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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oh Sep 15. 2023

너희가 너희를 미워하는 방법

웹툰 <가비지 타임> 후기

1. 지독하 서글픈 신포도의 쓴맛


땀 흘리는 청춘, 아직 꽃피우지 못한 재능, 이미 피어난 꽃을 올려다보는 조급한 마음, 전국 제패를 향한 도약, 이어지는 좌절, 그러나 결코 부러짐을 모르는 꼿꼿함.


일본의 스포츠 만화가 그려내는 청춘은 그 뜨거운 인상으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다. 그러나 참고 인내하는 책상 공부와 그 과정에 동반되는 괴로움과 좌절, 숨 막히는 압박감 아래의 소소한 일탈을 십 대의 삶이자 청춘으로 규정하는 입시를 거쳐온 우리는 때때로 이야기의 책장을 덮은 뒤 씁쓸한 입맛을 다신다. 이 쓴맛은 우리에겐 신 포도와 마찬가지였던 청춘의 형태로부터 느끼는 쓴맛이다. 대한민국의 어느 누가 입시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 발전에 집중할 수 있는 동아리 활동을 해보았겠는가?


이런 면에서 '우리'의 현실을 지독히 사실적으로 조망하는 스포츠 웹툰 <가비지 타임>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씁쓸함은 상기의 씁쓸함과는 다르다. '농구'라는 스포츠에 녹아든 현세대의 대부분이 경험해보았을 대한민국의 입시, 타인 그리고 자신과 갈등하는 등장인물들, 이를 매개로 길어 올려지는 다채로운 생각과 감정들. 성큼 좁혀진 우리 현실과 이야기의 간극에 우리는 과거가 된-혹은 누군가에겐 아직 진행 중일-우리의 현재를 떠올린다, 등장인물에 동화된다, 입안을 채우는 지독한 쓴맛에 서글퍼진다.




2. 미움이 겨누는 뜻밖의 과녁


이러한 <가비지 타임>이 다루는 생생한 생각과 감정들 중, 내게 너무나 흐릿하게 다가온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미움'이란 감정이었다. 전영중 너는 왜 그렇게 성준수를 미워하는가? 최종수 너는 왜 그렇게 기상호를 미워하는가? 너희는 웃으며 시비를 걸거나 태연한 척 비아냥거리거나 날 선 말로 타인을 긁어내리는 등, 각자의 방식으로 타인을 향한 미움을 내비친다. <가비지 타임>을 처음 볼 당시, 나는 단순히 경쟁 상대에게 품는 것이라 생각되지 않는 정체 모를 적대감에 당황했었다. 너희가 그러는 이유를 알지 못해 너희를 이상하게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몰이해는 내가 미움의 대상을 오독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바, 미움이 겨누는 뜻밖의 과녁은 바로 너희들이었다. 언뜻 보기에 남을 미워하는 듯한 너희는 사실 너희를 미워하고 있었다.


겁 먹은 나머지 마지막 슛을 던지지 못하고 울어버린 너는 겁 없이 마지막 슛을 성공시킨 그가 마냥 대단하다. 동시에, 농구를 그만둘지 전학을 갈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선택하는 것이 두려워 원중고에 남은 너는 담담하게 전학을 결심한 그를 보며 속이 뒤틀린다. 겁을 모르는 듯한 그가 너무나 얄밉다. 그러나 이는 네가 무서운 게 많은 너 자신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겁 먹고 슛을 던지지 못한 너에게, 선택할 용기가 없어 결정을 유예한 너 자신에게 화가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는 네가 주전이 된 것을 "관성대로 움직였을 뿐"이라 과소평가 하고, "넌 그렇게 멋있는데 난 엄청 한심하지?"라고 말하며 너를 향한 미움을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너는 너를 지키기 위해 너와 대비되는, 자꾸만 너의 초라함을 떠올리게 하는 그를 미워한다. 무서워하는 내가 아니라 무서움을 모르는 듯한 쟤가 잘못된 거라고 너 자신을 설득한다. 그리고 그에게 네가 틀렸다고 외친다, "누가 계속 농구하래."라고.


한편 너는 누구보다 농구를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네가 무언가를 잘한다는 사실에서 효용을 느끼기 때문인지, 너의 타고난 호승심 때문인지, 네가 자랑스러운 국가대표 아버지를 닮고 싶어 하기 때문인지, 네가 어릴 적부터 너에게 향했던 타인의 기대를 이식한 탓인지는 모르겠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너는 농구를 잘하려 애쓰고, 농구를 꽤 잘하는 네게 만족했다. 그러나 지상고에게 턱 끝까지 쫓기다 가까스로 승리를 거둔 날, 네가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네 재능을 별거 아닌 재능이라 평하며 너의 가족을 입에 올리는 것을 보고 너는 네가 주제를 몰랐다 생각한다. 자격도 없는 네가 "미국에 가서 농구를 배우고 싶"다는 만용을 부렸다 생각한다. 네가 잘하지 못해 가족을 욕보였다 생각한다. 그래서 너는 이제 네 분수에 맞게 "빨리 프로에 가고 싶"다고 말한다. 주제를 몰랐던 네가 한심하다. 잘 해내지 못할까 봐 경기 전이면 불안감에 잠을 설친다. 그리고 사람들의 말에 잠 못 이루던 너는 전서구가 되어 네가 들은 모멸의 말을 코트 위 상대에게 쏟아붓는다. "개같이 못하는 주제에", "아무런 미래도 없고 그럴 자격도 없는 주제에", 주제를 모르고 덤벼드는 한심한 그에게 화를 쏟아낸다. 그러나 이것은 실상 그에게서 네 모습을 본 네가 너에게 하는 말이다. 너는 주제를 모르던 네가, 압도적인 재능을 타고나지 못한 네가, 별거 아닌 상대에게 막히는 네가 너무나 싫다.




3. 활시위를 내리며


나는 너희를 보며 스스로에게 화살을 겨누었던 그때를 떠올린다.


16살의 나는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했다. 세간에선 성실한 삶을 권장하고 사람들은 게으른 이를 별 어려움 없이 비난하던 때에 내가 게으름을 부린 탓이었다. 나는 '나는 멍청하다'라는 제목의 천 자 가량의 짧은 글을 썼다. 게으르게 살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게으르게 살았던 나를 향한 질책이 그 글의 주제였다. 나는 그걸 작게 프린트하여 필통에 넣어두고 다녔다. 고등학교 1학년의 나는 나의 패인을 곱씹기 위해 틈이 나면 그것을 꺼내 읽었다. 그리고 '성실한 나'를 굴비처럼 매달아두고 매일같이 바라보며 다짐했다, 앞으로는 게으르게 살지 않겠다고. 그러나 나는 매번 게을렀다. 그러는 동안 나는 열심히 사는 이들을 질시하게 되었다. 어떻게 너희는 그렇게 성실하게 사는 걸까? 나는 그토록 어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어떻게 그렇게 쉽게 해내는 걸까? 그리 하지 못하는 나에게 실망에 실망을 거듭하며 나는 그들을 미워하게 되었다. 타인에게서 내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그가 미워졌다. 갖은 이유를 붙여 그들이 틀렸다 주장하며 나의 미움을 정당화했다.


나는 내가 바라는 내가 되지 못하는 나에게 실망하고, 내가 바라는 걸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타인을 미워하고, 한심한 나를 닮은 이들을 미워했다. 너희의 이야기 속에서 마주한 나의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다. 내가 나를 미워하는 방식이자 너희가 너희를 미워하는 방법은 이런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내가 그렇게도 중요하게 생각했던 그 종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그 당시 내가 품었던 '성실한 나'에 대한 선망이 꾸준함과 효율을 미덕으로 하는 사회로부터 얼마간 영향받았음을 알고, 내가 자신에게 착취에 가까운 성실함의 기준을 부여했음을 안다. 타인의 잣대를 걷어낸 그곳에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음을 안다. 덮어놓고 타인을 미워하던 나는, 이제 타인을 향한 미움이 내 이상향과 불화하는 나의 현 모습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되었음을 안다. 그렇기에 나를 조금 더 알게 되고 나를 조금 더 받아들이게 된 지금의 나는 나를 그다지 미워하지 않는다. 한때 미워했던 이들을 더 이상 미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전보다 행복하다, 그들을 미워했던 내가 아직 부끄럽긴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언젠가 너희도 너희를 향해 힘껏 당겼던 활시위를 놓고 마음이 편해질 거라고 믿는다. 너희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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