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n in Lowland Apr 09. 2021

부촌과 게토를 넘나들며(1)

네덜란드 사회의 빈부격차에 대해.



작년 7월 이후로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글을 쓸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코로나로 인한 네덜란드 내 전면적인 봉쇄가 너무 자주 시행되었다. 

그만큼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내가 몸 담았던 동네의 민낯을 필요 이상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2021년 3월, 이미 그곳에서 '탈출' 했기에 '몸 담았던'이란 과거형을 쓸 수 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론 '탈출'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여전히 그 동네엔

사람들이 살고 있고, 아마도 아주 오랫동안 그 빈곤함의 공격성이 고여있을 동네임을 알기 때문이다. 


서유럽 중에서도 손꼽히는 부국이기도 하고, 2차대전 이후 내실있게 지속된 사회보장제도 덕분에 네덜란드 사회의 

빈부 격차는 아주 드라마틱하게 드러나있지는 않다. 적어도 판자촌이나 쪽방촌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여기 사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확연히 느껴진다. 부와 빈이 마주할 일이 없도록 촘촘하게 직조된 네덜란드의 시스템을. 그리고 한국 미디어에서 조명하는 북/서유럽의 '평등 의식' 따위는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2013년 부터 7년간 헤이그 Den Haag 에 살았다. 

헤이그는 작지만 어느정도 '팬시한' 도시다. 국제사법제판소나 유로폴같은 국제 기구도 많거니와, 대법원이나 의회를 비롯해 온갖 중요한 정부 기관들이 대부분 헤이그에 있고, 각국의 대사관도 헤이그에 있다. 그러다보니 돈 많은 외국인들이나 소위 말해 '많이 배운' 사람들이 산다는 이미지다. 


물론, 서울도 구 마다 다르듯 여기도 동네마다 다르다. 

네덜란드에 도착해 처음 3개월간은 그런 헤이그의 이미지와 매우 다른 동네에서 지냈다. 


네덜란드에 대해 대충 '플란더스의 개'에 나오는 나막신과 풍차와 치즈 비스무리한 뭔가를 연상했던 나. 

서유럽 도시는 지브리 영화의 어느 한 장면 같겠지 라고 생각했던 나. 


그런 멍청한 환상을 품고 있으니 저녁 10시의 Den Haag Holland Spoor 역에 도착해서 큰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지금은 재개발이 되어 예전의 험악함은 없어졌지만, 2013년 당시 어둑한 HS역 부근은 진짜 너무 무서웠다. 황량하고 더럽고 험악했다. (과장된 기억일 수 있다. 첫인상이니까.) 



KABK의 4학년 학생이 서블렛으로 내놓은 스튜던트 하우스에 3개월동안 살기로 했었는데, 그 집은 이를테면 '정상적인 동네' 와 '비정상적인 동네'의 경계선상에 놓여있었다. 길거리는 쓰레기 투성이였고, 트램 라인과 자동차 길이 어지럽게 섞여있었다. 집 근처 마리화나를 파는 '커피숍'들에선 요상한 음악이 흘러나왔고, 나이트 샵에 술을 사러 오는 사람들을 마주치면 종종 희롱/조롱을 당했다. 


정말 인정하기 싫었지만, 나는 내 인종과 성에 대해 항상 자각하고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게 지긋지긋했다. 객관적으로 나는 '덩치가 작고' '위협적으로 생기지 않은' '동양인' '여자애' 였다. 당연히 미친놈들의 일등 타겟감이 될 수 밖에 없지. 그런데 내가 느꼈던 서러움을 토종 더치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를 못했다. 같은 집에 사는 하우스 메이트들은 네덜란드의 조용한 소도시에서 헤이그같은 '큰 도시'로 이사를 온 애들이었는데, 그들에게 이 환경은 이국적이고 다인종적인 '재밌는 동네'였다. 그들은 자전거 핸들에 뭍은 누군가의 정액을 만진 후, 길바닥에서 펑펑 울면서 닦아내고 학교로 가야했던 나의 아침을 겪어보지 못했다. 


나는 순식간에 내가 2등시민, 3등 시민으로 전락했음을 느꼈다. 그것은 '내가 인종의 기본값'로 여겨졌던 '내 나라'에 살때는 절대로 느끼지 못하는 서러움이다. 나는 안전한 동네로 이사가고 싶었다. 점잖은 사람들, 속으로 인종차별을 하든 말든 상관 없으니 적어도 겉으로는 그걸 드러내지 않는 '심리적인 고삐를 채울 줄 아는 사람들' 곁에서 살고 싶었다. 3개월이 지나 이사 가야 할 시점이 다가오면서 나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안전한 부촌으로의 이동.


그리고 나는 매우 운 좋게 헤이그의 Statenkwartier에 살게 되었다.





snowy day. photo by Min van der Plus, 2019



스타텐콰르티에는 헤이그의 동북부쪽 바닷가에 인접한 동네다. 전통적으로 중산층 이상이 사는 동네고, 프랑스나 독일, 미국에서 몸값을 두둑히 받으며 이주한 외국인들, 이른바 엑스팟들이 많이 거주하는 동네기도 하다. 이민자 Immigrant 와 엑스팟 Expat 은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매우 다른 외국인 그룹이다. 돈도 없는 주제에 나는 나 스스로를 엑스팟에 더 가깝게 여겼다. 


헤이그의 이민국이 2013년엔 스타텐콰르티에에 있었는데, 거주허가증 때문에 이민국을 방문하며 처음 들렀을때 나는 반드시 여기 살 거라고 다짐했다.  같은 헤이그라고 믿을 수 없이 달랐다. 고풍스러운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주택들, '정상적인' 사람들, 쓰레기가 보이지 않는 거리, 가지런한 도로와 트램 레인. 그 거리의 모든 것이 소리치고 있었다. 이곳은 안전한 동네야! 라고. 


각종 부동산 사이트에서 5분마다 새로고침을 하며 온갖 집에 어플라이 했던 2주일, 그리고 나는 내가 향후 6년 9개월동안 살 곳을 찾을 수 있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지브리에서 그렸던 그런 풍경이 스타텐콰르티에에 와서야 비로소 보였다. 그 영감은 유럽의 부촌만 골라서 다닌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 미야자키 영감이 그려낸 풍경에 세뇌당한 어린시절을 보낸 나이기에, 스타텐콰르티에에 몸담고 나서야 비로소 온 몸의 긴장을 풀 수가 있었다. 학교는 센트럴 스테이션과 가깝고 대사관과 정부 건물이 많은, 역시 부촌 중의 하나인 Voorhout에 위치해 있었기에, 나는 헤이그의 다른 지역에 대해 아예 신경을 끄고 살았다.


이 동네에선 이유없이 타인을 배격하고 공격하는 일이 드물었다. 다들 심적인 여유가 있기 때문에 자기 주장을 필요 이상으로 해야 할 일이 생기지 않았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다들 인격자고 천사라는 것이 절대 아니다. 스타텐콰르티에의 사람들은 이웃에 경계심을 가질 이유가 없는 사람들일 뿐이다. 눈에 보이는 것에 거슬림이 없고, 다들 건강한 정신을 유지하기 알맞은 개인공간을 유지하며, 평균 이상의 교육기관에서 학습된 어휘와 그 소셜 그룹에서 통용되는 몸짓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 그 총체적인 여유로움은 물론 배타적이기도 하지만, 그 중산층의 룰을 어기지 않으면 매우 편안하게 살 수 있고, 나는 실제로 너무 편안하고 안전하게 유학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가족 친척 하나 없이 홀로 떨어진 외국에서, 내 신체적/정신적 안전을 확보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어쨌든 안전한 동네에 사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expat의 버블 속에서 살았고, 평범한 네덜란드의 중산층이 그렇듯 '그 세상만' 존재하는 듯 살았다.


극단적으로 다른 네덜란드의 면모를 보게 된 것은 졸업 후의 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대 코로나 시대 4개월, 오늘도 저는 네덜란드에 삽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