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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룰때 Sep 05. 2023

멍 때리기의 추억

벽지 위 생각의 낙서

꽃무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반적으로 그려진 꽃모양이 아닌, 뭐랄까 형이상학적으로 그려진 꽃이랄까. 청회색의 은은한 손바닥만한 꽃들이 곳곳에 새겨져있었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부산 신평동의 한 작은 집의 더 작은 내 방 한켠의 벽지모양 말이다. 나는 그 벽지에 많은 것을 새겨놓았었다.


고2때 뒷자리에서 나를 지속적으로 괴롭히던 친구에게 멋들어지게 복수하는 모습, 패닉의 이적오빠를 만나 결혼에 골인하는 환희에  찬 결혼식, 이 작은 방구석에서 해방되는 날……. 하고 싶은 건 많고, 할 수 없는 것도 많던 그 때, 벽지에 새겨놓은 나의 수많은 멍때리기의 흔적들이다. 온갖 잡생각과 몽상으로 채워진 나의 멍때리기는 이 작은 방한칸을 무한대의 우주로 확장시켜주었다. 그야말로 벽지에 그려져있는 그 꽃한송이에서 나는 우주를 본 셈이다. 인생에서 가장 부자유스러웠던 그 때, 벽지를 마주하며 자유를 만끽했었다. 꽃무늬 벽지는 나의 멍때리기의 무한한 도화지인 셈이다.


그로부터 삼십여년이 지나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의 벽지는 순백색의 아무런 그림도 무늬도 없다. 이것만큼 적절한 멍때리기 도화지가 있을까. 나의 상상 스케치를 방해할 그 어떤 무늬도 없다. 그러나 이제 나는 더는 벽지에 생각의 낙서를 하며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그 때 그리던 몽상의 대부분은 이미 현실화가 되어버렸다.


물론 이적과는 결혼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때 당시 상상 속에 그리던 내 나이를 훌쩍 지나 이제 사십대 중반에 들어섰다. 그리고 이쯤 되보니 현실 속 해결해야할 수많은 일들 때문에 잡생각, 몽상, 상상 따위는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내 머리 속에는 상상보다 현실의 일상이 많이도 커지고 무거워져있었다. 


그러나 내가 벽지에다가 생각의 낙서를 더는 하지 않는 것에는 그것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잠시 휴식을 취하려고 침대에 눕게되면 자동적으로 나와 벽지 사이를 무언가가 가로막는다. 핸드폰이다. 나를 사로잡던 정신적 긴장상태에서 도망갈 요량으로 나는 이 핸드폰을 별다른 의식없이 들여다본다. 자극적인 뉴스헤드라인 기사들이 당장 처리해야할 일, 내 의식을 집요하게 사로잡던 불안, 긴장에서 손쉽게 도망치게 해주었다. 


인터넷 기사는 내 의식을 이 방이 아닌 다른 곳으로 데려다놓는다. 그리고는 인터넷 기사,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내 의식의 나침반이 되어 내 의식의 흐름을 주도해버린다. 주도권을 놓치게 되는 순간 나는 핸드폰에게 한동안 붙잡혀 누군가의 집의 층간소음, 배달주문한 치킨의 양이 너무 작다는 얘기, 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한 사소한 말실수가 세상을 뒤흔들 심각한 일인양, 이에 지나치게 몰입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휴식은 애초에 끝나버렸다. 나는 침대에 눕기전보다 더 피곤해진 몸과 마음을 이끌고, 더 격렬해진 짜증을 담고 다시 휴식 전 오늘의 할 일들을 이어한다. 


어릴 적 내 작은 방의 벽지는 그저 말없이 기다려주고 받아주었었다. 내 상상이 마음껏 뱉어내지고 그려내지도록 한없이 기다려주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 때의 내 머릿 속의 오물들을 벽지에다 다 비워낼 수 있었다. 그러나 핸드폰 앞에서는 그러한 주도권이 나에게 없다. 핸드폰. 이것이 내 주인장 노릇을 하며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울 세상의 잡다한 정보를 쉴틈없이 머리 속으로 들이붓는다. 내 머리 속 오물들은 빠져나올 틈 없이 새로운 오물들이 쌓이고 또 쌓인다. 변비에 걸려버린 나의 뇌는 그 어떠한 것에도 차분히 집중할 여유공간이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몸과 마음의 피로와 이유없는 짜증은 그에 부수하는 결과인 것이다. 나의 오랜 친구였던 상상은 현실의 일상에 치여서 겨우 명맥을 유지해오다가 이제는 그마저도 핸드폰에게 완전히 잠식당해버렸다. 


뇌는 마을 사람들이 사는 조그만 동네다. 여기 동네 사람들은 평소 이곳저곳 자기들 각자의 볼일을 보다가 동네 잔치라도 벌어지게되면 우루루 잔칫집으로 몰려들고 잔칫집 외 동네 다른 곳들은 갑자기 조용해지진다. 이것이 “집중”이다. ("딴생각의 힘" 참조) 그러다 잔치가 끝나면 동네 사람들은 다시 여기저기 흩어져 배회, 방랑(mind wandering)을 하며 제각각의 일들을 한다. 바로 딴생각, 멍때리기 상태인 것이다. 이러한 상태를 뇌과학적으로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 DMN)라 일컫는다. 컴퓨터를 리셋하게 되면 초기 설정인 디폴트(default) 상태로 돌아가는 것처럼 아무 생각하지 않고 뇌가 휴식을 취할 때는 이 DMN상태로 "ON"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상태에서도 평소 일상에서 사용될 뇌의 에너지의 30~50프로를 소모한다고 하니("최고의 휴식" 참조)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뇌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는데 꽤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우리의 뇌는 집중과 방랑을 적절히 배회하도록 설계가 되어있다. 모든 동네 사람들이 하루 24시간 잔치집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을 사람들도 해가지거나 잔치집의 재미가 심드렁해지면 제 각자의 집으로 제 각자의 볼일을 볼 시간도 필요한 것이다. 


이 디폴트모드 네트워크 상태, 즉 멍때리기에도 순기능이 있다. 놀랍게도 창의성이라는 녀석이 멍때리기 상태일 때 더 많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일본의 한 대학의 연구팀이 아무 생각을 하지 않을 때 뇌혈류 측정을 했는데 뇌 백색질의 혈류 흐름이 활발해지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신속하게 내는 과제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사실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린 경험을 상기시켜보면 당연한 일이다. 기발한 생각들은 엉뚱한, 전혀 상관없는 것들의 결합에서 생성된다.(사실 현세대 인류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완벽하게 새로운 것을 탄생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우리의 뇌가 자유롭게 방랑과 배회를 하면서 여기저기 찍어둔 점들이 우연히 만나 결합, 통합되면서 기가 막힌 생각들이 탄생하는 것이다. 우리의 뇌의 마을에는 느슨하고 여유로운 공백의 공간, 마을 광장이 반드시 필요하다. 뇌 안의 동네 사람들이 각자 여기저기 방랑하다 우연히 서로 마주치는 창의가 생겨나도록 말이다.   


그러나 이 디폴트모드네트워크, 즉 멍때리기의 역기능도 있다. 생각은 연기와 같다고 한다. 연기가 공기 속에서 퍼지고 확장되는 것처럼 생각의 연기도 가만히 내버려두면 부정적인 생각으로 무한대로 확장해간다는 것이다. 일을 하다 퇴근 후 운전을 하며 집으로 향해가면 일에 대한 해방감도 잠시 무언가에 집중하지 않는 상태에서 불현듯 좀 전에 했던 일생각들을 하게 된다. 누군가에게 한 말실수, 누군가가 나에게 한 말실수, 해놓기를 깜빡했던 일 등등. 이건 멍때리기, 즉 디폴트네트워크 상태가 과거를 반추하는 것과 깊은 관련성이 있기 때문이다. 멍때리기동안 우리는 보통 지나온 사건, 사소하게 내 마음에 스크레치를 남긴 작은 트라우마들을 쉽게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에 너무 오래 머물다보면 쉽게 우울, 분노의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는 것이다. 멍때리기의 순간에도 뇌의 에너지를 평소의 30~50%를 쓴다고 하니 이때는 엄밀히 말하면 뇌의 휴식이라 표현하기는 조금 그렇다. 그러니 멍때리기로 우울감과 분노가 치민다면 생각의 연기가 날아다니는 것을 잠시 차단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눈을 감거나 심호흡을 하거나 명상으로 의식적으로 생각의 연기의 확산을 막고 한 곳에 생각을 잡아두거나 아니면 생각자체를 아예 비워버리는 것이다. 


반추가 내 우울함의 원인이라해도 그래도 이 반추의 기능은 필수적이다. 미래의 계획은 과거의 성찰을 기반으로 쌓아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딴 생각의 힘"이라는 책에는 한 기억상실자 얘기가 나온다. 언어소통에는 문제가 없고 단순히 자신의 과거 경험에 대한 기억만 통으로 잃은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의사는 기억과 관련한 여러 질문을 한다. 그가 받은 가장 난감한 질문은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나요?"라는 질문이 아니다. 이 질문에는 그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라고 답하면 그만이다. 그가 답하기 가장 난간한 질문은 다름아닌 "내일은 뭐할껀가요?"이다. 이 질문을 받았을 때는 그는 뭐라 답해야할지 몰라 어리둥절해한다. 이건 그에게 미래를 생각하는 것에 기준이 될 과거의 경험 데이터가 통째로 상실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반추가 곧 미래 설계의 기본인 셈이다. 흔히들 우리가 큰 실수를 하면 그 실수를 어떻게 만회할 지 어떻게해야 실수를 안할 수 있을 지 자동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것을 보면 과거의 기억은 곧 미래의 대비와 직결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니 때론 우울해지더라도 멍때리기를 포기할 수는 없다. 우리의 뇌가 과거와 미래의 시간여행을 자유롭게 다니도록 생각의 여백의 공간을 마련해두어야 한다. 


우리의 뇌는 집중과 방랑의 시기를 자연스레 오간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치다. 매 순간 긴장의 상태로만 살 수는 없다. 긴장의 시기가 있다면 이완의 시기도 따라와야한다. 그래야 내일을 살아 낼 수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니 내 방의 벽지는 이 이완의 완벽한 도구였다. 벽지를 응시하며 내 뇌의 동네 사람들은 자유롭게 산책을 하고 과거를, 미래를 맘대로 활보하고 다녔다. 그러나 지금은 핸드폰이라는 것이 자꾸 내 뇌의 마을 사람들을 붙들어 매어 놓는다. 뭔가 중요한 일이다 싶어 몰려든 내 뇌의 동네사람들은 별로 중요치 않은 심드렁한 기사나 다른 사람들의 흠집에 관한 얘기에 집중하게 된다. 쓸데없는 일에 마을사람들을 자꾸 소집해대는 것이다. 긴강에, 긴장의 연속이다. 우리의 뇌는 반드시 이완이 필요하다. 자유로운 방랑이 필요하다. 내 아픈 과거로, 그럼에도 꿈꾸는 예쁜 미래로 여기저기 넘나들며 내 생각의 꽃가루를 여기저기 옮겨둔다. 그 덕에 생각은 꽃이 피고 알록달록한 생각의 정원이 만들어진다. 


침대 위에서 핸드폰을 든 손을 내려놓고 핸드폰에 가려졌던 새하얀 우리집 벽지를 바라본다. 그 벽지 위로 생각의 꽃들이 활짝피어지는 정원을 그려본다. 어릴 적 벽지에 새겨져있던 청회색의 옅은 꽃들도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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