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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벗 May 14. 2024

준비

올여름이면 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한다. 작년 10월부터 원서를 쓰기 시작해서 12월 말에 지원서 넣는 일을 마치고 올해 2월부터 5월까지 지원한 대학에서 입학 결과를 받았다. 학력고사 세대인 나는 딱 대학 하나를 골라서 단 하루의 시험으로 당락이 결정되는 입시를 거쳤기 때문에 미국의 입시를 어쩌면 만만하게 보았다. 시험도 여러 번 볼 수 있고, 공부 이외의 다른 활동도 입시에 영향을 주고, 지원서도 여러 대학에 넣을 수 있고, 아이비 대학이 아니어도 졸업 후 여러 길이 있는데 뭐 그리 문제인가 싶었다.


하지만 막상 겪어보니 한국의 입시지옥과 온도차이가 있을 뿐, 미국 입시도 나름대로 치열했다. 딸은 고등학교 내내 꽤 즐겁고 꽤 열심히 살았는데, 대학입시 문턱 앞에 서니 그 모든 시간이 대학 입시 "준비" 시간으로 변하였고 입시사정관에게 평가받아야 하는 활동이 되어 버렸다. 열정으로 보냈던 시간을 지루하고 지치는 준비라는 조명에서 보는 못마땅한 경험이었다.


과연 모든 것이 준비여야 할까? 이적의 노래 <준비>처럼 준비하다가 인생이 끝나면 어떡하려고. 나도 요즘 그림 그리는 사람의 정체성을 더 가지려고 준비하는 중이어서 이런 두려움이 문득문득 엄습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며칠 전 풀드 포크(Pulled Pork)를 만들다가 다른 생각이 들었다. 풀드 포크는 돼지목살 덩어리를 오랜 시간 익혀서 부드럽게 되면 바비큐 소스와 섞어서 잠깐 가열한 뒤 먹는 요리이다. 돼지고기를 맛있게 삶으려고 더치오븐에 각종 허브 향신재와 과일을 깔았다. 돼지고기를 얹으려다가 보니 냄비에 들어있는 재료가 예뻤다. 누린 내 대신 풍부하고 상큼한 향이 나는 풀드 포크를 만드는 건 아름다운 일이었다. 냄비 바닥에 깔린 양파, 타임, 로스마리, 월계수 잎, 사과, 오렌지가 완성된 요리에서는 보이지 않겠지만 준비가 더 아름다울 수 있는 거구나.


언제까지 준비만 해야 하는가 지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준비여서 더 아름답기도 하단다.

딸에게도, 나에게도 속삭이는 그림을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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