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층의 관성
차등은 차별이 되기 쉽다. 독재자가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지배 방식 중 하나가 바로 차등이라는 개념이다. 표면적으로는 공정하게 보일지 모르나 그 차등이라는 게 오로지 독재자의 주관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공정성이라는 개념은 상실될 수밖에 없다 (독재자는 당연히 그것이 자기의 주관에 의한 게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려고 애를 쓸 것이다).
차등 제도로 인해 혜택을 받은 자들은 경쟁사회에서 선택받고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다행으로 여긴 나머지 혜택 받지 못한 자들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겸손은 그저 자기 역량을 낮추면서 자기가 선택받게 되어 감사하다는 말 정도에 그친다.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겸손을 표현하든지 안 하든지 상관없이 이렇게 차등 제도로 선택받은 자들은 자기들만 생각하고 만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다. 그들은 차등이 차별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을뿐더러 그것이 차별일 리가 없다고 믿는다. 재미있게도 자기 역량을 낮추며 눈물까지 흘린 소수의 사람들 역시 이 결론에는 같은 입장을 취한다.
혜택 받지 못한 자들은 그럼 실패자인가, 루저인가? 물론 능력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일반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대부분은 실패자도 루저도 아니라는 데에 나는 오백 원 걸 수 있다. 그들 가운데에는 오히려 혜택 받은 자들보다 더 뛰어난 역량을 가진 자도 있고, 어떤 모종의 이유로 차등이라는 기준에 부합하지 않아 선택받지 못한 자들이 많다. 독재자의 기준이 얼마나 공정했는지를 알려면 이들의 입장을 고려하고 말을 들어봐야 하는 것이다. 굉장히 좋지 않은 경우, 몇몇 사람은 독재자와 개인적인 관계가 좋지 않아 독재자가 일부러 그들을 배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차등의 기준을 선정하기도 하는데, 그 숨은 의도는 언제나 소수의 기득권층만 알고 있다. 차등이 배제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고 마는 최악의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차등은 차별이 되고야 만다.
차등 제도가 가진 표면적인 장점은 뛰어난 역량을 갖춘 사람들을 우대하여 그들의 역량을 치하하고 더욱 매진하도록 만드는 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좋은 목적을 대부분의 기관이나 단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차등 제도가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차별이 되어버린 차등 제도가 가진 최악의 단점은 기득권층의 견고한 벽을 ‘공정’의 옷으로 치장한다는 데에 있다. 이로써 기득권층은 우월감을 느끼게 되고 반복되다 보면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기득권층과 비기득권층의 분리가 마치 당연한 제도인 것처럼, 마치 당연한 문화인 것처럼 여기게 된다. 나는 바로 이것이 굉장히 위험하고 무서운 부분이라 믿는다. 독재자가 할 수 있는, 독재자가 자기 힘을 오래도록 유지하기 위한, 소수의 지지자를 위한 가스라이팅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차등 제도의 이상을 나는 부인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그것의 현실성은 인간의 본성을 고려할 때 지극히 성취하기 어렵다고 본다. 무한경쟁체제를 더욱 부추기는 효과도 내게 되는데, 이때 유일하게 팔짱 끼고 웃을 수 있는 자는 독재자 밖에 없다. 나는 이 잔인한 연극을 반대한다. 차별이 되었다고 비판하는 사람의 말을 독재자는 간단한 논리로 부숴버릴 수 있다는 점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말할 것이다. 계속해서 저항할 것이다. 차별은 기득권층이 만드는 것이고, 그것의 소멸은 기득권층이 스스로 차등이 아니라 차별임을 깨닫고 차별이 되어버린 그 제도를 제거하거나 수정하는 방법으로만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독재자도 악하지만, 그 독재자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여 사상이 되고 이념이 되고 신앙이 되어버린 기득권층들이 생각 없이 관성에 이끌리어 살아가는 그 껍데기 삶이 어쩌면 더 악할지도 모르겠다. 공부가 필요하다. 경청이 필요하다. 그런데 과연 그날이 올 수 있을까.
#오블완_티스토리챌린지_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