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만 해도 깡총거리는 스텝을 밟아야 할 것 같은 마성의 멜로디. 이 흥겨운 OST로 시작하는 애니메이션 <개구쟁이 스머프>는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를 매료시켰던 히트작이다. 스머프 시리즈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어느 숲 속에 흰 모자와 멜빵바지를 입은 파란색 난쟁이들이 마을을 이루고 산다는 동화적인 설정으로 만들어졌다. 이름은 없어도 개성은 분명한 스머프들과 그들을 잡아먹으려는 나쁜 마법사 가가멜 사이의 좌충우돌 추격전은 <톰과 제리>에 버금가는 스릴과 재미가 있었다 (실제로 두 작품의 제작사와 담당 제작자가 같다).
한국에는 1983년에 수입됐지만 2015년까지도 꾸준히 방영할 만큼 인기가 있어 여러 세대를 아우르는 추억의 애니메이션이라 부를 만하다. 물론 대부분 어린 시절에 시청했을 테니 대략적인 이미지만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버섯 모양의 집에 살면서 서로를 각자의 직업이나 특성으로 부르고, 덥수룩한 흰 수염의 파파 스머프가 지도자의 역할을 하며 마을을 운영하는 모습이 그려지는가? 들어 본 사람도 있겠지만 스머프 마을의 이러한 특색에 대해 '공산주의 선전물'이라는 해석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출처 : 한국일보) 벨기에 만화가의 원작에 미국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만든 애니메이션이 정말 그런 사상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는지는 밝혀진 게 없지만, 그만큼 스머프 마을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로 설명되는 다수의 현대 사회와는 다른 모습을 가진 것도 사실이다. 오늘은 다분히 스머프스러운 남미의 원주민 사회를 살펴보며 그들의 정치 형태는 어떤 것인지 알아보자.
마르크스가 모델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은 파파 스머프. 사실 꽤나 닮았다.
YOLO의 원조?
19세기 말에 조선을 방문했던 서양 선교사들은 그들과 다른 우리 선조들의 생활상에 놀라곤 했다. 조선에서의 경험을 담은 여행기들을 보면 밥그릇 크기부터 남다른 대식가였다는 점이나 외국어를 금방 익혀서 능숙하게 발음했다는 등 꽤 재밌는 부분도 있지만, 반면에 부정적인 묘사와 평가도 있었다. 특히 여러 관찰기에서 '조선 남성들은 게으르고 여성들만 일하고 있다'라는 기록이 종종 나온다. 일본인들의 여행기에도 아직 대낮인데 남자들은 자신들의 팔 길이보다 긴 곰방대를 물고 누워 있고 아낙네들은 옹기종기 모여 잡일을 하고 있다는 언급이 많았다. (출처 : 《이방인이 본 우리》, 국사편찬위원회)
그보다 몇 세기 전에 남아메리카를 방문(이었다가 곧 침공)했던 서유럽인들도 비슷한 감상을 남겼다. 그들의 눈에 비친 남미 원주민들은 한나절을 해먹 위에서 담배만 피우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브라질의 투피남바 Tupinamba족이나 과라니 Guarani족을 관찰한 포르투갈인들은 '인디언처럼 게으른'이라는 표현이 만들기도 했다. 두 사례의 차이점은 조선의 경우 농민들의 일과가 새벽 일찍 시작하여 오전 중에 농사일이 모두 끝났기 때문이고, 브라질 원주민들은 실제로 노동시간이 적었다는 것이다. 앞서 얘기한 투피남바족은 하루 평균 네 시간, 아마존의 야노마미 Yanomami족이나 파라과이의 구아야키 Guayaki족은 그보다 적은 세 시간만 노동에 할애했다.
남미 원주민들의 매우 적은 노동 시간에 서유럽인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대량 생산을 위한 기술이 없는 '원시 사회'는 하루 종일 일해야 겨우 먹고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듯이 당시 남미의 원주민들은 농사도 짓긴 했지만 여전히 수렵과 채집을 겸하고 있었다. 기계도, 공장도 없으며 식량을 오래 보존할 수도 없는데 심지어 일도 얼마 안 한다고? 서구에서 온 손님들은 이 게으름뱅이들이 늘 굶주림에 고통받으며 살 것이라 예상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하루 서너 시간 노동으로도 생존에 지장이 없었으며 심지어 오전 중에 일을 끝내고 사냥, 낚시, '전쟁' 등의 여가 활동을 즐겼다. 노동은 반나절만 하고 취미 생활에는 목숨을 걸다니, 진정한 YOLO (You Only Live Once, 인생은 한 번뿐!)가 아닐 수 없다.
투피남바족은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전쟁을 즐기는 호전적인 민족이었다.
그들만의 뉴 발란스
남미 원주민들은 어떻게 이런 이상적인 '워라밸'을 누릴 수 있었을까? 아프리카나 아메리카의 사회를 관찰했던 초기 유럽인들의 공통적인 감상은 '부족하다'였다. 화폐도, 시장도, 글자도, 기술도, 국가도 없는 사회이기 때문에 생존에 필요한 요소들도 늘 부족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경제인류학 파트에서도 얘기한 것처럼 매매가 아니라 교환을 기반으로 한 경제 체제에서 화폐나 시장은 필수가 아니다. 시장이 경제의 절대적인 요소라는 서구 사회의 고정관념이 깨졌듯이, 기술의 발전과 사용에 대해서도 남미의 원주민들은 유럽과는 다르게 생각했다.
만약 기존의 생산력이 10시간을 일해서 밀 10포대를 얻는 수준이라고 가정해보자. 농기계가 발전하여 생산성이 2배로 늘었다면 10시간 동안 20포대를 수확하는 것이 유럽인들이 생각하는 합리적인 행동이다. 당시의 유럽은 여러 기술적 진보가 이어지며 산업혁명을 향해 나아가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공장이 우후죽순 생기기 시작하면서 유럽의 노동 환경은 어린아이도 12시간씩 일할 정도로 가혹했다). 하지만 남미의 원주민들은 10포대를 5시간 만에 수확하고 나머지 5시간은 노는 것을 택했다. 단순하지만 획기적인 발상이 아닌가? 즉 이들은 먹고 살 정도의 필요치를 만족했다면 그 이상의 노동과 생산을 위해 시간을 쓰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세상은 이상적인 균형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선조들의 속담처럼, 남보다 더 갖고 싶은 것은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사회를 연상케 하는 스머프 마을에서도 화폐(처럼 생긴 초콜릿)와 발전된 기술이 생기자 경제적 불평등과 과잉 생산의 현상이 나타났다. (참조 에피소드 : <욕심 나무>, <낭비하지 않으면 부족할 것도 없다>) 화폐가 없는 원주민 사회라 할지라도 축적한 재물에 따라 빈부 격차는 만들어질 수 있고, 누군가는 발전된 농기구로 더 많이 일해서 더 많이 생산하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서구 사회의 경제학은 자본의 존재와 인간의 이기심을 경제의 근본적인 요소로 여긴 것이다.
이름값을 하는 욕심이 스머프의 눈빛.
추장님, 당신의 재물은 이제 제 겁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남미 원주민들은 어떻게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생산하여 더 많이 가지려' 하지 않았을까? 질문의 답은, '그럴 수 없었다'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정치 체제가 이러한 경제 행위를 막은 것이다. "노동을 규제하고 부의 축적을 막는 정치 체제", 이런 표현은 스머프 마을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투피남바족을 비롯한 여러 부족의 추장제 (chefferie)는 마르크스나 레닌의 사상과는 오히려 거리가 멀고, 그 형태는 상상 이상으로 독특하다.
정부는 없지만 그들에게도 정치와 권력의 개념은 분명히 있다. 다만 그 개념의 전개 방식이 현대인들과는 많이 다를 뿐이다. 예를 들어 투피남바족의 추장은 남들보다 더 많은 아내를 거느릴 수 있는 특권을 가진 대신 부족민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세 가지 필수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첫째, 추장은 평화의 수호자이며 다툼의 조정자여야 한다.
둘째, 추장은 후한 인심을 가져야 한다.
셋째, 추장은 좋은 연설가여야 한다.
첫 번째 조건에 따르면 추장의 역할은 기본적으로 부족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다. 추장은 전쟁 시에는 매우 강력한 권력을 갖지만 부족 내의 싸움을 중재할 때는 결코 힘을 내세워서는 안 되며 오로지 그의 권위와 공평성, 그리고 좋은 말로 화해시켜야 한다. 즉 추장은 권력자이지만, 무언가를 강제할 공권력은 없다. 파파 스머프도 명실상부한 스머프들의 리더이지만 마을엔 그를 따르는 경찰이나 군대가 없다. 그는 지혜와 인자함으로 스머프들에게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그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왕' 노릇을 하고 싶었던 똘똘이 스머프는 근육이 스머프에게 직위를 주고 군대를 만들게 한다. 그는 파파 스머프처럼 폭력 없이 자신의 권위를 세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참조 에피소드 : <스머프 대왕>)
가슴팍에 달린 훈장에 취한 근육이 스머프.
두 번째 조건은 약간 의아하다. 여기서 말하는 인심이란 부족민들이 어떤 물건을 요구하든, 추장은 아낌없이 건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아메리카의 사회를 조사한 민족학자들은 욕심을 부리고 재물을 나눠주지 않는 '야박한' 추장이 모든 권위와 권력을 부정당하는 상황을 종종 목격했다. 즉, 이것은 단순히 추장으로 인정받는 조건이 아니라 추장의 의무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포틀래치와 쿨라에 대해 설명했던 것처럼 (참조 : 선물을 가장한 폭탄돌리기 경제) 선물을 준다는 것은 그 안에 내재된 사회적 질서를 확인하는 행위이다. 부족민들에게 재물을 양보함으로써 추장은 자신의 권위를 인정받는 것이다.
세 번째 조건은 더 특이하다. 앞서 싸움의 중재자 역할을 하기 위한 방법으로 언급했듯이 추장은 달변가여야 하며 투피남바족은 좋은 연설을 할 수 있는 추장을 원한다. 그래서 추장은 매일 새벽부터 저녁까지 평화, 화합, 정직 등의 테마로 일장 연설을 해야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추장은 종종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썰렁한 분위기에서 홀로 뻘쭘히 나불대며, 부족민들은 듣는 둥 마는 둥 추장을 쳐다보지도 않고 자신의 할 일을 하는 경우가 있다. 잔인할 정도로 민망하지만, 부족민들은 추장의 의무인 연설을 대놓고 무시함으로써 그의 권위가 공동체의 인정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선 스머프들에게 무시당하지 않는 파파 스머프는 남미의 추장들에 비하면 비교적 체면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추장의 연설을 무시하는 블랙 투피남바몬.
스머프 마을과 다른 듯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남미 원주민들의 사회. 이들은 위에서 나열한 여러 조건과 의무를 통해 추장에게 매우 제한된 권력만을 허락하기 때문에 정부, 혹은 국가와 같은 규모 있는 정치 기구가 만들어질 수 없다. 또한 추장은 인심이 넉넉해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재산을 축적할 수 없고, 남보다 더 가지려는 노력도 의미가 없다. 하지만 그 논리를 그저 공산주의나 아나키즘, 혹은 단순히 '원시 사회'로 치부하는 것은 원주민들에게도 스머프들에게도 실례가 아닐까? 이에 대해 정치인류학은 우리에게 좀 더 흥미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제품 설명 : 정치인류학
프랑스의 인류학자 피에르 클라스트르 (Pierre Clastres, 1934-1977)는 유럽인들의 신대륙 상륙 후 수 세기 동안 관찰된 현지의 모습을 정치인류학적 관점에서 새롭게 분석했다. 원주민들의 이유 있는 게으름, 즉 '추가 노동을 통한 잉여 생산과 부의 축적'을 추구하지 않는 행위를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클라스트르는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수준 이상의 노동과 생산은 사실상 타인의 필요를 대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원주민들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하루 서너 시간의 노동으로도 굶주리지 않는 게 가능한데,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는 추가적인 생산 활동이 이뤄지려면 외부의 압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머프 마을의 예를 보자. 여기는 원래 투피남바족처럼 화폐가 없는 공유경제 사회이다. 그런데 <욕심 나무> 에피소드에서 가가멜 측의 계략으로 돈 모양 초콜릿이 열리는 나무를 갖게 된 욕심이 스머프는 욕심을 부추기는 악마에게 넘어가 친구들에게 초콜릿을 나눠주지 않는다. 오히려 친구들이 가진 물건과 교환하여 홀로 재물을 독차지한 욕심이는 스머프 마을에 잠시나마 빈부 격차와 불평등을 만들었다. 하지만 사유 재산이 없어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스머프 사회에서 재물을 독점하는 행위는 사회적 고립을 낳을 뿐이었다. 욕심이 스머프는 이내 반성하고 친구들의 물건을 다시 돌려준다. 스머프 마을은 재산의 차이가 위계질서로 이어지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에 가가멜의 계략이 무위에 그친 것이다.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지 않으면 많은 재물도 의미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투피남바족은 추장이 재물을 축적할 수 없는 시스템을 만들어서 부와 권력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끊어놓았다. 그래서 그들 사회에선 재산이 권력의 척도가 될 수 없다. 권력으로 치환하지 못할 재물은 모아봤자 의미가 없으니 투피남바족은 더 많이 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역으로 얘기하면, 우리가 먹고사는 수준 이상의 재산을 모으는 이유는 부의 축적과 그로 인한 불평등을 용인하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재산으로 인한 불평등은 사회적 부채를 만들고, 일하는 자와 일하지 않는 자를 나누며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있는 사회를 만든다.
클라스트르는 위와 같은 논리를 전개하며 '자본이 권력을 만든다'라는 마르크스의 이론과 이것을 진리로 여기는 서구 사회를 비판했다. 인간의 이기심이 사유 재산과 빈부 격차를 만들며 경제적 불평등이 정치적 위계의 기반이 된다는 것이 <자본론>의 핵심인데, 클라스트르는 이것을 거꾸로 뒤집은 것이다. 그는 투피남바족의 예를 들어 사회가 정치권력을 용인하지 않으면 경제 권력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역설(力說)한다. 또한 이 주장은 공산주의 국가의 이상과 현실에서 드러난 모순을 설명해준다. 만민의 평등을 실현하려는 사회에서 오히려 특정 소수의 지배 계층만이 부와 권력을 독식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은 경제 구조 위에 정치권력이 생긴다는 가설에 대한 반증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클라스트르의 책 제목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La société contre l'Etat)》는 강한 정치권력을 의도적으로 용인하지 않는 사회도 존재할 수 있다는 새로운 관점을 보여준다. <개구쟁이 스머프>를 단순한 공산주의 선전물로 치부할 수 없듯이, 원주민 사회도 결코 정부를 가지지 못한 미개 사회로 격하시킬 수 없다. 그들은 화폐를, 시장 경제를, 빈부 격차를, 불평등을 구조화하는 정치 기구를 선택하지 않은 사회일 뿐이다.
참고 자료 : Clastres, Pierre. La société contre l'Etat. Collection Crtique, Edition de Minuit, 1974.
채수홍 (2005). ‘국가에 대항할 수 없는 사회’로의 타자화 : 클라스트르의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에 대한 단상, 피에르 클라스트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 홍성흡 역, 이학사, 2005. 진보평론, 322-329.
최윤필. <인종차별, 공산주의 선전… 인기만큼 잦은 시비 휩싸였던 스머프 57번째 생일>. 기억할 오늘, 한국일보, 2015/10/23.
홍준화. 제5장 :「개항기 외국 여행가들이 본 조선, 조선인」, 국사편찬위원회. 『이방인이 본 우리』, 두산동아, 2009, pp. 249-250.
에피소드 <욕심 나무>, <낭비하지 않으면 부족할 것도 없다>, <스머프 대왕>. 유튜브 공식채널 [개구쟁이 스머프]·한국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