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런던이라서, 그러나]
1.
이 글의 구상을 시작했던 화요일, 오전 11시 반. 중요한 과제를 하루 앞두고, 후딱 점심을 먹고 단골 카페에 갈 예정이었다. 점심으로 뭘 먹어야 하지? 머리를 잔뜩 굴려야 하는 이런 날엔 밥이 꼭 필요하니, 1인용 밥솥에 백미를 씻어 앉혔다. 평소 같으면 잡곡까지 섞어 반나절 불리는데 이번 주는 그럴 여력이 없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며칠 동안 장을 보지 않아 영 썰렁하기까지 했다. 가만 보자, 제대로 살펴보니 계란과 애호박, 그리고 잎채소가 있다. 그럼 점심은 이거다. 이 음식만큼 간단하고 든든한 게 없다.
먼저 애호박을 채 썰고, 프라이팬에 살짝 볶는다. 그리고 계란은 프라이. 노른자는 완전히 익지 않게 하는 게 포인트다. 조금 넓은 그릇에 갓 지은 밥을 담고, 잎채소와 볶은 애호박, 그리고 프라이한 계란을 위에 올려 고추장 툭, 참기름 휘리리, 깨 톡톡. 살살 비벼서 한 숟가락 가득 입에 넣으니, 절로 이 소리가 나왔다.
"오 마이 갓, 이거지."
런던에서 웬 비빔밥이냐 할 수 있겠지만 고백하자면, 이만큼 간단하면서 내 속을 든든하게 채워주는 음식이 없다.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가방을 메고 집 밖을 나오니 밖의 기운은 쌀쌀했다. 하지만 상관없다. 비빔밥 덕분에 속이 따뜻하니까. "아름 양은 흰쌀밥이 몸에 잘 맞아요." 몇 달 전 한의원 의사 선생님이 내게 하셨던 말씀을 떠올리며 나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카페로 향했다. 그리고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
"역시 밥이 최고야~"
2.
예전엔 이렇게 한식을 좋아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하자면 몇 년 전의 난 밥 없이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샌드위치만 먹어도 배가 불렀고, 빵과 디저트에 미쳐있었으니까. 허나 그건 착각. 난 어쩔 수 없이 밥심으로 살아가는 한국인이라는 걸, 4년 전, 처음 런던에 가서야 깨닫게 되었다. 나의 요리 여정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일단 런던의 외식은 음식의 맛에 비해 터무니없이 비싸게 느껴졌고, 그건 한식당도 마찬가지였다. 마트에 가면 다양한 식재료를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구할 수 있으니, 먹는 게 중요한 가난한 워홀러에게 이곳 런던은 요리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한식을 만들게 된 건, 내가 머물렀던 동네, 윔블던이 한인타운인 뉴몰든과 가까웠던 행운도 한몫했다. 그곳엔 유럽에서 제일 크다는 한인마트인 H Mart가 있는데, 마트가 우리 집과 꽤 가깝다는 걸, 이사 올 때만 해도 나는 전혀 몰랐다. 참 복도 많지. 김치와 진미채를 사러 한인마트에 종종 가는 레바논 아주머니와 같이 살게 되었으니 말이다.
"아름, 여기 가까운 곳에 너네 나라 식재료 파는 마트가 있어. 아줌마 차 끌고 거기 갈 건데 너도 같이 갈래?"
"진짜요? 당연하죠! 저도 갈래요!"
처음 H Mart에 갔던 날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동네 마트엔 없는 팽이버섯, 두부, 쌀, 배추... 익숙한 식재료들이 잔뜩 있던 그곳에서, 나는 바다 건너 한국에 간 기분이 들었다. 필요한 식재료들을 몽땅 구입해 집으로 돌아와 내 전용 찬장에 차곡차곡 넣으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든든했던 그날. 진간장, 국간장, 고추장, 참기름, 들기름이 이렇게나 반갑다니! 그날은 아마 한국을 떠나 런던에 온 지 2~3주 정도 되었을 때였다. 저녁으로 미역국을 끓여, 밥 한 그릇 말아먹으며 나는 비로소 이런 느낌이 들었다. 이제 이곳에서 제대로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그때부터 2년. 워홀러로 일을 하며 많이도 울고, 웃고, 화나고, 깨지고, 고독했던 날들. 그 시간들을 되짚어보니, '한식'은 비빔밥에 꼭 들어가는 고추장과 참기름처럼 내 '워홀 추억'에 빠질 수 없는 재료로 들어가 있다. 출근 전 샐러드용 도시락에 비빔밥이나 짜장밥을 1.5인분(필수다) 꾹꾹 눌러 담아 싸갔던 것. 그래서 물류창고에 철퍼덕 앉아 도시락을 먹으며 피곤을 재빨리 풀어대던 쉬는 시간 20분. 이번 달도 잘 살아보자는 의식처럼 룸메이트랑 한 달에 한 번씩 H Mart에 가서 장을 봤던 날들. 복이 진짜 많다니까. 룸메이트도 나처럼 밥심으로 살아가는 한국인이었으니. 그날은 한국 과자를 먹는 날이기도 했다. 신중히 고른 '구운 양파'나 '꼬북칩'같은 군것질거리를 나눠먹으며 저녁으로 먹을 끼니를 구상했던 버스 안.
"리아야 오늘은 제육볶음 해 먹을까?"
"언니 좋아요. 사이드로 된장국 어때요?"
"야 말해 뭐해. 고고. 집 가는 길에 상추도 사자."
한식을 못 먹었다면 과연 나는 런던에서 2년이나 살 수 있었을까? 솔직히 못했을 것 같다.
3.
그래, 내가 다시 런던으로 돌아올 수 있던 건 이곳에도 된장과 고추장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엔 유학생, 그리고 새로운 동네, 배터시 (Battersea). 예전엔 가까이 있던 H Mart가 배터시에서 가려면 꽤 머니, 이번엔 레벨 업이다. 바로 온라인 배달. 4년 전, 아무것도 모른 채 이곳에 와 짐을 풀었던 그때처럼, 이번에도 똑같이 식재료를 사서 전용 찬장에 차곡차곡 넣어둔다. 그리고 그때처럼 마음도 채워진다. 참기름 뚜껑을 열여서 괜히 냄새도 한번 맡으면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기도 하고. (유난이다.)
런던의 겨울은 쌀쌀하고 으슬으슬해서 그런지, 지난 몇 달간 국과 찌개가 유난히 당겼다. 국 없이는 식사한 것 같지 않다고 아빠가 말할 때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는데 아빠 미안해. 내가 여기서 그러고 있어. 하여튼 이럴 때도 재빨리 만들 수 있는 걸로 후다닥 끓인다. 바로 시금치 된장국.
멸치와 다시마로 육수를 내고, 거기에 된장과 다진 마늘을 푼다. 그리고 시금치를 잔뜩 넣고 조금만 더 끓이면 완성. 이렇게 간단할 수가 없다. 계란 프라이와 김치가 있으면 아주 완벽하지. 추위에 긴장해있던 속이 된장국 한 술에 풀리는 걸 보니 내겐 이만한 특효약이 없다. 그럼 빨간 국물이 당길 땐 어떻게 하냐고 묻는다면, 김치찌개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건 안된다. 귀하디 귀한 김치를 낭비할 순 없으니까. 대신 고추장찌개를 바글바글 끓인다. 소고기와 양파, 애호박, 감자 등을 깍둑 썰어 고추장과 된장, 다진 마늘을 넣고 조금 볶다가 물 넣고 끓이면 완성. 이것도 그렇게 간단할 수가 없다. 지난번엔 빅마마 선생님 레시피를 이용해서 토마토와 오이를 넣어봤는데 세상에, 얼마나 맛있게요? 개운한 고추장찌개였다. 그렇게 복닥복닥 한식을 해 먹으며 몇 개월을 보내고 나니 어느새 봄이다.
4.
이 글을 마무리 짓는 금요일, 드디어 나를 부담스럽게 했던 큰 과제 3개가 얼추 끝났다. 끝이 났음을 인지하고 나니 이때다 싶어, 몸이 신호를 보낸다. 지금은 잠시 멈추고 나를 돌보라고. 그래, 머릿속에 늘 켜져 있는 노트북을 닫고, 어수선히 적혀있는 '해야 할 일들'도 잠시 지우자. 그리고 진짜 노트를 펴고 마트에서 살 재료들을 적는다. 그동안 고생했으니까 진짜 맛있는 거 해 먹어야지. 뭐 해 먹지. 가만 보자, 애호박이랑 마늘이 집에 있으니까...
이곳에서 먹는 한식은 내겐 음식 그 이상의 존재다. 카페에서 몸을 많이 쓰며 일했던 그때도, 머리를 많이 쓰며 공부하는 지금도, 한식은 여전히 엄마의 품이자, 아빠의 응원이자, 고국(이라고 칭하고 싶다.)의 향수다. 어쩐지 나는 그 힘과 위로로 오늘도 하루만큼의 에너지를 얻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오후, 이 글을 퇴고할 힘이 없어 일단 마트에 가서 노트에 적어둔 재료들을 샀다. 그리고 저녁으로 강된장을 끓여 삶은 양배추와 함께 아주 맛있게 먹었다. 아 - 이제 좀 살아난 것 같은 기분으로 몇 번의 수정을 하고, 드디어 글의 마침표를 찍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