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시청을 시작한 중드 ‘장월신명’의 끝을 달리며 나도 모르게 마음의 소리가 입 밖으로 나왔다. ‘라운희는 대체 왜 저 드라마를 선택했을까?’ 보는 내내 한숨이 나오고 기가 빨려 드라마가 끝나기를 바랐다.
무려 ‘라운희’가 남자 주인공으로 나오는 드라마였다.
‘그’라면 드라마의 내용을 제치고 존재만으로도 볼 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라운희로 말할 것 같으면 뼈만 남은 앙상한 몸매에 걸쳐진 치렁치렁한 고전 복장이 잘 어울리는 남자배우로, 처연한 표정과 왈칵 토하는 피로 시청자를 사로잡은 ‘고장극의 남신’이다.
드라마의 주인공을 확인하는 순간 흥분하기 시작했다. 오전은 방학 특강으로 오후는 정규 수업으로 평일에 집 밖을 나갈 수 없는 나에게 수업을 얼른 끝내고 누워 나만의 시간에 빠져들 수 있는 그런 드라마이길 기대하는 마음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잠시나마 머리 아픈 일상에서 벗어나 그들의 서사가 주는 환상에 나라로 떠나고 싶었다.
수업을 마치고 번개맨 보다 재빠르게 뒷정리 후 주변의 상황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한 번의 호흡 후 기대감을 가득 안고 떨리는 손가락으로 재생 버튼을 꾸욱.
라운희는 극 중 인간계(신계, 마계, 인간계를 가리켜 ‘삼계’라 한다)에서 태어난 마계(고대 악마, 마족들의 근거지) ‘악의 본체’이다. 그는 악마의 화신으로 재탄생하기 위해 인간계에서 갖은 수모를 겪는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난산으로 인해 어머니인 황후는 죽고 황제인 아버지에게 버림받는다. 주인공이 너무 미웠던 아버지는 주인공을 타국에 볼모로 보내버리고, 볼모로 간 곳에서 버림받은 왕자라는 사실을 눈치챈 왕족들은 왕자인 그를 천민보다 못한 취급으로 대우한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개처럼 짖기도 하고 쥐를 잡아먹기도 한다. 모진 매질과 멸시의 세월에 목숨을 이어가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처지에서 과분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원망하기보다 스스로를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로 여긴다.
불쌍했다. 왕자였지만, 왕자일 수 없었고 사랑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를 향한 배신과 오해가 계속되었다. 그런 안타까운 상황 속에 그가 악마의 화신인 ‘마신’으로 다시 태어난다 해도 그런 선택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선택’을 하지 않음이 문제였다.
주변에 대한 기대와 사랑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의 선한 마음으로 인해 내면의 갈등이 시작된다. 나 같으면 화딱지가 나서라도 마신으로 변해버리겠구만. 그는 사람들의 지속되는 오해에도 끝까지 선한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로 인해 마치 고난의 길을 걷는 순례자마냥 매회 차마다 몇 번씩 각혈을 토해낸다.
살면서 우리는 누구나 내면의 갈등을 겪는다.
누구나 그리고 매 순간. 우리가 향하는 삶의 걸음걸음이 그 갈등의 결과물이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있으랴.
하지만, 너무 많은 고민과 질문은 인생의 걸음을 느리고 힘들게 한다. 조금이라도 줄여서 유쾌하고 신나는 인생의 길을 가고 싶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다. 마치 습관처럼 매 순간 고민과 갈등에 빠져든다. 저 드라마의 주인공을 보며 ‘차라리 죽는 게 편하겠다’라고 말하지만, 실상 우리 인생도 저 주인공마냥 결론 내리지 못하는 상황 속에 번뇌와 연민이 가득하다.
어떤 면에서 선택하지 못한 고민은 욕심이다.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으로 어떤 것도 택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한다. 별일 아닌 것도 손익 계산서와 대차대조표를 그리고 계산기를 들이민다. 하지만 우린 안다. 우리의 어떤 선택도 완벽할 수 없다는걸. 어떤 선택도 그 끝에는 후회와 미련이 있다는 것을.
내 인생도 이러하니 드라마 속 주인공을 보는 내내 속이 터진다. 라운희의 절절한 연기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접었을 드라마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아이들의 밥을 챙기고 일을 해야 하는데 늦은 새벽까지 드라마를 보며 주인공의 속 터지는 고민을 마주하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드라마를 끄고 자야 할까, 더 봐야 할까?”
사진 : 티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