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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옹의 이방인 Jun 23. 2020

선물을 가장한 폭탄돌리기 경제

주고, 받고, 돌려주기가 합쳐진 경제 시스템

남녀공학이었던 내 모교에는 1학년은 남녀 분반, 2학년부터 합반이라는 정체 모를 시스템이 있었는데, 그렇게 합반이 첫 주에 몇몇 친구들의 주도로 마니또 게임이 진행됐었다. 제비를 뽑아 나온 사람의 비밀 친구가 되어 몰래 선물이나 도움을 주고 일주일 후에 정체를 공개하는 일종의 친목 도모 게임이라 학기 초의 서먹서먹함을 빠르게 누그러뜨리는 효과가 있었다. 고등학생이 하기에 좀 유치한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덕분에 반 분위기는 나름 좋지 않았나 싶다.


이 게임의 단점은 선물을 받기만 하고 주지는 않는 국회의원 같은 사람이 꼭 껴있으며 게임 중에는 그런 불공정한 참여를 확인하고 제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후에 선물을 주지 않았음이 밝혀져도 '까먹었다'라거나 '돈이 없어서' 같은 변명으로 넘어갈 수 있는 이유는, 굳이 지적하고 비난할 만큼 진지한 게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마니또를 비밀로 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주고받음의 규칙도 의무라면 어떨까? 심지어 일주일이 아니라 평생 계속된다면? 그런 경제 시스템이 정말로 있다. 유일한 근본인 줄 알았던 시장경제의 원리에 이의를 제기하는 인류학의 경제 연구를 시식해보자.



거저먹는 잔치 국수는 없다.


북서 태평양 연안의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 중 하나인 콰굴Kwagul 부족은 (콰키우틀 Kwakiutl이라고도 불린다.) 그들만의 독특한 풍습과 문화를 가지고 있다. 부족 내에서도 같은 조상을 공유하는 누메임Numaym이라는 혈족 단위가 있고, 그들은 같은 누메임 안에서 혹은 다른 누메임들과 여러 행사나 의식을 열여서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이들이 주고받는 선물은 현대인이 생각하는 '대가 없는 호의'의 개념이 아니다. 주고 / 받았으면 / 다시 돌려줘야 하는 게 콰굴 부족의 선물이다. 이 세 가지 행위가 사회적·도덕적으로 강요되는 그들의 마니또 게임을 이해하려면 포틀래치 Potlatch라고 불리는 이 선물 교환의 과정을 잘 살펴봐야 한다.

 

미국 인류학의 아버지 프란츠 보아스는 콰키우틀 연구를 통해 주고, 받고, 되돌려주는 포틀래치의 원칙을 발견했다.


포틀래치는 어떻게 이뤄질까? 누메임의 우두머리는 때가 되면 수장의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구성원들을 불러 모아 축제를 열고 자신의 자리를 아들이 계승해도 좋을지 동의를 얻는다. 이를 위해 잔치를 벌이고 사람들을 초대해 배불리 먹인 뒤 선물까지 주는 이들의 문화는 우리가 보기엔 좀 과하다 싶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축제와 초대, 그리고 증여의 과정은 사실 하나의 의식일 뿐이고 구성원들의 동의를 실제로 구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인류학 파트에서 언급했듯이 가족이라는 사회적 그룹의 기본 구성 요소가 바로 친족, 즉 '피로 이어졌는가'이기 때문에, 자식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아니라면 수장의 자리는 기본적으로 장자 상속이다. 그래서 누메임 우두머리가 여는 축제는 승계식을 열어 아들의 상속이 공공의 인정을 받게 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과정과 형태는 잔치 문화의 일부분으로서 우리의 풍속에도 존재했으며, 지금도 남아 있다. 조선 시대에는 조정 차원에서 기로연(耆老宴)이라는 잔치를 열어 고령의 관원들과 때로는 일반 백성들도 초대해 음식과 술을 배불리 먹이고 선물을 나눠주었으며, 현대에는 결혼식이나 돌잔치가 초대와 축하가 오가는 자리이다. 특히 결혼식은 축의금이라는 형태의 '돌려주기' 규칙이 적용되는데, 스몰웨딩을 원하는 요즘 커플들과 달리 이에 반대하는 부모님들의 입장을 보면 돌려주기의 도덕적 의무가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태 남의 집 결혼식에 갖다 준 축의금이 얼마인데, 내 자식의 결혼식에서 회수하지 못하면 손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자본주의 윤리가 가미되어 상황에 따라 축의금의 규모를 정하는 사회적 합의도 생겨났다.


친밀감의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축의금 액수. 친구가 적어서 다행이다.

  

하지만 남의 집 경사에 참석하는 일이 늘 즐거운 것은 아니다. 우리 아들은 고졸 백수인데 친구네 딸이 판검사 됐다고 잔치 벌이면 축하해주러 가고 싶을까? 더구나 콰키우틀 같은 부족 사회에서 혈족의 수장 자리는 다른 구성원들에겐 도전할 기회조차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콰굴 부족의 사회적 의무에 따르면 이미 초대된 잔치에 불참하는 것도 이들에겐 허용되지 않는다. 축제를 벌이는 쪽은 종종 파산의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자신들의 경제력을 최대한 소모하여 성대한 자리를 갖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초대된 사람은 반드시 참여하여 이 축제를 즐겨야 한다.


또한 축제를 열어서 음식을 제공하고, 선물을 증여하는 행위에는 종교적 해석이 덧붙여진다. 토테미즘 사회인 콰굴 부족이 타인에게 주는 선물에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어서 선물 받기를 거부하거나 받고서 다른 선물로 되돌려주지 않는 행위는 상대 토템에 대한 모욕이며, 이런 행위를 한 사람은 저주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사물에 담기는 이런 종교적 의미는 콰굴 부족이 사는 밴쿠버 일대와 한참 떨어진 남태평양의 여러 원주민 사회에서도 목격되며, 대표적으로 종교인류학 파트에서도 언급했던 마나 Mana가 있다. 참고:  https://brunch.co.kr/@5pbank/4 ) 그래서 포틀래치에 참여한 혈족 구성원들은 이러한 믿음과 규칙에 따라 선물을 준비해 가는 것이다. 사고파는 시장 경제의 원리가 아닌데도 콰굴 부족의 교환 시스템은 나름의 규칙과 강제성을 갖추고 있다.



끝없는 교환의 굴레


이번엔 방금 얘기한 남태평양으로 가보자. 오스트레일리아 북쪽 뉴 기니 섬 근처에는 트로브리안드 Trobriand라는 섬 무리가 있다. 이 섬(들)의 원주민들은 쿨라 Kula라고 불리는 섬 간 교역을 진행하는데, 교역의 물건은 술라바 Soulava와 므왈리 Mwali 단 두 가지이다. 붉은 조개껍질 목걸이 술라바는 시계 방향으로 섬과 섬을 이동하며 하얀 조개껍질 팔찌 므왈리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이동한다. 물건의 이동은 끊임없이 진행되며 서로 교차하기를 반복하는 일종의 수건 돌리기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 조개껍질 장식품들은 앞서 말했듯 영적인 에너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받기를 거절해서는 안되며, 받았다고 소유해서도 안된다. 그래서 물건을 받은 섬은 다시 다음 섬으로 보내준다.


쿨라 교환의 형태. 정말 놀라운 것은 사실 항해 기술이 아닐런지.


여러 섬으로 이루어진 트로브리안드는 이러한 행위를 통해 공동체 의식을 다지는 한편, 섬 간의 정치적·사회적 질서도 다시 확인한다. 부족 사회의 특성상 하나의 현상은 종교적·정치적·법적·가족적·도덕적·경제적 성격을 동시에 가지기 때문이다. 쿨라를 연구한 마르셀 모스는 교환 경제의 이러한 다층적 성격을 '총체적'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니 만약 한 섬에서 쿨라의 규칙을 깬다면, 그곳은 저주와 절교, 심지어 전쟁까지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제목에서 표현했듯이 쿨라는 사실상 폭탄 돌리기와 같다. 가족오락관의 폭탄 돌리기와 다른 점은 시한폭탄이 아니라 교환을 멈추면 터진다는 것이다. 당신이라면 이 마니또 게임의 규칙을 어길 수 있을까?


누메임의 수장은 가장 많은 부를 쌓은 것 같지만 한 순간에 모두 소비해야 하는 의식을 치러야 한다. 쿨라를 통해 순환하는 물건들도 가문이나 토템을 상징할 뿐이지 소비재는 아니다. 즉 북서 태평양의 콰굴 사회와 남태평양의 트로브리안드 군도에는 화폐나 신용 같은 자본주의적 제도가 없는데도 그들이 공유하는 가치와 믿음, 그리고 사회적 의무에 따라 교환을 토대로 하는 경제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교환 경제가 태평양 원주민 사회의 전유물은 아니다. 쿨라나 포틀래치는 부족 사회의 위계질서를 확립하는 정치적 성격이 다소 강했지만 한반도의 옛 풍속인 품앗이의 경우에는 서로 돕는 것을 중요시하는 호혜적 문화에 가까웠다. 품앗이에서 주고받는 노동을 타산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아이의 일손이든 어른의 노동력이든 대등하게 여기고 교환했기 때문이다.



제품 설명 : 경제인류학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복선!


나는 어릴 때부터 셈을 싫어해서 수학이나 경제라는 단어만 봐도 식은땀이 나는 체질이다. 하지만 경제 연구를 빼놓고 인류학을 소개하는 것은 외국인에게 한식을 소개하며 김치를 내놓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사실 인류학 시식코너 시리즈의 프롤로그 섬네일로 사용한 이 사진도 쿨라에서 쓰이는 조개껍질 장식과 뉴 기니의 전통 가면인데, 이건 파푸아 뉴기니의 화폐인 5 키나 kina의 뒷면 그림을 가져온 것이다. 포틀래치와 쿨라에 대해 더 쉽게 이해하고 싶다면 브런치 이상우 작가님의 글을 읽어보자. ※ <아니, 결혼식을 사흘 동안 한다고 https://brunch.co.kr/@northcat/9 >

말리노브스키, 마르셀 모스, 프란츠 보아스 등 20세기의 여러 인류학자들이 연구한 교환 경제는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서구 중심적 패러다임에 빠져 있던 시대를 향한 통쾌한 비판이다. 기존의 경제학이 생각하는 '경제적 인간 (Homo oeconomicus)'은 이기심을 기반으로 한 합리적 선택을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인류학에 경제라는 하위 카테고리를 만들어줬다는 점에서도 매우 의미가 깊다. 종교, 정치, 성차별 등 여러 분야와 다양하게 연결되는 중심 테마로서 경제는 매우 중요한 연구 대상이다. 비록 필자는 경제인류학 과목을 낙제하긴 했지만.



참고 자료 : 김현자.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 인문논총 제68집, 2012, pp. 495-508.

Mauzé, Marie. <Boas, les Kwagul et le potlatch. Éléments pour une  réévaluation>, L'Homme, EHESS, 1986, 26 (100), pp.21-63.

Malinowski, Bronislaw. Les Argonautes du Pacifique occidental. 1922, trad. fr. 1963, rééd. Gallimard, coll. « Tel », 1989.

오명석. <교환, 소유, 소비>. 권숙인 외 18명. 《현대문화인류학》, 2018, pp. 117-144.

이상일. <잔치>. 한국민속문화대백과사전, 1997.

김택규. <품앗이>. 한국민속문화대백과사전, 1995.

정승모. <기로연>. 한국민속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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