 




흥미로운 니트 작업들. (좌)JENNIFER BARRETT, Knot Knitting (우) Leutton Postle S/S 2012


똑같은 니팅 패턴이라 하더라도 각각 다른 실의 탄성이나 굵기를 이용해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 낼 수도 있고, 여러가지 색깔과 질감으로 흥미로운 표면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수동 니팅 머신이 아니라 공장에서 쓰는 산업형 니팅 머신의 경우 테크닉의 경우의 수는 어마무시해진다. 우리가 이제는 SPA 브랜드에서 몇 만원으로 쉽게 살 수 있는 니트웨어, 혹은 나이키나 아디다스의 니트구조 운동화들은 모두 수많은 니팅 디자이너들이 몇십년간 개발과 실험을 거듭한 결과 시장에 유통되는 것이다. 






니팅은 권투 시합만큼 심신이 지치고, 동시에 흥미로운 전투욕을 불러일으키는 육체 활동이었다. 


니팅 선생님 힐더 Hilde 는 우리 학교 뿐만 아니라 앤트워프 왕립 미술대의 패션과에서도 니팅을 가르쳤지만, 사실 드리스 반 노트이나 라프 시몬스같은 온갖 세계적인 패션 하우스와 일해온 사람으로서도 명성이 높았다. 차분하지만 날카로운 눈빛, 인내심, 끈질기게 트러블슈팅을 하는 집요함, 가느다랗지만 정확하고 맵게 움직이는 열 손가락. 그녀는 딱 보기에도 타고난 니터이자, 평생 니팅을 해온 장인 다웠다.


힐더가 니팅 머신을 다룰때마다 그 손은 요술을 부리는 거미의 날렵한 발처럼 움직였다. 그토록 부드럽게 니팅 카트리지를 밀며 실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사람이 있을까? 힐더는 항상 내 동경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니팅 수업 시간은 의문과 실패와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니팅 머신은 힐더를 더없이 순하게 따르고,  초보자들은 내동댕이쳤다. 여포를 따르는 적토마 같았다. 대다수의 학생들이 니팅 머신을 호환마마보다 두려워했는데, 니팅 시간이 끝나고 나면 우르르 카페테리아에 몰려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그놈의 망할 실은 대체 왜 캐리지에서 얌전히 있지 않는지' 커피를 술처럼 마시며 토로하곤 했다. 


그들 중에서도 나는 니팅 머신과 독보적으로 많이 싸우는 학생이었다. 분명히 나도 힐더와 똑같이 바늘들에 실을 걸고 캐리지에 실을 통과시켰건만, 내가 캐리지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미는 순간 듣기 싫은 굉음이 나며 실이 터지고 난리가 나다가 급기야 캐리지가 고장난 듯 멈췄다. 힐더는 한숨을 참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하지만 더없이 상냥하게) 내 자리에 와서 오류를 고쳐주었다. 가끔씩은 힐더 마저도 고개를 갸웃거리는 실수를 저지를 때도 있었다. 그냥 힐더가 하라는 대로 작동법을 외우고 그대로 따라하면 간단한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다른 학생들보다 니팅 머신을 다루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니팅은 내가 갈 길이 아니구나,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느꼈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마법같은 순간이 찾아왔다. 3학년 초에 ‘유레카 모먼트’가 찾아온 것이다. (‘유레카 모먼트’는 내가 무언가를 벼락 맞듯 이해했을때 쓰는 말이다.)


 학기 초에 니팅머신 시간에 ‘니팅을 진행하며 동시에 실에 유리 구슬을 꿰는 법’을 연구하고 있는데 갑자기 모든 것이 시계 톱니바퀴 맞물리듯 들어맞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A 슬롯과 B 슬롯, Tuck 버튼, 텐션 다이얼, 왼 손에 잡은 실의 탄성, PART 버튼, 캐리지가 움직일 때 바늘이 맞물리는 감각, 이 모든 것이 갑자기 조화롭게 어우러져 내 뇌 안에 뿅 나타난 서랍 안에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그 뒤부터 갑자기 내 니팅 실력이 급속히 늘었다. 힐더가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겼냐고 놀랄 정도였다. 마치 군데 군데 끊겨있던 루프가 보강되어 마침내 연결된 것 처럼, 니팅 머신 오퍼레이션의 많은 의문점이 풀리고 내 프로세스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졌다. 마치 어린 아이가 두 발 자전거에서 계속 넘어지다가 어느 순간 균형을 잡은 것 처럼. 


나는 그제서야 니팅과의 오랜 권투시합이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니팅의 연속적인 구조가 얼마나 흥미로운지, 실과 실 간의 탄성을 이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즐겁게 뇌를 자극하는지 느꼈다. 물론 그 뒤로도 수많은 실수를 저질렀고 셀 수 없이 실을 끊어먹었지만, 니팅 머신의 매력에 푹 빠진 나는 종내엔 학교 워크샵에서만 니팅 작업을 하는게 아쉬워 수동 니팅 머신을 구입할 정도였다. 3년 내내 잘 쓴 그 실버리드 Silvereed 니팅 머신은 내 작업실에 얌전히 놓여 있다. 


Intarsia sample, made by Min van der Plus, 2018



나는 니팅 디자이너라는 구체적인 타이틀은 가지고 있지 않다. 내가 니팅을 다루는 것 이상으로, 니팅 디자이너들은 테크닉적으로 훨씬 본격적인 사람들이다. 나는 다만 텍스타일을 공부하며 니팅을 이렇게 열심히 배울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진 것이 커다란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KABK 텍스타일 디자인과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모든 테크닉을 배울 수 있지만, 그만큼 과제의 압박이 많다는 것. 학교를 다닐 때는 그 엄청난 스케줄이 불만이었지만, 추억으로 희석된 지난 날은 나에게 '경험치'라는 값진 선물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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