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창의 여유
집 근처에 막창 집이 있다. 유명하고 안 하고를 떠나 집에서 슬리퍼 끌고 터벅터벅 걸어가서 간단하게 술 한 잔 걸치며 만족스럽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식당이 있다는 건 꽤나 만족스러운 일이다. 오늘 세 번째로 방문한 이 막창 집은 이제 우리 가족에게 하나의 작은 쉼터로 자리 잡은 듯하다.
삼겹살과 다른 막창만의 맛 (미각으로 느끼는 맛이 아닌 여기선 특색을 뜻한다)이 있다. 대학, 대학원생 시절부터 막창을 종종 먹어왔지만, 그땐 느끼지 못했다. 인생을 덜 살아봐서 그랬는지, 고생을 덜 해봐서 그랬는지, 그 누구도 알 수는 없겠지만, 어쨌거나 이제 내일모레면 쉰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 막창에서 여유를 발견하고 그것을 즐기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뒤늦게 알아버린 이 막창의 맛을 나의 최애 고기였던 삼겹살과 비교해 볼까 한다. 미안하다, 삼겹살아. 사랑은 바뀌기도 한단다.
삼겹살 집에 가면 우선 많이 먹게 된다. 이거시 내가 너를 사랑하면서도 계속 함께 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란다. 처음에는 일 인분만 먹어야지, 하고 들어서도 어쩔 수 없다. 이인분, 때론 김치와 마늘, 버섯을 함께 구워 먹을 수 있으면 삼인분까지 나도 모르게 먹게 된다. 그렇다. 이게 삼겹살의 힘이다. 참고로, 대패삼겹살의 경우 나는 누군가가 막지 않으면 사인분까지 흡입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 아, 이런 통제불가능함이라니! 그렇게 삼겹살 사랑으로 코로나가 시작된 직후였던 2020년 여름,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통풍이 오는 바람에 삼 주일 가량 난리를 쳤으면서도 말이다 (다행히 5년째 통풍 재발은 없다). 삼겹살아, 이게 내가 너에게 배신감까지 느낀 이유란다. 나는 너를 사랑했을 뿐인데 너는 나에게 통풍을 선물로 주었더냐. 이 배신자야.
그런데 막창의 경우, 일단 양이 처음부터 적다. 가격대도 삼겹살보다 높다. 그래서 그런지 처음부터 눈치를 보게 된다. 막창만으로 배 불리기에는 지갑이 두둑하지 않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직시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 효과는 의외로 소식을 하게 만드는데, 이삼십 대 시절에는 이 느낌이 못마땅해 막창은 디저트로 먹거나 이차로 먹곤 했다. 고기 집에 가서 고기로 배부르지 못하는 내가 미웠던 것이다. 아니, 그런데 고기 집에 가서 된장찌개와 밥으로 배를 채우면 짜장면 집 가서 돈까스로 배 채우는 거랑 뭐가 다르담?
자꾸 옆으로 새서 막창 얘길 마저 하고자 한다. 막창만의 맛은 한 마디로 여유다. 가격 대비 양이 적다는 사실이 가져다주는 의외의 효과 덕분에 소량의 쫄깃쫄깃한 막창 한 점을 막장 소스에 찍은 후 한 입에 넣고 섣불리 꿀꺽 삼키지 않고 잘근잘근 음미하며 씹게 된다. 이 놀라운 결과는 옛날 엄마가 제발 꼭꼭 씹어 먹으라고 혼내시며 말씀하시던 것이 자발적인 힘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자 같기도 한 꼬소한 막창 한 점을 입에 물고 잘근잘근 씹고 있으면 입 안 전체는 물론이고 온몸으로 그 고소함이 퍼져 그 마력의 힘에 다리에 힘이 풀리게 되는데, 막창 한 점이 거의 남지 않았을 무렵 입 안에다 명이나물과 구운 마늘, 구운 버섯을 함께 집어넣으면 막창이 남긴 고소함과 시너지 효과를 내며 야채의 신선함이 빛을 발하게 된다. 그 조그만 막창 한 점으로 야채를 듬뿍 먹게 되는 결과가 초래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럴 수가! 이 또한 옛날 엄마가 늘 잔소리하시던, "야채 좀 먹어라~!"에 대한 나의 자발적인 순종 아니겠는가. 막창은 이렇게 어머니의 소원을 성취시키고 나를 철들게 만드는 역할까지 톡톡히 해 내고 있는 것이다. 이 기특한 막창이라니! 삼겹살아, 보았느냐? 너는 막창의 절제미를 배우도록 하여라.
참고로 이 막창 집에서는 특이하게도 라면을 무료로 계속 끓여 먹을 수 있는데, 이 또한 이 집을 사랑하게 된 이유 중 하나다. 이번에도 우린 라면을 두 개나 끓여서 나눠 먹었다. 고소한 고기를 야채와 함께 먹어도 뭔가 2퍼센트 부족한 느낌이 있는데, 그 느낌을 라면이 완벽하게 잡아주는 것이다. 아, 이런 배려라니! 분명 이 집주인은 고기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섭취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과 배려까지 겸비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러니 내가 이 집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집에는 야채 또한 무한리필인데, 한국 와서 여러 고기 집을 가봤지만, 이 집만큼 신선한 야채를 제공하는 곳은 보질 못했다. 상추, 배추, 깻잎, 쑥갓, 마늘, 버섯 등의 생야채, 그리고 명이나물, 동치미, 쌈무, 묵은지 등의 반찬까지 하나도 빼지 않고 모두 맛이 훌륭했다. 막창 한 점에 야채를 듬뿍 먹으며 느끼는 이 뿌듯함. 백세주 한 잔 걸치고 또 막창 한 점에 야채 듬뿍, 또 백세주 한 잔 걸치고 막창 한 점에 야채 듬뿍, 아, 이 기막히고 행복한 반복이라니. 거기에 라면까지 한 입 후루룩 먹으면, 아, 천국이로다, 싶다. 미국에 계신 지인들이여, 내가 제대로 염장을 지르진 않았는지 말해다오. ㅋㅋㅋ
#오블완_티스토리챌린지_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