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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 in Lowland Jun 12. 2020

바덴 해역의 별헤는 밤.

네덜란드 최북단 섬, 아멜란드와 텍셀 이야기.


여름이 다가온다. 네덜란드도 어느새 구름보다 햇빛이 더 익숙한 날씨가 되었지만, 그놈의 바이러스 때문에 여느때처럼 어딘가로 여행을 가는 것은 꺼려지는 요즘, 사진첩을 보며 그리워하는 장소가 하나 있다. 네덜란드 최북단 바덴 해역에 있는 다섯개의 섬 중 하나, 아멜란드 Ameland 와 텍셀 Texel 이다.


어릴때 김혜린 작가의 ‘북해의 별’을 읽은 덕일까, ‘북해’ 라는 단어가 내게 주는 울림은 지구 그 어떤 곳을 떠올리는 것 보다도 남다르다. (비록 ‘북해의 별’은 가상 국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지만.) 지구의 북쪽, 한국과는 너무나 먼 곳. 빙하 틈새의 바람이 때묻지 않은 채 나를 맞이하러 날아올 것만 같은 곳. 


아마 한국땅의 북쪽이 막혀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비록 네덜란드의 바덴 해역은 북해라고 하기엔 상당히 남쪽에 있지만, 그래도 한 나라의 최북단 섬에 간다는 것은 아이슬란드 정도로 북쪽에 위치한 곳에 간다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뱃속이 간질거리는 설레임. 오랫동안 닫혀있던 성당 혹은 금지된 성역으로 가는 것 같은 아련한 설레임이다. 네덜란드의 중간-남쪽 지역에 사는 나는 북쪽으로 갈 일이 없다. 바덴 해역의 섬 역시 생각보다 거리가 떨어져있어 좀처럼 방문하기 쉽지가 않다. 7년을 살면서 두 번 정도 다녀왔을 뿐이다.







아멜란드에는 2013년에 갔다. 10월 말 경에 일주일간의 가을 방학이 있었는데 (네덜란드 학교는 겨울 방학이 2주인 대신 1주일 간의 가을 방학이란 것이 있다.) 더치 친구 N이 너무나 고맙게도 가족이 쓰는 작은 캠퍼형 별장을 며칠간 빌려주었다. 


나는 당시 헤이그 안에서도 살짝 ‘스케치한’ 동네에 임시로 살고 있었는데, 밤이면 고성방가와 싸움과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트램 종소리와 섞여 빈번히 들리던 그 동네가 지긋지긋해 못견딜 참이었다. 때마침 핀란드에서 온 반 친구 P도 고향의 숲을 그리워하던 참이라 그녀와 나는 신나게 배낭을 쌌다. 우리는 도시의 공원이 아닌, 좀 더 아늑하고 인적이 드문, 최대한 인파와 떨어진 외딴 곳에 가고 싶었다. 나름 초보 유학생 최초의 장거리 여행이었다. ‘북해의 별을 보고 북해의 공기를 마시자!’이것이  나와 P의 소박한 다짐이었다. 



헤이그에서 아멜란드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길었다. 거의 네 시간 정도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며 홀베르드라는 작은 도시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아멜란드 섬으로 들어가는 페리를 탔다. 


아멜란드를 비롯한 북쪽 섬들은 네덜란드의 가장 특징적인 지형인 듄 Dune (사구)이 돋보이는 곳이다. 네덜란드의 듄은 모래 뿐만 아니라 풀과 나무들도 함께 어우러진 작은 언덕들로 이루어져있는데, 혼자 걸으면 외계 행성에 불시착 한 듯 낯선 느낌이 든다.


페리에서 내리자마자 P와 나는 자전거로 섬을 한바퀴 돌았다. 5분 간격으로 햇빛과 소나기가 교차하는 험악한 날씨였지만, 오랜만에 숲 길의 나무 냄새를 맡으니 그 혹독한 날씨마저 용서가 되었다. 


상점밖에 없는 시내는 조그마했다. 작은 카페에선 따뜻한 수프와 맥주를 팔았고, 기념품점에선 특산품인 양모로 된 아기자기한 제품들을 팔았다. 특히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엔크하우저 알마낙 Enkhuizer Almanak 이라는 손바닥만한 연감이었다. 16세기부터 매년 나왔다는 이 연감은 한 해의 날씨나 천문 정보 뿐만 아니라 공휴일이나 지역 마켓이 열리는 날을 표시한 캘린더, 네덜란드의 전설이나 우화같은 소소한 정보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네덜란드어를 읽을 수 없는데도 나는 그 책의 묘한 매력에 끌렸다. 마치 작은 배를 탄 어부들이 파이프를 입에 물고 깨진 안경을 쓴 채 이 책을 읽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읽을 수 없는 기묘한 언어로 된 책을 발견한 소설 속 주인공이 된 기분으로 나는 이 책을 샀다.



엔크하우저 알마낙, photos from Bruna, Catawiki, Edwin Vlems.




아멜란드의 곳곳에서 제일 많이 보이는 동물은 양과 갈매기였다. 해가 비추는 곳을 찾아 느긋하게 주저앉은 양떼들을 하염없이 구경하다가, P와 나는 섬의 가장자리로 가서 파도 옆 방둑을 한참 걸었다. 날씨가 희한하기 그지 없었다. 나는 철철 내리는 소나기 구름 아래에 서있는데, 50m 앞에선 비구름을 뚫고 햇빛 한자락이 노란 빛을 뿜으며 잔디밭에 앉았다. 바람이 부는 속도가 워낙 엄청나서 구름들은 자동차처럼 빠른 속도로 하늘을 갈랐다.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3배속으로 재생 되는 구름의 이동 속도를 맨눈으로 보는 느낌이었다. 뻥 뚫린 지평선은 직선이 아닌 얕은 곡선을 그리며 엄청난 구름떼를 몰았다. 외투가 다 젖도록 우리는 비를 맞았고, 신발은 이미 진흙이 엉겨 엉망이 되었지만 나와 P는 우리 단 둘만이 지구에 살고 있는 기묘한 감각을 즐기며 걷고 또 걸었다.


Ameland, photo by Min van der Plus, 2013


Ameland, photo by Min van der Plus, 2013


Ameland, photo by Min van der Plus, 2013




그리고 밤이 되어 우리는 숙소 바로 옆 해변을 다시 걸었다. 매연이나 도시의 불빛이 침범할 리 없는 곳에서 우리는 말 그대로 ‘쏟아지는’ 별 빛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나는 그렇게 커다란 북두칠성을 처음 보았다. 망원경으로 확대한 북두칠성이 내 코 앞에 놓여있는 것 같았다. 별을 만질 수도 있을것 같았다. 네덜란드에 온 후 오롯이 생각에 잠길 틈도 없이 두 달간 낯선 생활에 시달렸던 날들이 꿈 같이 멀게 느껴졌다. 살면서 누구나 머릿속에 각인한 풍광들이 몇몇 있을 것이다.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신기하게 바로 어제 일 처럼 생생한 공감각. 아멜란드의 별밤이 나에겐 그렇다. 북해의 파도, 북쪽 하늘의 북두칠성. 전설처럼 용이 나타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던, 수많은 별을 헤던 밤.






두 번째로 바덴 해역에 간 것은 2017년이다. 미국에 사는 언니와 형부가 네덜란드에 놀러왔을때 나는 북쪽 섬을 추천했고, 이번엔  텍셀 Texel 이라는 섬에 갔다. 텍셀은 바덴 해역의 다섯개 섬 중 가장 큰 섬이다. 형부 D는 영화 ‘노킹 온 헤븐즈 도어’의 엔딩이 텍셀의 해변에서 촬영된 것이라고 이미 사전조사를 해왔고 우리는 페리에서 내리자마자 GPS를 텍셀 최북단 해변가로 찍고 달렸다.


해질무렵 해변에 도착한 우리를 어수룩하게 해가 지는 보라색 하늘이 맞이했다. 하지만 사진으로 찍으면 더할나위없이 아름다운 그 곳은, 실제로 사람이 걷기엔 너무 힘들었다. 바람이 너무 거셌다. 바다 거품이 세제 풀듯이 엄청난 거품을 냈고, 모래가 알알이 살에 박히는 느낌이었다. 바람 때문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던 우리 셋은 약속한 듯이 폭소를 터트렸다. 대체 이런 장소에서 어떻게 영화 촬영을 한걸까. 최대한 옷으로 얼굴을 가리며 우리는 해변의 모래 폭풍을 뚫고 지나갔다. 텍셀에서의 이틀 내내 사막에라도 온 듯 우리 옷에는 모래가 가득했다.


Texel, photo by Min van der Plus, 2017
Texel, photo by Min van der Plus, 2017



텍셀은 바덴 해역의 다섯개 섬들 중 가장 크지만, 그래도 역시 섬이었다. 조그만 시내를 벗어나면 금방 양떼 목장과 듄이 지평선을 지배했다. 듄을 처음 보는 언니 부부는 한참 해변을 걸었고, 이윽고 저녁이 되자 우리는 차를 몰고 별 구경을 했다. 2013년의 아멜란드보다 구름이 많이 낀 날씨라 아쉽게도 별을 보는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거세게 부는 바람이 검은 구름을 밀치고 간간히 구멍난 하늘을 보여줄때마다 보석같은 별들이 빛났다. 별은 제자리에 묵묵히 자리잡아 하얀 빛을 반사했다. 움직이는 것은 구름과 바람과 땅과 나 뿐이었다. 아주 먼 옛날, 전기도 책도 없던 시절의 옛 사람들은 별을 보며 이야기를 자아냈다. 북반구의 별과 남반구의 별은 다르지만 그 별들에 보이지 않는 실을 이어 형상을 상상하고 신화를 탄생시킨 것이 인간이다. 텍셀의 별을 맨몸으로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가 상상도 못할 과거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시절 사람들도 나와 똑같이 별을 바라보고 있었겠지. 텍셀은, 아멜란드는, 바덴 해역의 섬들은 도시 생활에서 좀처럼 찾기 힘든, 고요의 힘이 가득한 곳이었다.




아멜란드나 텍셀은 이름난 관광지라고 하기엔 너무나 소박하다. 동남아시아나 하와이의 더없이 아름다운 해변들과 비교하면 화려함이 턱없이 부족하다. 마치 무뚝뚝한 어부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섬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내게 네덜란드에서 가장 그리운 곳을 꼽으라면 나는 이 북쪽의 섬들을 꼽는다. 여기서 태어나지 않았는데도 신기한 향수를 주는 조용한 섬. 그곳이 바덴 해역의 다섯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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