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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딧불 Jun 27. 2024

귀신이 산다


나는 중국 드라마를 보며 하루를 마감한다. 피곤에 절어 금방 곯아떨어지지 않는다면 1시간 정도 신나게 대륙의 오빠들과 함께 하루의 스트레스를 날린다. 중드는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 개연성이나 인과는 따위는 필요 없는, 아니 그런 걸 갖고 있지 않은 드라마가 대부분이다. 재미있는 데다 긴장감마저 높아 심장을 쫄깃하게 하는 내용이나, 다음 장면을 기대하게 만드는 높은 디테일이 빠지니 스토리는 자극만 남아 매우 효율적으로 드라마에 빠지게 한다. 이렇게 따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뢰매급 CG는 사람을 미치게 하지만 대륙은 대륙. 그 넓은 나라에 잘생긴 오빠들이 얼마나 끊임없이 나오는지. 이런 대륙의 오빠들로 이미 충분히 만족스럽기 때문에 중드에 거는 기대는 매우 낮지만, 빠져나오기는 어려운 개미지옥 같다.     



그날 밤도 하루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린다는 나만의 합리적인 이유로 중드의 세계로 막 들어갈 참이었다. 패드를 들고 신중에 신중을 기해 작품을 선택하고 시작 버튼을 눌렀다. 드라마가 막 시작하기 전 짧은 순간의 검은 화면에 무표정한 여자의 모습이 스쳤갔다. 대륙의 오빠들을 상상하며 한껏 기대 중이었는데, 검은 화면을 스치는 낯선 여자를 보자 ‘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귀신인가?’     



오싹한 기분에 선뜻 되감기를 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스친 그 여자가 낯설고 무서웠다. 대체 뭐지. 내가 뭘 본거지. 우리 집에 귀신이 있다. 뭐야. 나 귀신 보는 거야? 틀어놓은 중드는 플레이되고 있었지만, 귀신을 봤다는 생각에 드라마를 볼 수 없었다. 가위에 눌린 듯 몸을 움직이지 못해 간신히 소리를 내어 옆에 잠든 남편을 깨웠다.  


    

“오빠”

“오빠 나 귀신 봤어.”     



내 목소리를 듣고 뒤척이던 남편이 잠에서 깨어 나를 쳐다봤다. ‘오빠 나 귀신 봤어.’ ‘얼른 자’ ‘오빠 나 귀신 봤다고’ ‘오밤중에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아니야, 진짜라니까’ 한밤중 귀신 타령에 잠들었던 남편이 일어났다.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다. 순간적으로 스친 그녀를 분명히 보았다. 내 눈을 의심할 수 없는 분명한 실루엣이었다. 한창 드라마에 빠져있어야 할 시간에 남편과 함께 되감기를 시작했다. 드라마가 시작되기 직전, 그 순간 검은 화면에 그녀가 비쳤다. 귀신이 분명히 있다. 우리 집에 귀신이 있다는 생각이 들자, 온몸에 전율이 흘렀고 내가 본 것을 남편도 봤을 것이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남편도 분명히 봤으리라. 이 분명한 장면을 못 볼 수가 없다.     



“오빠 봤지? 분명히 봤지? 오빠, 오빠”  


   

남편을 닦달했다. 귀신을 본 이 엄청난 순간에 조용한 남편이 이상해 옆을 쳐다봤다. 남편은 어이없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왜 못 봤나? 나만 보이나? 아니 그럼 나 혹시 신내림 받아야 하는 거 아냐? 더해가는 의심과 두려움이 내 마음에 차오르고 있을 무렵.     



“귀신이라고? 진심이야?”     



못 본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수가 없는데. 정녕 내 눈에만 보인단 말인가.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애도 둘이고, 아직 어린데. 내가 신내림을 받으면 앞으로 애들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남편은? 우리 집은 나 없으면 안 되는데. 내가 신내림을 거부하면 그게 자식한테 간다고 하던데. 평소 유튜브에서 주워들은 지식들이 쪼개지고 뭉쳐져 생각이 꼬리를 물자 갑자기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는 귀신이네.”     



뭐라고? 잘못 들었나. 아는 귀신이라니? 어이없는 답을 하는 남편에게 벌컥 화를 내었다. 남편은 나 대신 화면을 처음으로 돌리고 드라마가 시작되기 전 잠시 보이는 검은 화면의 순간에 정지버튼을 눌렀다. 또다시 귀신을 봐야 한다는 무서운 마음에 두 눈을 질끈 감았지만, 남편의 재촉에 감은 눈을 살짝 뜨고 화면에 비치는 귀신을 확인했다.     



귀신처럼 보인 중년의 아줌마가 깊은 팔자 주름을 하고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하루에도 거울을 통해 몇 번씩 보고 생각하는 내 모습이 아닌, 내 모습이라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어색한 내가 적나라하게 검은 화면을 통해 보여지고 있었다. 제 나이가 팍팍 드러나는 얼굴 윤곽과 주름, 힘없이 늘어진 볼, 게슴츠레 뜬 눈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중년의 아줌마가 귀신처럼 화면 안에 들어있었다.     



나를 귀신으로 착각했다는 사실도 어이없었지만, 화면 안에 귀신으로 착각할 만큼 생기 없는 내 모습에 서글픔이 밀려들었다. 사람도 아닌 귀신으로 느껴지는 나는 이제 정말 한물간 아줌마 사람일까? 마음은 창창한데 누구도 나를 그렇게 봐주는 사람은 없겠지. 이런 생각들이 들자 귀신을 본 놀란 마음과 기대하던 드라마를 보려 했던 흥분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세상을 다 잃은 중년 아줌마가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센티함에 빠져 세월의 무망함과 젊음의 싱그러움에 대해 막 생각하려는 찰나. 누웠던 남편이 한마디 거든다.     



“자, 빨리. 안 그럼 내일 낮에 진짜 귀신 본다.”     



쳇…. 그래, 이제 그럴 나이지.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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