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룰때 Aug 07. 2023

야, 너두 실수할 수 있어 2

당신의 화는 알고리즘으로 강화된다.

"야, 너두 실수할 수 있어 1"로 바로가기


자신의 트윗이 리트윗이 많이 되려면 최대한 사람들을 분노케 해야 한다.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내는 단어를 트윗에 하나 추가할 때마다 리트윗이 평균 20프로 증가한다고 하고 리트윗 비율을 가장 많이 높이는 단어가 바로 '공격, 나쁜, 비난'이라는 단어라 한다. 자신이 만든 영상이 유튜브 알고리즘의 선택을 받고 싶다면, 영상 제목에 '증오, 말살, 혹평, 파괴'리는 단어를 넣으면 알고리즘의 선택을 받을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고 한다. ("도둑맞은 집중력" 참조)


우리가 핸드폰에서 각종 기사나 피드를 보면서 화를 내는 것은 정확히 말해서 우리의 숭고한 도덕성이나 정의감에서 순수하게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핸드폰 속 미디어들의 알고리즘이 우리의 화를 우리도 모르는 사이, 더 강화하고 증폭시키고 더 연장되도록 만들어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유튜브나 인터넷 기사 등의 높은 광고료가 우리의 분노와 화를 끊임없이 부추기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가 진정 화를 내야 하는 사실은 그 기사가 아니라 나의 분노를 대가로 삼아 누군가가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알고리즘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서 우리 일상에서 분노나 증오의 습관화가 이뤄지고 있다. 우리가 침대에 누워 좀 쉬어볼까 하고 핸드폰을 들고 인터넷 기사를 들추는 순간 우리는 화를 낼, 충격을 받을 준비가 된 것이다.


나는 화라는 감정이 얼마나 에너지 소모적인 것인지 확실히 경험해 본 적이 있다. 자궁근종 수술 후 입원할 당시에 수술 직후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심한 복통 때문에 재입원을 했었다. 며칠 동안 밥을 제대로 먹을 수도 없었다. 음식이 소화되면서 장이 꿈틀대는 순간 떼굴떼굴 구를 정도로 격렬한 고통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먹는 게 없다 보니 기력도 없었다. 말할 기력도 없어 목소리는 기어들어갔다. 그러나 그때,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편안함을 경험했다. 당시 나는 수술이 잘못됐다는 의심, 불안을 지울 수 없었는데도 수술 의료진에 대한 불만, 분노를 표출할 수 없었다. 그럴 기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억해 보면 소소하게 웃거나 감사하는 마음 정도는 이따금씩 일어났었던 것 같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화도 힘이 있어야 내는구나. 그간 화라는 녀석이 얼마만큼 내 몸의 에너지를 잡아먹었었는지 새삼 느꼈다.


내가 쉬겠다고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들고 그 알고리즘에 올라타는 순간, 나는 더는 쉬는 게 아니다. 충격과 분노의 이야기들에 휩쓸리다 보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에너지마저 탈탈 털리게 된다. 그렇게 쉬기 전보다 더 피곤하고 짜증 나는 몸과 정신을 이끌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이런 피곤한 몸과 마음으로는 제대로 집중할 수 없다. 결국 알고리즘이]은 우리의 일상에 집중할 양질의 집중력마저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누군가를 향한 일방적인 비난의 기사들을 보며 또 하나 우려스러운 것이 있다. 그건 이러한 비난들이 나 자신의 일상에 기존에는 없었던 불안과 긴장을 유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군지도 모를 상대를 향한 비난과 대중의 악플들을 "묻지 마" 비난이라 보는데, 우리에게 이 "묻지 마"가 공포스러운 것은 당최 누가 그 대상이 될지 알 수 없다는 것에 있다. 나 자신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의식조차 하지 못했던 나의 사소한 실수가 어느 날 온갖 미디어에서 비난과 분노로 돌아온다면? 생각이 거기까지 간다면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이 불안감은 우리 일상의 행동하나 말하나 조심조심의 자기 검열로 이끈다. 자기 검열 속에서 전에 없이 부자유스럽게 살고 있다. 긴장과 불안으로... 누군가의 묻지 마 비난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 "묻지 마" 비난으로 우리는 삶에 불필요한 위험을 떠안았다. 그리고 그 위험 덕에 우리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 집중할 힘을 잃어가고 있다.  


어딘가에 불이 났다. 그 불에 기름을 붓고 부채질을 해대며 그 화재에 동참한다. 부채질은 좀처럼 사그라들 줄 모른다. 부채질은 그 사람, 그의 아내, 그의 자녀에게까지 불이 옮겨 붙을 때쯤 절정을 이룬다. 그 불보다 더 중요한 자신의 일은 제쳐두고 신나게 부채질을 한다.  다 연소되고 재가 되어 더 이상 태울 것이 없을 때 그제야 우리의 관심은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나는 더는 이런 불놀이에 동참하고 싶지 않다. 그 비난의 물결에 내 감정을 소모시키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러한 불을 발견한다면 그저 강 건너 멀리 떨어진 채로 지금 내가 놓인 이 일상에 보다 집중하려 애쓴다.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향한 비난과 분노를 야기하는 기사에 엄지가 다가가는 것을 멈추기로 했다. 이건 비겁함과는 다른 문제다. 나의 도덕성과 정의감은 내 실제 삶 속에서 보다 실질적으로 구현해내고 싶다. 이를테면 내가 일하는 회사 업무에 보다 집중해서 실수 없이 처리해서 민원인들의 궁금증 해소와 그들에게 편의를 제공해 주는 편이 더 의미 있고 실질적으로 내 정의감을 실천할 수 있으리라 본다.


그리고 누군가가 지른 불 앞에서 나는 애써 나의 부족한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보려 한다. 예를 들어 이런 상상말이다.


'엄마 혼자서 에너지 넘치는 아들 둘과 함께 바깥 놀이를 하고는 더 놀다 가겠다는 애들을 차에 태워 겨우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했다. 애들 옷가지며 챙겨할 짐을 정리하고 미처 다 마시지 못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들고 애들을 안고 내리려는데 막내가 그새 차에서 잠들어버렸다. 깨울까 하다 피곤할 듯싶어 아이를 들쳐 안고 집까지 올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손에 들려있는 아이스아메리카노가 걸린다. 주차장 바닥에 잠시 내려놓고 있다 짐가방 정리하러 주차장에 내려올 때 챙겨서 집에다 버려야지 하고는 그녀의 가는 어깨로 막내를 들쳐 안는다. 집에 가자마자 잠에선 깨버린 막내의 잠투정에 시달리다 엄마는 주차장 한편에 놔둔 커피의 존재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누군가를 비난, 망신주려 먹다버린 커피컵을 찍어 공유한 사진을 앞에 두고 내가 발휘한 상상력이다.


'친구랑 야심 차게 사업을 시작하는데 월세가 올라서 더는 버틸 수 없어 사무실을 비워줘야만 했다. 이사 갈 사무실에 짐이 다 빠질 때까지 2,3시간 걸린다고 하고 당장 전화로 응대할 고객들도 있어서 급한 대로 근처 커피숍으로 향했다. 프린터 사용을 할 일이 있어 커피숍 주인에게 미리 양해를 구해보았지만 주인의 거절로 프린터 사용은 하지 못했다. 불편해하는 주인의 입장도 이해할만하다. 급하게 고객과 몇 통화를 하자 새로 이사할 사무실 짐이 다 빠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짐을 챙겨 카페 사장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카페를 나섰다.'

이것이 카페 사장이 커뮤니티에 올린, 진상 카페 손님이 가지고 온 프린터 사진을 앞에 두고 내가 해본 상상이다. 내 상상이 누군가의 무례함, 이기심을 옹호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기사나 게시글로는 알 수 없는 그의 사정을 나의 상상력을 빌어 그에게 항변의 기회를 제공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거대한 비난의 불길에 벗어나 핸드폰을 닫고 다시 나의 일상에 온전히 집중하고자 하는 마음인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도 묻지 마 칼부림의 기사들이 핸드폰 위로 우리의 엄지손가락이 옮겨가는 곳곳마다 따라온다. 그 충격적인 사건은 알고리즘을 타고 우리를 핸드폰 속으로 더욱더 빠져들게 하고 있다. 모방범죄가 일어나고 그와 유사한 예고글들이 번진다. 아마도 지금 우리는 알고리즘의 가장 뼈아프게 나쁜 예를 경험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야, 너두 실수할 수 있어 1"로 바로가기

작가의 이전글 야, 너두 실수할 수 있어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