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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벗 Oct 30. 2023

세 가지 광원

추석 날 저녁

9월에 중순쯤인가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다가 허리를 삐끗한 이후 거의 걷기도 힘든 지경이었다. 중국 친구와 통화하다면서 세탁물(Laundry) 옮기다가 허리를 다쳤다고 했더니 "세탁기" 옮기다가 다친 줄 알았다며 깔깔 웃었다. 한 번 다친 허리는 세탁기가 아니라 세탁물을 옮기다가도 다칠 수 있구나. 문제는 아픈 시점이었다. 9월 말에 딸아이 모의재판팀 아이들과 함께 시카고에 다녀오고, 샌디에이고에서 하는 행사에도 참석하기로 예약을 해놓은 상태여서 마음이 부담스러웠다. 특히 하룻밤을 비행기에서 꼬박 지세고 도착 즉시 일정을 시작하는 3박 5일짜리 시카고 여행은 더욱 그랬다. 아이들을 도와준다고 따라간 학부모가 허리 아프다고 걸림돌이 되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그 며칠 동안은 책상에 앉아서 하는 일은 거의 하지 않고, 무거운 냄비 설거지도 남편에게 맡기고 소위 "허리 위생"에 신경 썼다. 걸을 수 있는 만큼 꾸준히 걸었다. 허리 아플 때 걷기는 확실히 효과가 좋았다. 덕분에 너덧 시간 왕복 비행과 시카고 한복판에서 하루 몇 차례 호텔과 법원을 걸어서 오가는 보호자 노릇을 너끈히 해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 주에 개강한 커뮤니티 미술 수업 숙제를 그저 해치워야 했다. 


올 추석은 그렇게 추석인 줄도 모르고 지나갈 뻔했다. 다만 저녁을 먹고 산책을 나갔는데 무지하게 큰 달이 나지막이 떠있었다. 어머, 어쩜 달이 이렇게 크지? 남편과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아, 내일이 추석이지. 어머, 추석이구나. 추석 때는 진짜 달이 크구나. 달빛을 받아 생소한 얼굴을 보여주는 동네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에 샌디에이고에 간다는 것을 깜빡하고 점심 약속을 했다는 걸 그날 아침에 깨달았다. 안 지 얼마 안 된 분이 집으로 초대해 주셨던 거다. 우리 집에서 고속도로를 1시간 30분 정도 냅다 달려야 하는 거리이니 왕복 운전만 세 시간이다. 2박 3일짜리 짧은 일정이지만 아무것도 안 챙겨놓은 터였고 허리 통증도 가시긴 했지만 여전히 신경 쓰여서 잠시 갈등이 되었다. 그런데 마음에서는 단호히 약속을 지키라고 하는 듯하여 마음의 말을 듣기로 했다. 1시간 반을 달려서 간 자리에서 나는 친정에 왔나 싶었다. 직접 반죽해서 빚은 송편과 빈대떡은 언제 마지막으로 구경이라도 했나 기억조차 가물하다. 그 분과 아이 학업 얘기도 아니고, 쇼핑 이야기나 돈이 되는 완소 정보 이야기 한 마디 없이, 두 사람 자신의 삶을 나누고 왔다. 알아듣는 사람을 만나기 어려운 이야기를 서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샌디에이고에 다녀오고 나서 추석 날 찍은 동네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의 시작은 언제나 관찰과 질문이다. 휴대폰 사진앱에 담긴 수많은 사진 중에서 왜 이 장면을 그리고 싶어 졌을까? 정말 그리고 싶은지 한참이나, 몇 번이나 바라보고, 사진에 포착된 장면이 아니라 그 장면을 눈으로 보았을 때 기억을 떠올린다. 이 장면을 빚어낸 요소들은 무엇이고 그 요소들과 나의 삶에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묻는다. 이번에는 캄캄한 밤에 이 장면을 드러나게 한 세 가지 빛을 그리기로 했다. 남편에게 제목을 말했더니 광원이 둘 밖에 안 보인다고 했다. 왼쪽 집의 처마 밑에도 빛이 하나 숨어있다. 거기 전등이 켜지지 않았다면 이 그림에서 가장 어두 컴컴한 공간이었을 거다. 거기 작은 전등이 켜져 있으니까 벽과 바닥과 앞에 있는 나무의 윤곽선이 드러날 수 있었다. 그림이 아닌 실제 삶에서는 저 집에 사는 주부가 쓰레기를 버리러 나갈 때 꼭 필요한 등불일 거다. 조금씩 그리던 그림을 얼마 전에 얼추 완성했다. 지금 보니 서명을 안 했구나.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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