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존재자
좌절을 겪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좌절을 겪었다는 것 자체가 훈장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한 사람의 좌절과 그로 인한 고통은 저울에 올릴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치 않은 좌절과 고통을 겪은 사람들로부터 우린 지혜를 배울 수 있다. 경험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이기도 하거니와 인간이란 존재자는 경험을 통해 무언가를 배우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변화를 일궈내기 때문이다. 그 방향은 종종 예상 밖이거나 더욱 끔찍한 좌절과 고통을 가져올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변화의 방향은 언제나 불확실하다. 그러나 그것이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진보도 퇴보도 없다는 말이다. 어리석은 바보는 무풍지대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 그 안에서 서서히 죽음을 맞이한다.
한 술 더 뜬 어리석은 자가 있다. 무풍지대 속에서의 무탈함을 감사하며 마치 자신이 가장 안정적인 우위를 차지한 것처럼 여기는 사람이다. 안타깝게도 내가 만난 무탈함을 감사하는 자들 중 대부분이 이 부류에 속했다. 그들의 입은 감사함을 말하나 몸은 나태와 태만과 비겁함을 말하고 있었다. 언제나 입으로 말해지지 않는 것들이 더 많은 말을 하는 법이다.
마침내 얻어낸 평화가 아닌 아무것도 하지 않아 수동적으로 얻게 된 평화는 평화가 아니다. 무풍지대 속의 고요는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발적인 선택으로 자신만의 우물 속에 갇힌 채 모든 것과 단절하여 자신을 철저하게 소외시킨 사람은 살아있다고는 말할 수 있으나 삶을 살아내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평화는 살아있기만 한 사람이 아닌 현재 삶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에게 임하는 특권이다.
관건은 변화의 현재진행형이다. 진정한 무탈함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크고 작은 변화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상태다. 계속해서 새로운 물이 유입되는 상태, 그래서 결코 물이 고이지 않는 상태. 그 상태는 지속적이고 자발적인 낯섦과 불편함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용기와 실천에 달려 있다. 그 과정 중 넘어지기도 할 것이다. 실패도 자주 겪을 것이다. 좌절과 고통도 겪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결코 죽지는 않을 것이다.
살아낸다는 것은 좌절과 고통을 일상으로 경험하면서도 멈추지 않고 전진하는 삶에 방점이 있다. 무탈함을 바랄 수는 있으나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멈추면 안 된다. 멈추는 순간 그곳은 무풍지대가 된다. 죽는다는 말이다.
가만히 살아있는 것에 그치지 말고 당당하고 성실하게 살아내는 삶으로 말하자. 무탈함을 감사하지 말고 좌절과 고통이라 할지라도 변화의 과정 중에 있음을, 그 가운데에서도 얻을 수 있는 마음의 평안을 감사하자. 게으르고 비겁하게 죽어가는 자보다는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지금, 여기를 살아내는 자가 되자. 그래야 인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