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추수감사절은 전통적으로 대가족이 모이는 명절이다. 이민자라고 해도 친척이 한두 명 이곳에 있다면 다르겠지만 이곳에 세 식구뿐인 우리 가족은 이 기간을 그럭저럭 잘 보내는 일이 매년 곤욕이다. 올해 땡스기빙을 어디에서 보낼지 알아보다가 배운 말이 있다. 데스터네이션 땡스기빙(Destination Thanksgiving)이라는 말이다. 한국에서도 요즘은 명절에 여행을 가서 지내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는데 미국에서도 그런 것 같다. 올해는 레이크 타호(Lake Tahoe)에서 보내기로 했다.
흔히 캘리포니아에서 최고의 자연경관으로 요세미티를 꼽지만 레이크 타호에도 그에 못지않는 매력이 있다. 레이크 타호는 캘리포니아 주와 네바다 주에 반반씩 걸쳐서 해발 6,225피트, 즉 약 1,897미터의 고도에 위치한 거대한 호수이다. 면적이 22,616 에이커, 즉 9,152 헥타르로 춘천 소양호의 열 배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지리산쯤 되는 높이에 소양호의 열 배쯤 되는 호수가 있다고 보면 된다. 호수 주위는 해발 1만 피트(약 3,200미터)가 넘는 높은 산봉우리로 둘러싸여 있어 만년설까지는 아니어도 가을부터 늦은 봄까지 눈을 볼 수 있다. 이런 자연조건 덕분에 겨울에는 눈썰매나 스키를 즐기고, 여름에는 곳곳에 눈 녹은 물이 폭포를 이루는 멋진 풍경과 호수에서 수상스키를 즐길 수 있는 장소로 인기가 높다.
아마 타호를 가장 잘 즐기는 방법은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는 것일지 모른다. 사실 고산지대이다 보니 날씨를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 큰 이유이다. 특히 땡스기빙 무렵에는 더욱 그렇다. 어떤 해에는 이 즈음에 눈에 너무 많이 와서 산속 캐빈으로 숙소를 정했다가 며칠씩 발이 묶여서 고생한 이야기도 들었다. 올해는 그런 염려는 없을 것 같았다. 여행을 계획하는 한 달 전쯤부터 날씨를 계속 추적했는데 눈 소식은 전혀 없었고 우리가 여행할 무렵에는 온도가 높고 구름이 낄 것이라는 예보가 계속되었다. 뭐 그래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빽빽한 나무 사이로 난 트레일을 걷고 해변과 같은 호숫가에서 여유를 즐기는 것보다 더 좋은 휴식은 없을 테니까.
타호에는 다양한 숙소의 선택 옵션이 있다. 네바다 주 쪽에서 제법 큰 도시인 르노(Reno)나 칼슨시티(Carson)에 숙소를 정하고 타호로 오가는 방법이 가장 저렴하고, 예산이 넉넉하다면 호수 부근 특급 리조트나 캐빈에서 묵을 수도 있다. 한국 사람들이 선호하는 곳은 호수 남쪽의 해븐리(Heavenly)라는 지역과 북쪽의 인클라인(Incline)이라는 지역인데 모두 비교적 깔끔한 숙소들이 단지로 모여있는 곳이다. 어디에 묵을까 고민하다가 올해는 처음으로 호숫가 캐빈에서 묵기로 했다. 사실 약간 망설여지는 선택이기는 했다. 몇 년 전 다른 가족 몇 가족과 산속 캐빈에 묵었는데 가격에 비해서 청결 상태는 꽤 실망스러웠던 기억이 있어서이다. 하지만 사유지 해변을 즐길 수 있는 매력에 끌려서 호숫가 캐빈으로 정했다. 단, 단독주택 형태의 캐빈의 숙박료는 우리에게 넘사벽이고, 타호 비스타(Tahoe Vista)라는 지역에 서너 채의 집이 1층짜리 연립주택처럼 붙어있는 캐빈으로 예약했다. 처음에는 호수 앞에 있는 동을 예약했는데 딸의 친구가 함께 가게 되어 단지 뒤쪽에 있는 방 두 칸짜리 캐빈으로 바꾸었다.
출발하기 며칠 전부터 예보가 바뀌어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날이 무척 맑고 추웠다. 하이킹하기 딱 좋은 날이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호숫가보다는 해변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숙소 주위를 둘러보았다. 호숫가에 놓인 의자에 앉아서 하루 종일 책만 읽어도 좋을 것 같았다. 아이들은 숙소에서 곧바로 곯아떨어져서 남편과 주위에 있는 트레일을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오랜만에 피부에 닿는 추운 날씨가 반가웠다.
도착한 날이 땡스기빙 당일이어서 저녁에는 미리 예약해 둔 식당으로 향했다. 많은 식당이 문을 닫지만 이 날 땡스기빙 전통 메뉴를 내놓는 식당도 있다. 문을 여는 식당은 아주 맛이 훌륭해서 예약을 해두지 않으면 앉을 수 없거나 아니면 너무 맛이 없어서 그날도 문을 열 수밖에 없거나 둘 중 하나이다. 그러니 땡스기빙 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다면 예약은 필수이다. 내가 예약한 곳은 호수 바로 옆에 있는 식당인데 오래 전부터 땡스기빙 특선메뉴를 내놓는 곳 같았다. 분위기와 음식, 서비스가 모두 훌륭해서 넉넉한 팁을 놓고 왔다.
해가 짧고 밤이 긴 타호의 겨울밤이지만 호숫가 캐빈에서는 즐길 거리가 제법 많았다. 호수치고는 물결의 움직임이 힘 있고 바다처럼 파도가 쳐서, 물결 소리를 들으면서 산책할 수 있었다. 호수 위 하늘을 쳐다 보고 별을 관찰하는 것도 특별했다. 아이들은 해변에서 호수 중심 쪽으로 뻗은 서리가 내린 데크에 벌렁 드러누워서 한 동안 별을 봤다. 둘째 날 저녁에는 미리 준비해 간 냉동식품을 오븐에 데워서 간단히 저녁을 먹은 뒤, 출출한 야밤에 별을 보러 나갈 때 컵라면을 먹었다. 노란 머리의 딸아이 친구도 추운 날씨에 컵라면 먹는 재미를 즐길 줄 알았다. 별을 보고 코가 빨개져서 캐빈 안에 들어온 뒤에는 가스 벽난로를 켜고 보드 게임을 즐겼다. 캐빈 안에 다양한 보드 게임을 갖추어 놓아서 좋았다. 처음 해보는 좀 우스운 게임이었는데 서로 바보 같은 문제를 틀리고 놀리면서 즐거웠다.
우리가 갔을 때는 타호에 눈이 내린 지 한참이 지났을 때여서 호수 주변에는 눈이 없었지만 마운튼 로즈에는 중턱만 가도 눈이 꽤 많이 쌓여있었다. 눈을 본 아이들은 강아지 같았다. 고등학생 여자아이들이 겉으로는 어른이어도 속은 강아지임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눈 위에 비닐봉지를 깔고 썰매처럼 타다가 나중에는 자동차 발판을 빼서 타고 놀았다. 한참을 놀고 땀으로 흠뻑 젖은 두 아이를 데리고 근처 피자 가게에서 점심을 먹였다. 피자 가게에 들어서자 희미한 대마초 냄새가 났고 사장은 할리데이비슨 아저씨를 연상시켰고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아차 싶었는데 피자가 의외로 맛있었다. 냉동 반죽이 아닌 직접 반죽한 특유의 식감이었고 조미료 소스나 냉동 야채가 아니라 모두 신선한 재료맛이 그대로 느껴졌다. 시계를 보니 두 시 반이었고 음식을 전화로 주문한 사람들이 픽업을 하러 왔는데 대부분 관광객이 아닌 지역주민들로 보이는 차림이었다. 그제야 손님 없는 이유가 이해가 되어 안심이 되었다.
한발 늦은 행선지도 있었다. 테일러크릭(Taylor Creek)이라는 곳은 이 무렵 연어가 알을 낳고 돌아가는 곳으로 겨울잠 자기 전 연어로 포식을 취하러 온 곰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여행 며칠 전만 해도 소셜네트워크에는 개울을 메운 연어 사진이 올라왔다. 그런데 우리가 갔을 때는 개울 곳곳에 곰이 먹고 버린 연어의 잔해와 잔해를 먹으러 온 오리밖에 없었다. 얼어있는 표면 밑으로 갇혀서 상처 없이 배를 드러내고 떠있는 연어도 있었다. 에머럴드 베이(Emerald Bay), 이글펄스(Eagle Falls) 등 유명한 곳들은 차 세우기가 어려워서 아쉽지만 그냥 지나쳤다. 비교적 쉽게 차를 세우고 볼 수 있었던 곳은 스컹크하버(Skunk Harbor)였다. 산에서 호수로 물줄기가 흘러드는 곳은 대개 큰길에서 접근이 어렵고 하이킹을 해서 내려가야 하는데 이곳도 그런 곳이다. 해가 질 무렵에 내려가서 하이킹을 마치지 못할까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하이킹 트레일이 아름다워서 스컹크하버까지 내려가지 못하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다행히 한 30분 정도면 내려갈 수 있는 쉬운 트레일이었고 해 질 녘 하버의 모습은 왕복 1시간이 아깝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해가 떨어지면 올라오기 힘들 것 같아서 잠시 머물렀다가 차를 세운 곳으로 올라오면서 석양을 즐겼다.
해 지는 걸 보고, 해 뜨는 걸 보고, 눈이 내린 걸 보고, 잎을 꿋꿋이 달고 힘차게 솟은 나무와 잎을 떨군 나무 사이를 걷는 시간이 행복했다. 아이들이 강아지처럼 노는 걸 보는 게 행복했다. 고요한 물을 바라보고 근엄하게 몰려오는 물결 소리를 듣는 게 행복했다. 땡스기빙 디너를 먹으며 딸이 물었다.
"What are you thankful for?"
여기 함께 있는 사람들 덕분에 감사해.
이 시간을 함께 누릴 수 있어서 감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