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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뭉구박사 Jul 13. 2023

3대 엔터테인먼트사 취업 후, 두 달 만에 도망쳤다.

KOTRA 인턴 생활 이후 대학교 졸업까지는 순탄했습니다. 이수해야 할 학점을 3학년 때 모두 받아 놓았기 때문에, 4학년은 자유의 시간이었습니다. 친구들과 태국 한 달 살기도 다녀왔으며, 작은 광고대행사에서 6개월 동안 인턴 생활도 했습니다. 그리고 코로나19가 발생했죠.


모든 항공권이 취소가 되면서, 졸업 논문 발표를 하기 위해 중국에 갈 방법이 없어졌습니다. 논문 발표는 자연스레 온라인으로 대체가 되었고, 나름 준수한 성적을 거두게 되며 대학생에서의 마지막 순서까지 끝마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목차 ‘졸업 논문 발표’, 끝. 이제는 대학생의 삶이 담긴 책을 덮고, 훨씬 두꺼운 ‘사회인’ 책을 꺼내드는 순간이었습니다.


취업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습니다. 10여 곳에 이력서를 넣고, 3~4곳에 면접을 본 뒤, 나름 유명한 게임 회사에 모바일 마케팅 인턴직에 합격했습니다. 사무실에서 로봇이 커피를 만들어주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던 경험이 있네요. 그리고 인턴으로 출근한 지 단 이틀 째 되는 날, 다른 회사로부터 연락을 받습니다. 한국 3대 엔터테인먼트 중 하나에서 ‘중국본부 매니지먼트'에 합격했다는 전화였죠. 인생의 갈림길에 서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결국 엔터테인먼트로 넘어가기로 했는데, 지금 고민해 보면 다음과 같은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첫째, 게임 회사 모바일 마케팅 인턴직이 주는 불안감.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저는 해당 회사에 인턴으로 합격을 했습니다. 저까지 총 5명이 모바일 마케팅 인턴이었는데, 일종의 경쟁 구도였습니다. 3개월 간 교육을 받고, 평가를 받은 뒤, 이 중에서 약 50%만 살아남는 구조였죠. 저는 경쟁에 상당히 지쳐있었습니다. 이에 경쟁이 필요하지 않은 엔터테인먼트로 도망치는 선택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둘째, 단순히 엔터테인먼트 이미지가 가져다주는 ‘멋짐’입니다. 연예인과 일할 수 있는 기회, 내가 해당 회사를 다닌다고 했을 때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이미지. 그냥 멋있어 보였습니다. 제가 무슨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른 체도요. 실제로 저는 ‘중국사업 매니지먼트'가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면접 때는 다 좋다고만 대답했을 뿐이었죠. 그저 단순했고, 멍청했고, 남에게 보여지는 삶을 중시 여겼습니다.

셋째, 가족과 친구들의 의견. 혼자 풀 수 없는 이 고민은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전파가 됐고, 100% 모두 엔터테인먼트로 이직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회사가 가져다주는 네이밍 때문이었죠. 


감히 제 삶에서 가장 힘든 두 달이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엔터테인먼트가 가져다주는 일종의 뽕은 단 일주일이 가지 못했습니다. 그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이야기해보라고 한다면, 사원증을 받았을 때의 첫날과, 제가 담당하게 된 아티스트 뮤직 비디오에 출연하여 공룡 탈을 쓰고 30분 동안 땀을 흘리며 춤추던 날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실제 뮤직비디오에서는 약 3초간 출연합니다.)


그럼 이제 힘들었던 이유를 생각나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주 7일 근무제입니다. 로드 매니저는 아티스트가 움직이면, 함께 이동하는 존재입니다. 다음 날 스케줄은 당일 오후 8~9시쯤 결정이 되기에, 스케줄이 결정되는 순간까지 긴장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느 날은 새벽 4시, 어느 날은 오전 6시. 일어나야 하는 시간대에 일어나야 했고, 움직여야 하는 시간대에 움직여야 했습니다. 평일은 물론 주말까지 말이죠. 이 상황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등의 약속을 하는 것을 불가능했습니다.


퇴근을 일찍 할 수 있는 것도,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일정은 대게 밤이 되어서야 끝났고, 집으로 돌아와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씻고 잠드는 것뿐이었습니다. 유튜브를 볼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죠. 하루는 새벽 4시에 출발을 해서, 일을 끝마친 뒤 버스를 타려고 시간을 보니 새벽 5시였습니다. 거진 24시간을 일한 셈이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뭔가 잘못됐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날은, 법정 공휴일인 한글날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운전입니다. 저는 운전을 잘 못합니다. 특히 카니발 같은 큰 차는 운전을 해본 적도 없습니다. 그래도 하라고 하니 했습니다. 그리고 첫날부터 차를 긁었습니다. 그 이후로 퇴사를 할 때까지, 운전대만 잡으면 손에 땀이 흥건해졌습니다. 주차장을 빠져나오기 위해 20분을 소비한 일, 외제차가 즐비한 청담역 골목길을 오고 다닐 때의 그 긴장감, 그리고 무엇보다 제시간에 맞춰 도착해야 하는 압박감. 지금 생각해도 손에 땀이 날 것만 같네요. 운전은 제 역량과는 맞지 않은 직무였습니다.


세 번째는 직무적합성입니다. 마케팅을 하다가 로드 매니저를 하려니,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끼워 입은 느낌이었습니다. 피그마로 디자인 에셋을 만들다가 개발자를 하겠다고 무작정 코드 공부를 하기 시작하는 그런 느낌. 아티스트를 위해 운전을 하고, A에서 B로 데려다주고, 그동안 멍 때리면서 기다리는 일은 저와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퇴사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사건은, 촬영장에서의 일이었습니다. 그전에, 저는 평소 연예인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요. 이곳에서 일하면서 사생팬들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아티스트 중 한 명이 ‘사생팬은 팬이 아니다'라고 언급할 만큼 손사래를 치는 사생팬들 중 일부는, 아티스트가 어디로 가던 따라오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들로부터 아티스트를 지키는 것이 저의 임무 중 하나였죠. 


다시 돌아와서, 저희는 한 촬영장에 도착을 했고, 그곳에서도 (대체 어떻게 정보를 알고 왔는지 모를) 팬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촬영은 시작됐죠. 그리고 쉬는 시간에, 한 아티스트가 화장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로드 매니저 선임 중 한 분이 저에게 요청했죠. “OOO이 화장실에서 나올 때까지 문 앞에서 지키고 서 있어.” 제 역할이 하나 추가가 되었습니다. 화장실 문 지킴이. 화장실 문 앞에서 ‘이곳은 나랑 안 맞는다’는 결심을 내리게 되고, 결국 몇 주 뒤 퇴사를 했습니다. 


첫날 긁혀버린 차, 그냥 죽고 싶었다.




지금은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스토리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스스로가 쓸모없게 느껴졌습니다. 공원에 가서 한 두 번 눈물을 훔치기도 했고, 자존감이 바닥을 찍는 순간이었죠. 부모님께 말씀드리기도 죄송했습니다. 이제 막 친구들과 친척분들께 자랑을 하시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퇴사를 한다고 하니 얼마나 황당하셨을까요? 그저 참을성 없고, 끈기 없으며, 배가 부른 사람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로드 매니저와 회사에 대해 안 좋게만 말씀드린 것 같은데, 긍정적인 부분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우선, 주 7일제 근무 제도. 이는 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야근 수당, 주말 근무 수당에 대한 제도는 따로 없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받는, 연봉계약서에 작성한 월급이 전부였습니다. 


사람들은 좋았습니다. 중국사업 매니지먼트 팀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해 줬습니다. 퇴사를 하겠다고 말씀을 드린 순간부터 분위기는 약간 변해있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위로를 해주신 덕분에 비교적 마음 편하게 퇴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로드 매니저 선임 분 중 한 분은 나가지 말고 계속 같이 하자고 좋게 말씀을 해주셔서, 오히려 죄송한 기분이 들 정도였습니다.


아티스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담당한 멤버들은 모두 저를 ‘형' 대접해주었고, 일종의 연예인 병에 걸린 것 같은 친구들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함께 스케줄을 다닐 때나, 운전을 할 때 여러모로 신경을 써줘서 눈물이 날 정도였습니다. 음식이나 간식들을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고 했고, 자신들의 개인 스케줄이 저에게 미칠 영향을 항상 계산해 주곤 했죠. 이 친구들의 노래는 지금도 찾아 듣고, 또 응원하고 있습니다. 


퇴사를 하고, 고향인 대전으로 돌아온 뒤, 그저 생각했습니다. ‘나는 왜 실패를 했을까?’.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왔습니다. 


첫째, 게임 회사 모바일 마케팅 인턴직이 주는 경쟁의 불안감. 당연히 합격을 해서 정규직이 될 것이라는 마음가짐이 아닌, 실패를 할 경우 내게 다가올 영향만 걱정했습니다. ‘가족들이 실망하면 어쩌지?’, ‘친구들이 비웃으면 어쩌지?’, ‘다른 회사에 취업을 할 때 이에 대해 물어보지는 않을까?’.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도 없고, 실패를 했을 때 남들에게 보여지는 평판부터 걱정을 했으니, 남들보다 최소 두 번은 지고 들어간 셈이죠. 모종의 이유로 정규직이 되지 못했다는 가정하에도, 3개월 동안 배운 모바일 마케팅 실무 능력은 그 어디서도 배울 수 없는 값진 경험이라는 생각을 못했던 겁니다.


둘째, 단순히 엔터테인먼트 이미지가 가져다주는 ‘멋짐’. 이도 자신보다는 남을 너무 인식했기에 파생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서 받은 의견은 이 결과에 화력을 더한 셈이죠. 내가 지금까지 해온 마케팅 직무와는 전혀 다른 업무임에도 엔터테인먼트를 선택한 이유는, 단지 남들이 보기에 멋있어 보이지 않을까라는 안일한 생각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철저히 실패했죠. 


엔터테인먼트에서의 두 달은 저에게 있어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우선 남 눈치를 보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나다'라는 마음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고 하고,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가고자 하는 마인드가 생겼습니다. 그 행동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던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저에 대한 평판은 신경 쓰지 않게 된 것이죠.


더욱 긍정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실패했을 때의 영향을 생각하기보다는, 성공했을 때 스스로 느낄 수 있는 쾌감을 생각했습니다. 실패해야 하는 이유 100가지에 집중하기보다는, 성공해야만 하는 1가지 이유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엔터테인먼트 로드 매니저 당시에는 잠시 잊고 있었던, ‘하면 된다.'라는 마음가짐이 더욱 한 단계 성장해 돌아오는 순간이었습니다.




엔터테인먼트 당시 느꼈던 실패는, 알고 보니 실패가 아니라 단지 시련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실패는 넘어진 자리에서 머무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일어나서 걸어 나아가면 그것은 시련입니다. 언젠가 저는 제 인생에서 다시 넘어지는 순간이 올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때는 남의 눈치 보지 않고, 거뜬하게 일어나, 먼지를 털고 다시 걸어 나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결국 넘어지는 것도 지나고 나서 보면 별거 아님을 알기 때문이고, 몇 번 넘어져 봐야만 다시 일어나서 걷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여러분은 인생에서 어떤 시련을 경험해 보셨나요? 그 시련을 통해 어떤 것을 배우셨나요? 저는 군 생활 운동을 통해 하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KOTRA 인턴직에 합격하며 ‘하면 된다'는 마음가짐이 내가 가고자 하는 길로 이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엔터테인먼트에서 근무 경험을 통해, 남에게 보여지는 평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온전히 나를 위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판단 오류’를 범하고 있지 않은가?”

[평판 오작동] 원시시대는 좁은 범위의 부족 사회였기 때문에 평판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평판을 잃으면 생존과 번식이 불리하여 매우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다. 그래서 우리 유전자는 평판을 잃는 것에 큰 두려움을 느끼도록 진화했다. 밥을 혼자 먹는 게 창피한가? 유전자 오작동일 뿐이다. 남들과 다른 길을 가는 게 창피한가? 역시 유전자 오작동일 뿐이다. 대기업을 퇴사한 후 꿈을 이룰 수 있는 소기업에 가면 명함이 달라질까 걱정되는가? 유전자 오작동이다. 남의 눈치를 보는 건, 집단에서 평판을 지키라는 유전자 코드가 작동한 것뿐이다. 본능을 역행해야 한다.

- 자청, <역행자>




25시간 업무 후, 귀가하는 버스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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