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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룰때 May 12. 2023

칭찬은 필요 없어요.

그거 없이도 잘 살아요.

놀이터에 4,5살 정도 되는 아이들 4명이 놀고 있다. 각자 한 명씩의 엄마를 달고. 그런데 지켜보자니 노는 아이들보다 그 엄마들이 더 소란이다.


“아유~ 우리 땡땡이는 미끄럼도 잘 타네~.”

“어머! 우리 땡땡이가 친구한테 먹으라고 주는 거야? 친구랑도 나눠먹고 정말 멋지네!”

“땡땡아~ 모래놀이 재밌어? 집 만들고 있는 거야? 우와~ 진짜 잘 만들었다!”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생중계해주는 통에 눈 감고도 지금 저 아이들이 뭐 하고 노는지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녀들의 노고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집 안에서도 저렇게 아이들의 모든 사소한 행동에 반응하며 24시간 생중계가 가능할까 하는 빈정 어린 의심도 해본다. 놀이터에 놀고 있는 아이들의 엄마들 중에 나만 어울리지 않게 너무 조용했기 때문이다. 


그녀들에 발맞춰 폭풍 칭찬을 쏟으며 아이의 발길을 따라다니고 싶었지만 정말이지 그럴 체력이 되질 않았다. 개미 체력이 최후에 쓸 수 있는 힘은 오로지 성대에서 나온다. 아이와 놀이터에서 한바탕 놀고 나면 그날 저녁에는 최후의 남은 체력을 쥐어짜 내느라 악을 쓰며 애들을 대할게 뻔했다. 진정으로 저 엄마들은 아이들의 모든 행동이 저토록 경이롭고 은혜로울까? 책에서나 TV에서나 늘 말하는 엄마가 잘하면 된다는, 엄마라면 아이에게 폭풍 칭찬을 해줘야만 한다는 의무감에 비롯된 것은 전혀 없는 것일까?


가끔 아이 학교나 유치원에서 그런 알림을 받곤 한다.


“오늘 땡땡이랑 땡땡체험을 했는데 모두들 선생님의 지시사항에 맞춰 잘 따라주었어요. 집에서 칭찬 듬뿍듬뿍 해주세요.”


아이가 새롭고 재밌는 체험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 그걸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 거기다 엄마의 폭풍 칭찬까지 얹어줘야 한다니. 엄마는 그렇게 칭찬만 해대야 하니 애들 아빠한테는 자꾸 분풀이만 늘어난다. 뜬금없이 면박당하는 아빠의 처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가끔 그런 불만이 머리에 맴돈다. 과연 아이들에게 그다지도 부모의 칭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일까? 물론 칭찬의 긍정적 효과야 말하자면 말 낭비일 테다. 다만, 부모의 과도한 칭찬이 아이들의 인생을 스스로가 즐길 자력을 기를 기회마저 잃게 하는 건 아닌가 하고, 아이를 향한 영혼 없는 칭찬에 덧붙여 의심해 본다. 생각이 거기까지 가다 보니 이런 생각도 해본다. 


'아, 거기서부터 시작되었구나. 사람이 타인의 칭찬에 길들여지는 것이…….'


아침에 펼쳐든 책에서 우연히 이런 글을 마주했다.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이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욕망이다. 현대 사회는 어려서는 부모의 인정, 커서는 사회적 인정에 중독되도록 사람들을 세뇌시킨다.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인정과 선망과 칭찬에 짜릿한 쾌감을 느끼도록 훈련받으며 자라난다.” -「회복탄력성」 김주환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어쩔 수 없이 타인의 인정에 목마를 수밖에 없는 존재라 하지만, 개인은 사회적이기 이전에 하나의 독립된 객체로 존재하는 것이 우선이다. 하나의 객체로 주체적으로 제대로 서있지 못하면 타인의 인정, 칭찬에 기대어 설 수밖에 없다. 칭찬은 고래도 춤춘다고 했던가? 하나 이 칭찬에 심히 중독돼버리면 신나는 음악에도 전혀 즐길 줄 모르는 몸치 고래가 될 수 있다. 


무언가에 중독되면 그것이 결핍이 되는 상태를 견딜 수 없어한다. 칭찬에 중독되면 자신이 한 행동에 마땅히 칭찬이 이어져야 하는데 그게 없으면 참을 수 없다. 그것을 부당하고 불공정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요즘 세대들이 "공정"에 민감하다고 한다. 말하자면 사람들마다 동일한 잣대로 잘못하면 마땅히 벌을 받고 잘하면 마땅히 칭찬받아야 하는 게 세상의 공정이라는 것이다. 


돌이켜보니 나의 10대, 20대도 정의감이 불탔다. 공정치 못한 걸 참지 못했다. 그렇게 내가 입에 거품 물며 분노하면 40대, 50대의 어른들은 뜨뜨 미지근이었다. 40대가 된 지금의 나는? 미온수 그 자체다. 늙으면 다 저렇게 되나 싶었는데 결국 그렇게 됐다. 다만 나이라는 게 먹어보니 그냥 먹게 되는 건 아니고 아주 고역인 것도 먹어야 하는 게 나이고 인생이더라. 때론 쓴 나이를 여러 해 먹다 보니 원래 인생은 불공정, 불공평하고 오류투성이다라는 것을 경험으로 받아내어 진다. 그러다 어느샌가는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라는 젊은 친구의 홧김에도 "음... 그럴 수 있어."라는 미적지근한 말로 응수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삶은 본디 기상천외한 우연으로 점철되어 있다. 자연 그대로의 삶은 몰인정한 우연들이 판을 치는 곳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수한 우연들이 개개인의 삶을 무자비하게 흔들지 못하게 사회를 만들고 법을 만들고 상식을 만든다. 그러나 자연의 복잡하고 셀 수도 없는 우연들을 공정과 공평으로 촘촘히 빠짐없이 메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살다 보면 미처 다 메꾸지 못한 구멍을 만나게 된다. 불운이다. 때론 불가피하게 불운을 맞는다. 억울할 수도, 서글플 수도, 원망스러울 수도 있다. 잘하고 열심히 한 노력 앞에 칭찬은커녕 비난과 배신을 감당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니 평소에 칭찬 없어도 잘 살아내야 한다. 타인의 칭찬과는 별개로 나 자신은 그대로 가치 있고 빛나는 존재임을 스스로 강하게 인식하며 살아야 한다. 칭찬이 고래를 춤추게 한다지만 제대로 된 고래는 칭찬 없어도 흥겹게 춤출 수 있다. 


놀이터 벤치에 자리를 잡아본다. 둘째는 다른 친구들과 같이 놀고 싶은 마음에 이 아이, 저 아이를 쫓아다닌다. 둘째 손을 잡아 이끌어 다른 친구들 앞으로 가 '같이 놀자'라고 얘기를 해줄까 하다 다시 벤치 위에 앉았다. 아이가 스스로 친구를 사귀는 방법을 찾을 기회를 주기 위해서. 때론 민망하게 쫓아가기고 하고 친구들에게 같이 놀기 거절도 당하면서 보다 친구들과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방법을 아이 스스로 찾도록. 


엄마는 아이에게 언제고 세상의 단맛만 맛보게 해주고 싶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쓴맛 또한 알려줄 의무가 있다. 그 쓴맛을 어떨 땐 뱉고 어떨 때는 참고 삼켜내야만 하는지. 그리고 그 쓴맛 속에서도 미세한 단맛을 발견하고 그것을 증폭시켜 즐길 줄 아는 그런 어른이 되었으면 한다. 그러기에 아이에게 칭찬 잘 받는 방법을 알려주기보다 칭찬 없이도 즐거이 사는 법을 알려주 테다. 타인에게도 나를 비난할 권리가 있고 다른 사람의 칭찬 없이도 얼마든지 인생, 잘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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