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란 무엇인가> 독후감은 아닙니다 :)
집단에 적응하길 포기한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왜 저럴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주위에서 열심히 돕고 이끌어줌에도 그 노력을 무시하고 주변인을 기만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인이 변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스스로도 체감하고 있음에도 편견이 생기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아래로 이어지는 글은 4개월 전, 저의 편견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나아지려고 하지 않는 분을 생각하며, 그분이 어찌하여 현재의 상태가 됐는지 분석하고 저격하고자 작성했던 글입니다.
개인은 유년기에 기초적이고 초보적인 자아 감각에서 출발하여 어른의 정체성을 지니게 되는 쪽으로 일생의 궤적을 따라서 움직여 간다. 그러면서 문화의 도덕적 성향과 가치에 맞물려 들어가는 정체성을 획득해 가고, 그에 따라 사회적 상호작용이 그러한 담화적인 제스처를 둘러싸고 조직된다.
- 책 <자아란 무엇인가> 中
현대에 포스트 모더니즘은 개별자들의 차이를 존중하는 사조이다. 다만 함께 살아가는 사회이기 때문에 주관적 차이의 바탕에는 여전히 보편성을 둘 수밖에 없다. 즉 사회적 인간이 지닌 보편적 당위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은 서로 밀어주고 이끌어주며 성장하도록 자극한다. 때로는 암묵적인 이해로 때로는 명시적으로 사회적 상호작용이 이루어진다. 자아는 사회적 차원에서 발달하며 사회적 인간은 서로 상호작용하고 모방하며 성장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확립되는 것이 주관성 아래에 깔린 보편적 담화이다. 보편적 담화의 본질이 이러하기에 우리는 성장을 멈출 수 없다. 발췌문에서 말하는 ‘어른의 정체성을 지닌다’는 것은 어느 상태를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사회적 상호작용 학습 그 자체이다.(라고 나는 해석한다)
성인(어른)은 유년기처럼 직접적인 역할 놀이를 통해 자아 감각을 발달시키기 어렵다. 자아 정체성이 성인의 필요조건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손민수 하다‘라는 부정적인 신조어가 있듯, 성인의 모방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어른의 정체성’을 지닌 성인의 사회적 상호작용 학습은 확립된 본인의 자아와 취향의 해석을 섞는 노력을 통해 본인의 것으로 체화하도록 기대한다.
일생의 궤적에서 자아 정체성 확립이 미흡했던 성인은 이러한 노력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개인의 안전망(가족 등)과 사회적 안전망이 필요하다.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본인의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변화의 노력을 들일 용기가 없을 때, 혹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길 거부하는 태도를 보일 때 사람은 쉽기 사회적 상호작용의 보편적 담화에서 도태되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진다. 때문에 개별자로서의 차이를 존중받기 위한 필요조건으로써 기본 바탕이 되는 보편적 당위성을 이해했는지 반성적 판단을 한 후, 사회의 도덕적 성향과 가치에 맞물려 들어가는 본인만의 정체성 확립의 실천적 단계를 밟아야 한다.
<자아란 무엇인가> - 앤서니 앨리엇
자아 개념에 대한 연구를 비판적으로 훑은 책이라 자아의 당위적인 역할이나 사회적 가치를 다루진 않아 읽으면서 큰 흥미는 느끼지 못했다. 생소한 개념이라 무엇이 타당한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다만 현대의 자아 개념과는 상충되는 과거의 주장과 비판의 흐름에 대한 이해는 얻어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