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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oh Oct 18. 2023

새끼 오리와 완벽주의자 당나귀

미드 <9-1-1 론스타>, 단편소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후기

1. 스스로 당나귀가 되는 사람들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인간의 행동 양식은 어쩌면 부모의 사랑을 좇던 우리 유년기의 잔재일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이는 사회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우리의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우리의 모습이 사랑하는 이가 바라는 모습과 닮길 간절히 원하듯이. 모두 내 추측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 양식의 기원이 무엇이든 사람들은 때때로 '프레임'을 기준 삼아 삶의 방식을 정한다. 여성들이 오래도록 사회에 존재해 온 그들을 겨냥한 프레임에 부지불식간에 부역해 온 것처럼, 사람들은 그들에게 기대되는 이미지가 설령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이 바라는 모습이 아니라 그들에게 씌워진 사회적 프레임일지라도 그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에 따. 여성을 옥죄는 여성상의 경우 최근 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탈코르셋 운동-의 가시화로 부분적 붕괴를 맞이한 듯하나(이 운동이 탈프레이밍에 실제로 어떠한 영향을 일으켰는지와는 별개로 적어도 몇몇 이들에겐 이러한 프레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운 듯하다), 이 세상의 수많은 여성들은 여전히 그들에게 기대되는 여성상에 부응하기 위해 화장을 하고 목소리를 꾸며낸다.


동양의 여성상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인의 여성상 역시 프레임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시대를 맞이하였으나, 그들 역시 여전히 그들을 정의하곤 했던 프레임에 응해야 한다는 모종의 압박감을 느끼는 듯하다. 이러한 압박감은 미국의 소방서 이야기를 다룬 미드, <9-1-1 론스타>에서 짤막하게 다루어진다.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와 등에 큰 부상을 입은 등장인물 '그레이스'는 충분한 회복 기간이 필요함에도 다른 이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장을 보러 마트에 나선다. 그러나 겨우 장보기를 마친 그는 뒷좌석에 떨어진 차 키를 집으려 하나, 통증으로 인해 결국 차 키를 집는 데 실패한다. 그렇게 뒷좌석에 앉아 시간을 보내던 그는 4시간 만에 그의 막역한 친구 '토미'에게 연락하여 도움을 청한다. 그런 그레이스에게 토미는 이렇게 말한다.


Tommy: People expect women, especially Black women, to just be on it 24/7. Handle your husband, your-your household, your job like a boss all day, every day. ...Gracie, asking for help doesn't mean that you're weak. It means you're wise.

토미: 특히 흑인 여성이 언제나 완벽하길 바라지. 남편 챙기고, 살림하고, 일까지 해야 해, 매일 능숙하게 말이야. ...도움을 구하는 건 나약하다는 뜻이 아니야. 현명하단 뜻이지.

- <9-1-1 Lone Star> 시즌 2, 10화 'A Little Help from My Friends' 중.


물론 작중 드러난 그레이스의 굳건하고 독립적인 성격을 보았을 때 그가 바람직한 흑인의 여성상을 따라 묵묵히 짐을 짊어지고 가정에 헌신하는 당나귀가 되길 자처한 데는 그 개인의 성격이 미친 영향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도움받길 꺼리고 모든 것을 홀로 해내려 했던 것에 흑인 여성에게 요구되는 프레임의 영향이 전혀 없었다 말하기는 어렵다. 때때로 사람들은, 특히 소수자와 약자는 사회가 그들에게 더욱 깐깐한 잣대를 들이미는데도 불구하고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강요가 침식시킨 자유의지에 의거하여 '프레임에 부합하는 완벽한'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쓴다.




2. 벽이란 이름의 또 다른 레임: '대표자'가 행하는 자기 검열


그러나 종종 소수자는 시대착오적 기대에 완벽히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아닌, 프레임을 벗어나기 위해 '객관적으로 완벽한' 사람 되어야 한다는 노고에 시달리기도 한다. 실상 소외자들이 무결함에 가까운 결벽적인 '완벽함'을 갖추는 것에 대해 부담과 강제를 느끼는 것은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단편,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에서 잘 다루어진다.


작중에서 신체 개조 과정을 거쳐 우주로 나가 인류 최초로 '터널'을 넘을 예정이었던 화자의 할머니 '최재경'이 탄 캡슐은 발사와 동시에 폭발한다. 화자는 최재경의 죽음을 슬퍼하지만, 나중에 밝혀진 바 최재경은 발사 전날부터 대기 지역을 이탈한 상태였다. 그는 투자받은 몸뚱아리로 우주 대신 바다에 뛰어들었다.


이 사실이 그의 죽음을 사고로 인한 순직으로 알고 있던 대중에게도 알려지면서 일각에선 "유일한 여성, 동양인, 비혼모라는 눈에 띄는 특성"을 가지고 있던 최재경이 사건을 통해 결국 우주 비행사로서 부적합한 사람이었음이 드러난 것이라 말한다. 사건의 원인이 '소수자성'으로부터 기인했다는 이 입장은 아메리칸 백인 남성으로 대표되는 우주비행사 집단에서 노령이자 비혼모인 동양인 여성을 한 개인이 아닌 마이너리티의 대표자로 인식하고, 그의 일탈과 배임을 '노령의 비혼모 동양인 여성'의 일탈이자 배임으로 확대시킨다. 그들에게 최재경의 선택은 그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 더 큰 무엇, '노령의 비혼모 동양인 여성'의 보편적인 성향을 반영하는 증거로 여겨진다. 한때 소외자 중 한 명에 불과하였을 최재경은 그가 소외자이기에 번번이 길을 막혔던 우주비행사가 되는 것에 성공하자, 이제 '노령의 비혼모 동양인 여성'의 대표자로서 평가받는다.


이렇듯 개인과 집단을 갈아치우는 교활한 치환 속에서, 갓 태어난 새끼 오리가 처음 보는 이를 어미로 여기는 것처럼 사람들은 처음 마주한 소수자를 실제로 존재하는지조차 의아한 '소수자성'의 어머니로 여기며 그를 통해 소수자성본다, 그렇다고 착각한다. 그리하여 여태껏 소수자가 한 개인으로 받아들여진 일은 요원했다. 사람들은 소수자성에 씌워진 프레임으로 소외자들을 문제적 인간으로 몰아왔으며, 유구하게 이어져온 이러한 인식 체계 앞에서 갑작스레 대표자의 지위로 격상되어 느닷없이 새끼 오리들을 거느리게 된 한 개인의 잘못은 사사로운 맥락을 박탈당한 채 소수자를 기술하는 언어에 따라 비난받아왔고, 소수자는 소수자성에 씌워진 프레임에 의탁한 무료한 냉소('그럼 그렇지') 왔으며, 이로써 우리네 현실 속 소외자들은 매 순 소외자 대표하는 자로서 광장에 덩그러니 놓인 채 그 자신을 변론해야 할 위기에 처해왔다.


이러한 존재적 위기를 탈피하기 위해 소외자들은 선한 인상을 지어 보이 무결해짐으로써 그들을 변론한다. 가정이 있는 직장인 남성들이 지각을 하거나 이른 퇴근을 하는 것, 또는 부진한 업무 실적을 내는 것은 개인의 불성실한 근태 및 부족한 수행 능력 탓으로 여겨지지만 육아를 병행하는 직장인 여성이 그러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결코 개인의 문제로 해석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워킹맘은 '완벽한' 근태와 '탁월한' 업무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성소수자는 퀴어 의식이 부재한 애인의 부모를 처음 마주할 때 '착한' 사람으로 인식되기 위해 애쓰며, 낯선 땅에 발을 들인 이민자는 타인이 자신의 '무해함'을 알아주길 바라며 친절을 베푼다.


아이러니하게도 매 순간 객관적으로 완벽하고 무결해짐으로써 그들의 동료를 욕보이지 않기 위한 그들의 사투는 또다시 그들을 '완벽'이란 프레임으로 회귀시킨다. 자기 검열의 지옥이 창궐한다.




3. 다만 우리가 계속 이야기한다면


그러나 세상엔 완벽이 결핍된 이들이 더러 있다.


대학 4학년 재학을 앞둔 시절의 일이다. 나는 인문학이 큰 관심을 받지 못하는 이공계 특성화 대학에서 인문학과 순문학을 읽는 독서 모임을 꾸리겠단 자그마한 꿈이 있었고, 운이 좋게도 한 사람-개인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던 탓에 내심 사상적 일치를 기대하고 있던 사람-과 조촐한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김초엽의 단편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고 만난 그와 나는 단편집의 목차를 짚어가며 한 작품씩 차례차례 감상을 나누었다. 그러다 마침내 소설집의 마지막 단편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에 대한 소감을 나누게 되었고, 나는 소수자로서 감히 해선 안 될-그렇게 했다간 소수자 집단에 대한 인식에 소위 '먹칠'을 할 수도 있는-선택을 한 그 우주비행사 그리고 소수자가 느끼곤 하는 압박감을 표현하고 최재경의 선택으로서 그 압박감으로부터의 해방을 보여준 작가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기에, 그가 나와 같은 감사함을 느꼈을 거란 기대감을 안고 그에게 감상을 물었다.


그는 '그 할머니의 선택은 너무 이기적이었다'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내가 느낀 감사함을 표현하려 노력했다. 교실 내의 단 한 명의 여학생으로서 '여자라서 공간지각능력이 떨어진다', '여자는 타고나길 수학적 사고에 적합하지 않게 태어났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 과목의 성취에 매달렸던 내 과거 경험을 떠올리며, 소외자들을 대변하게 되곤 하는 소외자로서 갖는 완벽에 대한 강박을 그가 경험해 보았을 만한 '적절한 예시'를 들어 설명하려 했다. 그러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나는 결국 입을 떼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그런 '완벽'을 경험해 본 적 없을 것 같았다. 그가 직접 겪어보았을 '적절한 예시'는 적어도 그의 세상엔 없는 듯했다.


말 대신 토해진 무력감은 아직도 도무지 잊히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엔 그들을 내 세상에서 영원히, 그리고 완전히 배척한 채 살 수는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나는 언젠가 그들을 설득해야 할 날을 마주할 것이다. 그들의 무지는 나를 무력하게 만들 테지만, 우리가 계속 이야기한다면 그들은 언젠가 압박감이 실재함을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소수자와 약자가 겪는 외면과 아픔과 상실과 완벽에 대한 갈망과 그에 주어지는 압박감에 <9-1-1 론스타>의 등장인물들이 목소리를 내듯이, 다만 우리가 계속 이야기한다면.


Judd: Why would you risk doing that?
Grace: Because I have Charlie, sweetheart. If Lexi was a cute white girl, she would be plastered all over the news right now. But just like so many other Black and Brown women, Lexi has not only been victimized, she has been forgotten about and she has been blamed. Women who look just like Charlie will one day. That... that's why I'm doing this.

저드: 왜 그렇게 위험한 짓을 해?
그레이스: 찰리가 있으니까, 여보. 렉시가 백인 여자였으면 뉴스가 이 사건으로 도배됐을 걸. 하지만 여느 유색 인종 여자들처럼 렉시는 피해자가 되고도 알려지지 않고 비난까지 받았어. 렉시도 한때는 찰리 같은 아이였겠지. 그래서 그랬어.

- <9-1-1 Lone Star> 시즌 4, 15화 'Donors' 중, 강제로 장기 적출을 당한 유색 인종 피해자 '렉시'의 일을 알게 된 흑인 여성 '그레이스'가 범인을 잡기 위해 어플에 자신의 실명 프로필을 등록하려 하자 그의 배우자 '저드'가 그를 말리며 한 말에 대한 그레이스의 답변. '찰리'는 그레이스와 저드의 자식.


*231017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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