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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묘보살과 민바람 Jun 24. 2023

성추행 가해자에게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고소를 고민했던 과정 (1)

* 성폭력 피해를 겪은 분에게 플래시백을 일으킬 수 있는 내용이 다소 포함되어 있습니다.



문자 하나로 만족할 생각이었다. 가해자에게 긴 문자를 썼다. 사과를 하라고. 사건 1년 후 그 지압원 카카오맵에 내가 겪은 일을 후기로 남긴 적이 있지만, 문자로 보내려니 긴장이 많이 됐다(그 후기는 거의 아무도 보지 않은 것 같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전송 버튼을 누르기까지 오래 걸렸다.     


생각한 대로, 답은 오지 않았다.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가해자는 시각장애인이라서 문자를 소리로 듣는다. 그런데 내가 치료를 받던 때 본 바로는 2D폰을 쓰고 있었으니 긴 데이터 문자를 전송 받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허공에 대고 이야기를 한 기분. 짧은 문자로 여러 번 끊어서 보낼까 생각도 했는데, 전송버튼을 한 번씩 누를 때마다 수명이 1년씩 깎이는 느낌이라 손이 가지 않았다.     


내용증명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병원에서 피부 시술로 피해를 입었을 때 내용증명을 보내 일부 환불을 받은 적이 있었다. 고소를 할 생각은 아니었고 다만 사안을 제대로 인지시키고 싶었다. 법적인 조치도 취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압박감을 주고 싶었다. 사건의 경위를 시간 순서로 모두 밝혀적고, 마지막에는 사과를 하는 경우 추후의 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겠다고 썼다. 가해자는 시각장애인이라 전화로만 이야기가 가능하지만, 나는 가해자의 목소리를 들으면 바로 플래시백이 찾아올 거라 느꼈기 때문에 배우자의 도움을 받아 반드시 문자로 사과를 하라고 적었다.


그리고 혹시 내가 쓴 내용증명에 명예훼손죄에 걸릴 만한 게 있으면 역으로 난감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일단 무료 법률 상담을 통해 검토를 받기로 했다.  

여성의전화 성폭력상담소에서 무료 법률 상담을 운영하고 있었다. (법률 상담은 매주 월요일 진행하는데, 당일 오전에 전화상담(02-2263-6465)을 통해 예약하면 1인당 30분가량의 상담이 가능하다. 나는 오전 10시에 예약을 하고 오후 6시에 부산 내 상담소에 찾아갔다.)


상담을 맡아주신 변호사님께서 내용증명은 당사자가 보기 때문에-이 가해자는 시각장애인이라 가족이 읽어주겠지만 가족이 이 내용을 어디에 이야기할 가능성은 낮기 때문에- 공연성이 없어서 명예훼손에 걸리지는 않는다고 하셨다.

고소를 하는 경우 시간이 많이 지나서 승산이 많지 않다며 안타까워하셨다. 아직 고소를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혹시 가해자가 내용증명을 받고 엉뚱한 소리를 하면 내 마음이 어떻게 반응할지 나도 장담할 수 없었다.


어찌 됐건 마음의 숙제는 풀어야 했다. 이제라도 가해자놈에게 할 말을 하고 내 뜻을 전하고 싶었다. 우체국에 가서 내용증명을 보냈다. 그 후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어서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3일 후, 아침부터 전화가 울렸다. 오래 전 저장해둔 지압원 번호였다. 받지 않자 다음날까지 7차례 전화가 왔다. 전화가 울릴 때마다 심장이 덜컹거렸다. 문자를 보냈다. 전화를 원치 않는 이유를 다시 한번 밝혔고, 사과할 의향이 없는 것으로 알고 연락을 차단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다음날 가해자의 아내에게서 문자가 왔다. 가해자가 불러주는 대로 적으면 되겠느냐고 묻기에, 그러면 되지만 내 경험에 대한 부정이나 인격적인 비난이 들어간다면 보내지 말아달라 답했다. 아내는자신이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아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만나서 얘기하자고 했다. 동정심을 자극하려는 마음이었는지 다리가 골절되어 있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어려운 내용을 빼고 다시 문자를 보냈다. 만남을 원하지 않는다고, 사과 한마디면 된다고. 정말 그랬다. 진정성 있는 사과 한마디면 모든 걸 잊고 용서도 할 수 있었다. 


다음날이었나. 가해자가 말했다는 내용으로 문자가 왔다. '00야 나 원장인데'로 시작하는, 반말로 쓴 문자였다. 자신은 '치료를 목적으로' '복부'를 마사지했는데 '본인이' 수치심과 불쾌감을 느꼈다면 미안하다라는, 거짓말투성이에다 앞뒤가 맞지 않고 형식만 사과인, 전형적인 가해자의 문장이었다. 나중에 꼬투리 잡힐 여지를 남기지 않고 책임을 떠넘기며 쉽게 빠져나가려는 의도가 그대로 들여다 보였다. 그 뒤에는 집사람을 만나서 밥 한번 먹어라, 빠른 시일 내에 연락 달라는 문장이 있었다. 회유해서 어물쩍 넘어가려는 속셈. 


그때까지의 과정에서도 꽤나 심력이 많이 쓰여서 한시라도 빨리 모든 걸 마무리짓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 정도면 그 새끼도 뜨끔은 하겠지. 나도 내 목소리를 낸 거야. 생각하고 마음을 정리하려고 여행도 다녀왔다.


그런데 나를 기만하는 문자를 보고 오히려 가슴에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물론 더 이상 그 일에 에너지를 쓰지 않는 게 내 삶에 이롭지만, 사람인 이상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또다시 굴욕을 겪고 그냥 넘기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억울함과 분노를 평생 가슴에 묻어둘 것만 같았다.


동거인과 단어 하나하나를 고민해서 답장을 썼다. 가해자가 보낸 문자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밝혀적었다. 그가 만진 곳이 어디인지, 얼마나 오래, 어떻게 만졌는지, 그곳을 만진 것이 치료 목적이라는 말이 얼마나 어불성설인지, '본인이' 문제인지 만진 사람이 문제인지 등. 욕 몇 마디 정도는 넣어주고 싶었지만, 혹시 나중에 내가 불리한 일이 생길지 모르니 사무적이고 냉소적으로 적었다.


내용증명으로 사과를 요구했지만 2차 가해를 당했다. 이젠 뭘 해야 할까? 찾아가서 따진다고 인정할 사람이었다면 제대로 된 사과를 했을 것이었다.


나는 고소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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