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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룰때 Aug 30. 2023

나는 오늘도 사냥을 한다.

여전히 살아있는 원시인의 DNA

엄마 얼굴을 그리라는 선생님의 얘기에 아이는 엄마의 등을 그렸다 한다. 아이가 늘 바라보고 있는 것은 엄마의 얼굴이 아닌 등이었기에. 나에게도 그랬다. 엄마란 얼굴보단 등이 먼저 떠오르는 존재다. 내 어머니는 언제나 노동에 늘 바빴다. 집 밖에서는 공장이나 식당일로 집안에서는 온갖 가사일로. 기껏해야 엄마가 집에 있는 몇 시간 정도 엄마를 볼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엄마의 등이었다. 걸레질을 하거나 국을 끓이거나 화장실 청소를 하거나 잠시잠깐 모로 누워 쪽잠을 청하거나 하는 엄마의 고된 등. 제법 긴 시간이 흘러 이제는 내가 내 아이에게 등을 내어주고 있다. 그래도 엄마의 세상보단 좋은 세상에 살고 있어 엄마와 달리 이따금씩 아이에게 얼굴을 비춰줄 여유는 있다. 아마도 내 어미는 당신의 딸이 가족들에게 등보다는 얼굴을 더 많이 보는 삶을 살아라고 그렇게 쉼 없이 등만 내어주셨으리라. 


어릴 때 엄마의 노동은 나에겐 수치스러움과 무기력함이었다. 엄마의 노동이 없이는 지탱이 어려운 집안 형편이 친구들에게 부끄러웠고 그렇다고 해서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이었다. 그 덕에 내 부모와는 다르게 살겠다는 반발감으로 꽤 매운 사춘기를 보냈었다. 

더 흘러서는 엄마의 노동은 고단 함이었다. 엄마라는 사람의 인생을 바라볼 줄 아는 어른이 되고나서부터는 줄곧 내 엄마의 노동은 고단함으로 보였다. 아무리 아침저녁으로 일을 해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나에게 엄마는 시지프스와 같아 보였다. 참으로 고단하셨을 인생. 어찌 버텨내셨을까. 그래서 부산에 계신 엄마와 전화를 할 때면 통화의 마무리는 늘 "일 좀 그만하세요. 그 힘든 일 이제 그만하셔도 되잖아요."라는 말로 끝난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늘 "알았따. 알았따. 그래 힘들게 안 한다."라는 말로 내 걱정의 핀잔을 미꾸라지처럼 피해 가신다. 이 고단한 엄마의 노동의 맥을 어떻게 하면 끊어낼 수 있을까......


엄마의 딸인 나도 노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한여름에도 시원한 사무실에서 앉아서 노동이라는 것을 한다. 엄마가 내 나이였을 때는 공장에서 일을 하셨다. 앉아서 일하실 때도 있었고 서서 하실 때도 있었고 이따금씩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기도 하셨다. 내 부모의 부모님들은 대부분 농부의 삶을 살았다. 이따금씩 앉아 땀을 닦긴 했겠지만 대부분은 허리를 굽힌 채 논밭을 갈았다. 그보다 훨씬 오래전 인간의 최초의 노동은 수렵과 채집이었다. 그중에서도 사냥은 동물이 잡힐 때까지 쉼 없이 달리고 달려야 했다. 의자도 없는 인생이었다. 사냥의 노동으로부터 인간의 노동의 맥은 이어져왔지만 그 양상은 많이도 달라져있다. 지금은 사냥을 하지 않아도 마트에서 간편하게 돈을 지불하고 피 한 방울 보지 않은 채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다. 누군가가 대신 그 일을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가공'이라는 것이다. 누군가가 가공해 둔 것을 돈으로 대가를 지불하고 덕분에 우리는 과거의 고된 노동에서 일정 부분 해방되었다. 그리고 해방되어 맞이한 자유의 시간을 우리는 지금.... 대부분을 스마트폰으로 채우고 있다.  


안데르스 한센의 "인스타브레인"이라는 책의 두 페이지는 '..............' 이런 식의 점만 가득 찍혀있다. 1만 개의 점이다. 이 점 중 하나가 20만 년 전 동아프리카에 살던 인류의 한 세대에 해당된다. 인류의 역사의 기간을 점으로 찍어둔 것이다. 이 1만 개의 점 중 자동차, 전기, 깨끗한 물, TV가 있는 세상에서 산 인류는 얼마나 될까?

"........" 

점 8개다. 그렇다면 비행기, 컴퓨터, 휴대전화가 있는 세상에 산 인류는?

"..." 

겨우 점 3개다. 그러면 스마트폰, 페이스북, 인터넷이 있는 세상에 산 인류는?

".." 

단 점 2개다. 1만 개의 점 중 단 2개의 점을 찍는 시기에 인간의 생활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급진적으로 변해져 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천지개벽의 변화에도 인류의 몸은 별다른 진화를 이뤄내지 못했다. 몸의 진화는 적어도 점 10개 이상의 시간을 두고 서서히 아주 천천히 이뤄질 것이다. 만약 우리 몸이 환경의 변화에 신속하게 변화, 진화하는 존재라면 아마도 우리의 엄지 손가락이 지금 보다는 훨씬 길어져야만 할 것이다. 점 2개의 시기 동안 우리 신체 중 엄지의 역할이 급 부상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고작해야 네 손가락 일을 거드는 정도였지만 이제는 네 손가락이 핸드폰을 지탱하고 엄지가 스마트폰의 화면을 넘기고 클릭한다. 스마트폰 앞에서는 엄지가 대장노릇을 한다. 엄지가 많이도 바빠졌지만 여전히 엄지는 점 2개 이전의 시기에 비해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여전히 우리 몸의 유전자는 원시인의 DNA를 간직하고 있다. 우리의 몸은 여전히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동물을 잡고 동물에 쫓기는 생활에 익숙하고 스마트폰을 들고 가만히 앉아 몇 시간씩 손가락정도 까딱이는 생활에는 전혀 적응하지 못했다. 우리의 몸은 여전히 동물(動物)의 몸이다. 움직이는 게 자연스럽던 몸이 가만히 앉아만 있으려니 몸은 답답하다고 자꾸 어깃장을 부리기 시작한다. 노동으로 다 소모되지 못한 열량은 몸속에 쌓여 독소가 되어 몸속 장기 여기저기를 공격해 댄다. 병이 생기는 것이다.


얼마 전 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전영애 교수의 은퇴 후 삶을 보여준 다큐였는데, 다큐를 보니 내가 아는 대학교수 중 가장 많이 땀 흘려 일하는 교수인 듯하다. 괴테 연구에 평생을 헌신한 그녀는 여주 땅 어딘가에 서원을 열고 3200평의 땅과 정원을 홀로 가꾸는 일을 한다. 밤에는 글을 쓴다. 하루가 40시간이라도 부족해 보였다. 3인분 노비라는 별명대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땅에 멋대로 자라난 잡풀과 가지들을 뽑고 쳐낸다.

"노동을 해야 해요. 저는 노동주의자입니다. 보람도 있지만 무엇보다 정말 뿌리내려요. 땅에 뿌리 박혀요. 사람이. 내가 공을 들이고 힘을 들이는 곳이, 그곳이  내 자리입니다."

그렇게 그녀는 TV 밖 세상에서 땀을 흘리며 노동을 한다. 아니 사냥과 채집을 한다. TV 앞의 나는 마치 애초부터 동물이 아닌 고고한 인간이었던 양 사냥을 소거한 채 소파 위에 앉아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원래 동물이었다. 동물은 그야말로 동적 존재, 움직이는 것이 그 본질인 존재다.


오늘 나는 엄마와 또 전화를 한다. 아직도 식당 일을 늦도록 하는 엄마를 향해 이제는 일하지 말란 말은 하지 않는다. 그저 '무리하지 말고 일하세요'라는 말로 당부의 말을 바꿨다. 엄마의 사냥과 채집을 나는 결국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도 현재의 가공된 삶 속에서도 여전히 내 몸의 DNA가 갈구하는 원시의 노동을 소환하려 집안 여기저기 움직여본다. 단순한 가사 노동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동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며 내 유전자의 명령에 순응하는 숭고한 사냥행위인 것이다. 그렇게 가족들을 위한 아침식사 준비로 오늘의 사냥을 기분 좋게 시작해 본다. 사냥 중에도 내 어미의 피땀으로 일궈낸 오늘날의 나의 여유를 이따금씩 아이들과 얼굴을 마주하며 누려보기도 한다. 그리고 애초부터 내가 동물이었음을 자꾸 망각하게 하는 스마트폰과 넷플릭스와는 오늘 하루 더 멀어지도록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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