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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옹의 이방인 Jun 19. 2020

프롤로그

이름만 들어 본 '그 학문' 맛보기.

내 돈 주고 내가 모르는 맛을 먹는 것은 손해


프랑스에서 유학을 하다 보면 한국에서 접근하기 어려웠던 것들에 다가갈 용기가 생긴다. 프랑스이기에 특히 더 즐기기 좋은 콘텐츠들, 예를 들면 미술관 전시나 오케스트라 정기 공연 등 예술의 나라에 와 있다는 낭만적인 분위기를 충전하기 딱 좋은 분야들이 있다. 나의 경우에는 10유로 미만의 가성비 와인으로 주말마다 값싸게 취하며 프랑스에 살고 있음을 느낀다.


낭만의 도시 파리. 하지만 나는 리옹에 산다.


요리 또한 프랑스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표 문화 중 하나이다. 세계 3대 요리로 늘 거론되는 곳답게 어느 도시든 미슐랭 가이드의 별을 받은 레스토랑이 한 군데는 있기 마련이라 여행객이나 어학연수생들의 필수코스가 된다. 반면에 요리를 공부하는 학생이 아니고서는 이러한 '스타' 레스토랑을 만족스럽게 다녀오는 경우는 사실 드문 편이다. 애초에 프랑스의 식문화에 익숙하지도 않을뿐더러 고급 레스토랑 특유의 어려운 설명이 토핑처럼 올려진, 난생처음 보는 요리에서 셰프가 의도한 맛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심지어 최소 수 십 유로 이상을 지불하고 식당을 나서면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다신 오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하게 될지도 모른다.


학문도 그런 느낌이 아닐까 싶다. 영화 속의 프로파일러나 TV 교양 프로그램 패널로 나온 심리상담가를 보고 심리학과에 입학했다가 생각도 못한 뇌과학 영역에서 크게 뒤통수 맞고 학과를 옮기는 예는 꽤나 흔하다. 내가 프랑스에서 인류학을 공부한다고 하면 대체로 '그게 뭔데?'라는 반응이고, 사람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설명하면 '말만 들어도 어렵다'라고 일찍부터 학을 뗀다. 국내에는 인류학과가 개설된 대학도 적어서, 비전공자에게는 아무래도 '그들만의 리그'처럼 낯설고도 어렵게 느껴진다. 국내 전문가들이나 학회 차원에서 입문용으로 출판한 책들은 학부생들에게는 매우 유용하지만 대중이 먼저 손을 뻗어 집을만한 엄두가 나진 않는다. (촌스러운 표지 디자인도 한몫한다고 본다.)


Youtube 채널 <승우아빠>_ '비싼밥먹고 돈 안아까운 방법을 알려드립니다' 中


 "내 돈 주고 내가 모르는 맛을 먹는 것은 손해예요", 58만 구독자의 요리 유튜버 <승우아빠>는 우리가 고급 레스토랑에서 낭패 보는 이유를 명료하게 설명한다. 같은 맥락에서, 대중에게 수 백 페이지에 달하는 본격적인 인류학 도서는 너무 거하지 않을까? 차라리 시식코너처럼 지나가다 하나씩 집어 먹어볼 수 있는 자투리 인류학은 어떨까? 이러한 생각으로 시작해 [인류학 시식코너]라고 이름 붙인 이 소소한 시리즈를 통해, 마트의 행사 상품 같은 썰들을 풀며 스스로도 그동안 막무가내로 머릿속에 욱여넣은 지식들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물론 공짜로!

 


정의와 (흑)역사, 그리고 연구 분야


여기서부터는 제품 뒷면에 적힌 성분표처럼 이론적 설명이 더 필요하다고 느낄 사람들을 위한 부록이 될 것이다. 프롤로그인 만큼 인류학이 무엇인지,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리고 어떤 영역을 탐구하는지 간단히 알아보자.


 인류학에서 얘기하는 '사람'이 무엇인지 정의하려면 어떤 관점이 필요할까? 생물학적 관점에서는 영장류, 포유류의 일종일 것이고 사회학적으론 문명을 함께 만들고 공유하며 살아가는 공동체의 구성원이며 종교적으론 신의 피조물, 철학적으론 생각함으로써 존재하는 동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사람은 매우 복합적이고 다양한 해석을 필요로 하는 연구 대상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동일한 카테고리에 속해 있으면서도 우리는 서로 다르다고 느낀다. 피부색이나 이목구비, 식습관이나 음악 취향, 언어나 사고방식 모두 '다름'을 판가름하는 척도가 된다. 각각의 '다름'이 모두 사람을 특징짓는 요소이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 다르고 왜 다른지 연구함으로써 사람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 그래서 인류학의 세계는 등장인물과 에피소드가 끝없이 나오는 초장수 드라마 같다는 생각도 든다.


등장인물의 인간 군상이 다양해서 좋았던 시트콤 <빅뱅이론>. 시즌 12로 완결되었다.


조금 무겁고 어려울만한 부분도 살짝 살펴보자. 인류학이 학문의 형태를 갖추려 하던 때는 하필 식민지 건설에 열을 올리던 서구의 제국주의와 다윈의 진화론이 환장의 콜라보를 이루어 사회진화론이라는 끔찍한 혼종을 만들어 냈던 시기였다. 이때의 인류학자들은 생물처럼 사회도 더 단순하고 원시적인 형태에서 더 복잡하고 발전된 형태로 레벨 업 한다는 진화주의적 관점에서(정작 생물의 진화도 그런 포켓몬스터스러운 방식은 아니다) 인간 사회의 다양함을 해석하려 했다. 말하자면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사회는 아직 덜 발전한 '미개'사회이고, 인류 문명의 선두 주자는 높은 과학기술을 보유한 자신들, 즉 서유럽이라는 오만한 발상에서 시작한 것이 인류학이다. 이 시대의 연구는 후대에 많은 비판을 받고 학계에선 '그런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던 시기도 있었지'라며 흑역사로 취급하고 있는 반면, 현대에 이르러서도 일반 대중에게는 여전히 유효한 관점으로 인식되는 부분도 없지 않다.


진화주의, 식민지 정책, 남성우월주의,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근대주의 등... 우리가 이제껏 당연하게 여겨온 것과의 결별은 인류학의 피할 수 없는 과업이었다. 이러한 과거로 인해 인류학의 정신은 늘 반성적 전환을 기초로 하고 있다. 덕분에 학문적 가정에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고 연구 대상에 다각도·다방면으로 접근하려 노력하게 되면서, 인류라는 끝없이 넓은 세계의 실체적 지도를 그려갈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류학의 연구 분야는 매우 다양하고, 또한 이 시식코너의 메뉴도 다양하게 구성할 수 있다.

제1장부터는  다채로운 주제 ―가족·종교·예식 등의 사회 구조나 정치·경제·언어 등의 시스템, 더 나아가 환경, 신체, 젠더 그리고 비인간까지― 중에서 하나를 골라 관련된 썰을 소개하며 최대한 쉽게 설명해보고자 한다.



_ 프랑스 소재 공립 대학교 인류학과 재학

_ 참고 자료 : 권숙인 외 18명, 《현대문화인류학》, 형설출판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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