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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 in Lowland Jun 19. 2020

'미트볼 비빔밥', 나만의 집밥.

네덜란드에서 만드는 나만의 전통.


몇 달 전, 친구들과 로테르담의 한식 바베큐 식당에 갔다. 우리가 가장 환호한 메뉴는 바베큐 보다도 냉면이었다. 그 어떤 네덜란드 한식당에서도 본 적이 없는 메뉴, 냉면. 냉면을 외국인이 운영하는 한식당에서 볼 줄이야. 기쁨을 넘어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신나서 시킨 그 냉면을 우리 모두 한 입 이상 넘길수가 없었다. 

냉면 육수가, 육수가 아니었다. 

사이다 맛 설탕물이었다. 


"이걸 냉면이라고 부르는 건 범죄야."


동행이 허탈하게 물을 마시며 말했다. 


"그런데 여기 온 외국인들은 이걸 냉면 맛이겠거니 착각하겠지?"


그 '설탕물에 헹군 면'을 냉면이라고 생각할 사람들에게 마음속으로 애도를 표하던 중 들었던 생각이 있다.


내가 먹는 한식은 과연 ‘진짜 한식’일까?



Blening & Crashing, Silkscreen by Min van der Plus, 2017.



한국인 유학생들이 울며 겨자먹기로 익숙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있다. 이른바 ‘야매 한식’. 

모 없으면 도인지라, 재료가 없으면 대체해서 넣거나 맛만 비슷하게 흉내내는 한식을 만드는 것이다. 


7년 전과 비교하면 네덜란드에서 한식의 위상이 많이 높아졌다. 물론 한인 교포의 수가 많은 독일이나 미국처럼 한인 대형마트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시아’의 온갖 나라들의 식재료를 뭉뚱그려 파는 ‘아시안 슈퍼마켓’에서 요 몇년 사이 한국 식료품 코너가 눈에 띄게 커졌다. 한식당의 갯수도 도시마다 점점 많아지고, ‘김치 워크샵’이 도시마다 종종 열리기까지 한다. 냉동 포장이나 진공 포장, 캔으로 된 음식들은 거진 다 네덜란드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여기서는 구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신선한 제철 나물이나 한국식 고기 컷팅, 방앗간에서 갓 만든 떡, 갓 짜낸 참기름, 햇밤, 생 더덕, 강원도 잣, 겨울철 호박고구마, 광어회, 곱창, 생면 같이 수출이 어려운 것들은 웬만해선 구할 수 없는 귀한 몸들이다. 


사실 나는 내가 한식에 미련이 없는 사람인줄 알았다. 네덜란드에 오기 전까지 한식을 먹는다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먹는 것이 ‘한식’이라는 자각을 하지 않고 살았다. 


집밥이라는 것이 그렇다. 갈비찜이나 잡채, 돌솥비빔밥처럼 ‘교과서적인’ 한식을 매일 먹지는 않으니까. 그저 집에 있는 작은 반찬들을 모아 소소하게 먹고 살았을 뿐이다. 흔하디 흔했던 그 식재료들. 멸치볶음, 오징어채 볶음, 콩자반, 연근조림, 메추리알 장조림, 깻잎조림 톳나물 무침, 파래 무침, 꼬막 젓갈. 그 소소하고 별것없는 반찬들은 네덜란드에선 ‘별것 있는 귀한 몸’이다.


덕분에 내가 만드는 것은 한국에서 접할 수 있는 요리들의 60% 정도만 따라한 것들이다. 새우젓 없는 달걀찜, 청양고추 없는 양념장, 무와 밤 없는 소고기찜, 대다수의 나물이 빠져 고추장 양념장이 제일 중요한 비빔밥, 불고기 컷팅된 고기가 없어 스테이크 고기를 채썰어 만든 불고기 등등. 좋게 말해 즉흥성과 창의성 중요한 한식 요리, 솔직히 말해 부족함을 메꾸기 위한 발버둥. 그것이 바로 ‘야매 한식’이다.



그런데 내 야매 한식에 요즘 레시피 하나가 늘었다.





남편 M은 네덜란드식 소고기 미트볼을 굉장히 잘 만든다. 그 미트볼은 그레이비나 머스터드와 곁들여 먹으면 기가 막히게 맛있다. 그런데 그 미트볼을 먹다보면 고추장 양념장과 잘 어울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매운 맛은 단 맛이 많이 섞인 매운맛이라, 미트볼의 고소한 맛과 조화가 잘 될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M이 열심히 만든 미트볼 레시피에 고추장을 끼얹는 상상을 하는 것이 미안했다. ‘해외 여행 나와서 뭐든지 고추장 튜브에 찍어먹는 인간’이 바로 나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그런데 M은 나보다 훨씬 쿨한 사람이었다.


“네가 먹고 싶은대로 먹는게 정답이야.”



그렇게 ‘네덜란드 우리집’의 오리지널 한식 레시피 1호가 탄생했다. 

갓 지은 밥에 데친 시금치와 얇게 채 썬 당근, 달콤한 고추장 양념장과 참기름. 

그리고 그 위에 네덜란드 미트볼 세 개를 얹는다.

나와 M의 ‘미트볼 비빔밥’이다.




설탕물 냉면이나 우리의 미트볼 비빔밥이나, 어찌보면 똑같이 근본 없는 맛이라고 생각할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전통은 사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변화해 왔을 것이다. 누군가의 부엌에서 모자란 재료를 메꾸려 궁리끝에 만든 어떤 요리를, 우리는 지금 ‘정통 한식’이라고 부르고 있을수도 있다. 혹시 모를까, 만약 내 자식과 그의 자식들이 몇대에 걸쳐 미트볼 비빔밥을 만든다면, 200년 후에는 이것도 전통음식이 될지도.


유연한 생각이 즐거운 현재를 만든다. 

현지에 있는 음식으로 알아서 적응해라, 

다 사람 사는 곳이니 거기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 


네덜란드로 유학을 떠나는 나에게 엄마가 해준 말이다. 


나는 미트볼 비빔밥을 먹으며 한국에도 네덜란드에도 똑같이 두 발을 걸친 유니크한 ‘나의 집’을 떠올린다.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집을 떠올리게 하는 집밥. 한국인인 내가 만든 ‘한국인의 식사’, 그리고 네덜란드인인 M이 만든 ‘네덜란드인의 식사’. 근본 없는 퓨전이자 이유 있는 혼종. 


내가 가진 전통과 낯선이들의 전통이 치고받고 싸우면서 결국 어떤 모양새로든 화합하는 것.

고향을 그리워하면서도 발 딛고 선 새로운 땅을 다시 나만의 고향으로 만드는 것.


네덜란드에서의 생활은 항상 이래왔고, 앞으로도 이럴 것이다.

 우리 집의 전통은 이렇게 새싹처럼 작고 천천히 돋아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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