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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 in Lowland May 21. 2021

'성곽 안의 사람'이 되기 위하여.

네덜란드 사회통합시험 (inburgeringsexamen) 과정에 대해.



중세시대 유럽의 도시들은 주로 성채 형태였다. 성 외부에 벽을 쌓아 성곽 안과 바깥의 사람들을 구분하는 것이 근대 도시, 나아가 근대 국가 형성의 시작이 되었다. 게르만어군에 속한 나라들의 언어로 '도시' 혹은 도시와 관련된 단어를 알아보면 이 성채를 뜻하는 Burcht, Burg 와 비슷한 단어가 많이 보인다. 네덜란드어로 Burger는 '시민' 이고, Burgerschap 은 '시민권', Burgemeester는 '시장'이다. 


'이민자들의 사회 통합', 'civil integration'을 뜻하는 네덜란드 단어 'inburgering' 의 유래가 이렇다.


M과 결혼을 하고 파트너십 비자로 네덜란드에 살고 있는 나는, 네덜란드 사회 통합 시험, 인뷔르흐링엑사멘 inburgeringexamen 대상자이다. 그들의 성 안에 들어가 살기 위해 쳐야 하는 시험이다.


나는 2025년까지 이 시험이 요구하는 모든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파트너십 비자는 기본적으로 3년 내지 5년의 유효기간을 갖고 있는데, 유효기간 안에 시험을 통과해야 영구 영주권 permanent resident permit 이 나온다. 이 '영구' 영주권은 5년에 한번씩 갱신해야 해서, 엄밀히 말하자면 '영구 임시 영주권' 인가 싶다. 네덜란드 시민권=네덜란드 국적을 취득하지 않는 한 나는 영원히 이 나라에 임시로 영주하는 셈이다. 시민권은 강제가 아닌 만큼 나는 시민권을 신청할 계획이 없고, 실제로 네덜란드에는 영주권만 가진 채 시민권 즉 국적은 한국인인 경우가 많다. 


내가 한국 국적을 포기할 날이 올까? 생각만 해도 무섭다. 하지만 그런 너무 먼 앞 날을 생각하기 전에 나는 일단 시험부터 쳐야 하는 신세다. 


영어만 쓰고 살았던 KABK 시절과 달리, 이제 나는 네덜란드 사회가 내게 요구하는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인뷔르흐링엑사멘 (이제부터 '인버거링'으로 쓰겠다)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


1. 언어시험 총 다섯가지 (쓰기, 읽기, 말하기, 듣기, 네덜란드 사회문화지식(Kennis van de Nederlandse Maatschappij)

2. 네덜란드 취업 시장에 대비하는 포트폴리오 만들기(ONA)+인터뷰

3-1. 신청인이 거주하는 시청에서 주관하는 사회통합 워크샵(participatieverklaringstraject)을 이수. 

3-2네덜란드 사회에 본인이 통합하겠다는 사회통합서명 (participatieverklaring)에 서명.


번거로운 과정이긴 하다. 하지만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이 비자 때문에 거쳐야 하는 온갖 과정(이게 궁금하다면 KIIP를 한번 검색해보시라,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이 달리 보일 것이다....)을 생각하면 입 닥치고 고맙습니다 절을 해야 마땅할만한, 명확하고 이성적이고 납득 가능한 프로세스이기도 하다.


 다음주부터 총 2주동안 저 모든 언어 시험의 포격 안으로 뛰어들 예정이다. 위시 미 럭.

하지만 오늘 이 글을 굳이 쓰는 이유는 언어 시험 때문이 아니라, 저 3-1의 워크샵 때문이다.

어제 워크샵을 이수했기 때문이다.






workshop handout doodle, photo by Min van der Plus, 2021



오전 9시 부터 오후 12시까지, 코로나 때문에 평소라면 30명 쯤 왔을 워크샵에 총 8명이 참가를 했다. 중국인도 있었고, 콜롬비아 인, 뉴질랜드 인, 국적은 각각 달랐다. (참고로 워크샵의 시간/기간은 각 시마다 다르다. 예를 들어 로테르담에선 운 안좋으면 총 4번의 워크샵을 이수해야 하기도 한다.)


 이 워크샵은 쉽게 말하자면 사회통합서명서에 명시된 '네덜란드는 자유 민주 국가이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너는 이 나라에서  하면서 세금을 내고 살 의무가 있지만 도움이 필요하다면 도와줄수도 있는 국가다, 그리고 너는 이제 네덜란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적극적으로 통합해야해'를 풀어서 설명해주는 워크샵이다. 


현대 국가에 사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당연해보이는 저 가치관들을, 굳이 왜 워크샵으로 사람들에게 교육하는 걸까? 


워크샵에 가기 전에 솔직히 이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워크샵에 참여한 한 부부를 보고 난 후, 나는 왜 네덜란드가 이 워크샵을 의무화 했는지, 그리고 왜 사회통합과정의 언어시험에 네덜란드 사회문화지식시험(KNM)을 포함시켰는지 이해하게 됐다.



일단 KNM 시험의 몇몇 문제들은 예를 들어 이렇다;


"학교 수업에서 조를 짜는데, 남자 아이들이 '여자애들은 멍청이라 조장이 될 수 없어'라고 말한다. 이에 답하는 옳은 대답은?"


"당신의 이웃이 새로 입양한 개가 너무 많이 짖는다.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까?"



뭐 이딴 질문이? 

이제 정상적인 성인에게 물어볼만한 질문인가?

개가 짖으면 뭐, 총 들고 쳐들어가서 싸우라고 대답할까봐? 당연히 그 이웃이랑 얘기부터 해야지.

이런 생각이 드는게 당연하다.

KNM 예시 문제들을 풀면서 대체 이 당연한 일반 상식들을 왜 나에게 구구절절 가르치는가, 나는 왜 M과 결혼을 해서 이런 시간 낭비를 해야 하는가(?) 투덜대던 나였다. 


그리고 이 워크샵 역시 KNM에 나오는 일반 상식 나열의 연장선이라, 저 위의 사진의 낙서 꼬락서니를 보면 알겠지만 나는 워크샵 내용에 전혀 집중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내 생각을 바꿔놓은 그 부부.


국적은 말하지 않겠다.


남편과 아내가 함께 앉아 있었다.

아내의 자기 소개는 남편이 대신 했다. 

그 여자는 벙어리가 아니었다. 다만 영어도 네덜란드어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남편은 워크샵 진행자가 말하는 것들을 그 여자의 언어로 통역해주었다. 

그러나 그가 입을 다물고, 어색하게 웃으며, 통역하지 않는 순간들이 있었다.


'네덜란드에선 낙태가 가능하며, 성인 여자라면 스스로 낙태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네덜란드에선 동성혼이 가능하다.'


'네덜란드에선 종교가 법보다 우선시 되지 않는다.'


'네덜란드에선 남자와 여자의 권리가 평등하다.'



내 맘속에 점점 분노가 차올랐다. 

마치 넷플릭스 인권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을 보는 것만 같았다.


왜 저 남편은 아내에게 전달되어야 마땅할 정보를 검열하는가?

왜 하필이면 '특정 상황에 관련된' 정보들만?

저 아내는 왜 저 남편에게 저리도 의존적일수 밖에 없는가?

왜 워크샵 진행자는 저것을 지적하지 않는가?

저럴거면 네덜란드에 이주는 왜 했는가?

통합하겠다는 서명서에 서명을 할 때 거짓으로 할건가?


이런 생각들이 내 맘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동안, 저 남편은 심지어 워크샵 가운데 업무전화를 받기도 했다. 너무 무례했다. 저런 사람들 때문에 네덜란드 정부가 이민자 관련 법을 해마다 점점 까다롭게 만드는 거겠지, 나 뿐만이 아니라 그를 슬쩍슬쩍 쳐다보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때서야, 이 지리멸렬하고 귀찮은 사회통합시험이 누군가에게 반드시 필요할 것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게 너무나 당연한 정보들이 누군가에게는 필터링을 거쳐 전달되지 않는다. 그 필터링을 벗어나 한 인간이 이 사회에서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제일 중요한 무기는 언어라는 것을. 더치 A2라는 중초급 수준의 언어라도 배우지 않는 이상, 저 여자는 평생 남편과 그들만의 이민자 사회 버블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절박한 의존의 사슬을 강제적으로라도 끊어내지 않는다면,네덜란드 사회의 '특정 문제들'은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지금은 저 남편이 아내의 귀를 막고 있지만, 저 아내가 의무적으로 언어를 배우고, KNM 시험을 준비할 때는 결국 이 모든 정보가 저 아내에게 전달될 것이라는 것을.






어제 이후로 인버거링 과정에 대한 불만이 내 맘속에서 눈 녹듯 사라졌다.


자신의 성을 떠나 다른 성으로 떠나는 과정을 거칠때, 누군가는 황금 마차를 타고 갈 수도 있고, 누군가는 맨발로 걸어갈 수도 있다. 그 성은 내가 살던 성과 비슷한 관습을 가지고 있을수도, 또는 전혀 다른 곳일 수도 있다. 그 모든 가능성을 현대 국가 시스템이 개개인을 위한 맞춤식으로 고려하기엔 현실적으로 역부족이다. 


나는 성곽 안의 정착민이 되기 위한 출입증을 가져야 하는 입장에서, 저 아내와 비교해 너무나 편안하게 출발했다. 그것은 내가 노력해서 쟁취한 것이 아니다. 시작점이 너무 다른 것이다. 그러니 내게는 조그만 불편을 줄 지라도, 내게는 너무나 당연할 것일지라도, 저 아내에가 앞으로 네덜란드에서 살아갈 '그들만의 세계가' 네덜란드의 가치와 전혀 다를지라도, 그래서 그 가치를 적용할 수 없더라도, 


저 아내와 같은 많은 이민자들에게 적어도 최소한 동등한 기회라도 준다는 면에서, 네덜란드 사회 통합시험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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