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암이 준 것

암의 특례

by 강점코치 모니카

나는 실패한 자식이다. 엄마가 건강할 때 엄마의 노동을 멈추게 해주고 싶었는데, 엄마가 먼저 암에 걸려버렸다. 기억할 수 있는 나이부터 엄마는 주방일을 했다고 했다. 아주 어릴 때는 아궁이 불을 피워 밥을 지었고, 시집와서는 석유곤로에 밥을 지었고, 식당을 하고는 영업용 가스레인지 앞에서 밥을 지었다. 평생 밥 짓느라 마신 연기는 엄마의 폐에 암덩이를 만들었다.


내 평생소원은 엄마를 호강시켜 주는 것이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좀 더 현실적이 되어, 호강까지는 아니라도 엄마가 식당밥이라도 그만 짓게 해주고 싶었다. 막연히 엄마 환갑 전에는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내 딴엔 아무리 아등바등해봐도 내가 엄마, 아빠까지 먹여 살리게 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최근 몇 년 동안 엄마는 눈에 띄게 식당 일을 힘들어했었다. 엄마의 몸이 더 이상의 노동을 버텨낼 수 없는 상태라는 게 눈에 보였지만 뾰족한 수가 없어 내 마음도 조급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엄마는 암 덕분에 자유로워졌다. 폐암 4기 진단과 동시에 돈 걱정 없이 식당 문을 닫을 수 있게 되었다. 여타 질병이 아닌 '암'이라서 전체 병원비의 5%만 납부하는 '산정특례' 대상자가 되었고, 1,2,3기가 아니라 4기라서 거의 모든 치료를 국민건강보험 급여로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엄마 통장에 이전에 찍혀본 적 없는 액수의 보험금도 입금 되었다. 부모님이 스스로 노후대비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엄마는 온전히 혼자 힘으로 은퇴했다. 엄마의 노동이 돈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암을 만들었고, 그 암이 엄마를 노동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요즘 엄마와 언니는 격일로 만난다. 엄마가 20년 넘게 식당을 하던 집 앞 재래시장에서 장도 같이 본다. 언니는 줄곧 고향에 살았지만 식당 일에 매여있던 엄마는 언니와 일상을 나눌 만큼 가깝게 지내지 못했다. 혹여 언니가 엄마 식당에 방문한다 해도 바쁜 엄마와 말 한마디 나누기 힘들었고 늙은 엄마가 정신없이 일하는 모습을 뻔히 보고 있노라면 무력감만 들었다.


언니는 나에게 요즘 정말 행복하다고 했다. 엄마와 자기가 이렇게 닮은 줄 미처 몰랐다고 했다. 살림하는 방식, 좋아하는 음식, 외향적인 성격, 외모, 피부 특징까지 엄마가 도플갱어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엄마와 함께 채소 장을 넉넉하게 봐와서 장 본 것들을 반씩 나누어 갖고, 반찬 레시피를 공유하고, 시장 앞 커피숍에 들러 지난번에 나누었던 동네 가십의 속편을 이어서 나누는 것이 정말 재미있다고 했다. 전업주부 모녀라면 으레 누릴 법한 이 당연한 일상이 엄마와 언니에게 이제야 허락되었다.


엄마 역시 요즘 정말 행복하다고 했다. 외모 콤플렉스를 갖고 있던 자신과 다르게 여리여리하고 예쁜 딸과 같이 장을 보노라면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고 했다. 가는 가게마다 상인들이 하나같이 돈을 안 받고 물건을 줘서 딸 앞에서 면이 선다고도 했다. 20년 넘게 시장에서 장사하는 동안 인덕은 쌓았구나 싶어서 엄마의 삶이 덜 부끄럽다고 했다. 지척에 사는 큰 딸과 일상을 나누는 재미뿐 아니라, 그동안 일만 하느라 개인 시간이 없었던 엄마는 최근에 몇 십 년간 못 찾아뵈었던 지인과 친척도 찾아뵐 수 있는 여유도 갖게 되었다. 3주마다 맞는 항암주사 덕분에 서울에 사는 작은 딸과 아들도 매 달 한 번씩 보고 있다.


조직검사와 암의 전이 여부 확인을 위한 각종 검사를 받느라 엄마가 서울에 입원해 있던 3주 동안 엄마와 나의 유일한 즐거움은 병원 내 도넛가게에서 카페라테를 테이크아웃해서 병원 곳곳을 탐방하는 일이었다. 허약체 아빠의 간병을 오래 해온 덕분에 엄마는 병원의 각종 부서가 뭐를 하는 곳인지 간판만 보고 척척 설명해 주었다. 간담췌는 간, 담낭, 췌장의 약자라는 것부터, 영상의학과에서 아빠가 엑스레이를 찍었고 채혈센터에서는 아빠가 피를 뽑았다고 했다. 그러다 병원 1층에 자리한 '김수환 추기경 장기이식병원' 센터 간판을 보고 갸우뚱하며 나에게 이곳은 무엇을 하는 곳인지 물었다.


연명치료를 거부 및 안구 기증을 하고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을 기리어, 장기이식 문화 확산에 힘쓰고 실제로 장기기증 신청도 받는 곳이라고 센터 소개 글을 엄마에게 읽어주었다. 내 말을 들은 엄마는 뚜벅뚜벅 센터 안으로 들어갔다.


"니가 장기기증 신청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물어봐라. 나중에 암이 전이돼서 장기는 못 준다 해도 나도 눈은 줄 수 있잖아. 시신도 줄 수 있고. 죽으면 섞어 없어질 몸 아껴서 뭐 해. 학생들 공부하라고 줘야지."


직원 분께 엄마가 장기기증과 시신기증을 원한다고 문의를 하니,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장기기증과 시신기증은 성격이 다르다고 했다.


"둘 중에 하나만 된다꼬? 눈 주고 나서 시신은 대학병원에 주면 안 되는가? 음...... 그러면 장기기증을 하자. 나는 죽어도 내 장기는 딴 사람 몸에서 영원히 살 수 있잖아. 기왕이면 생명을 주는 쪽이 낫지."


이제 자식 다 키웠고, 그다지 삶에 미련도 여한도 없다고 말은 하면서도 엄마도 더 살고 싶나 보다. 남의 몸을 빌어서라도, 장기 중의 일부로서라도 더 살고 싶나 보다. 못 배운 티가 날까 두렵다며 평소에 남들 앞에서 글씨 쓰는 일을 꺼려하는 엄마가 장기기증 신청서에 거침없이 이름 석자를 쓰고 사인을 했다.


퇴원이 결정된 날, 엄마는 퇴원 전에 할 일이 있다고 서둘렀다. 나에게 연명치료 거부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알아보라고 했다.


"나는 몸에 주렁주렁 줄 매달고 기계에 의지해서 살기 싫다. 자식새끼들 고생만 시키고 아무 의미 없는 짓은 애당초에 할 필요가 없다. 산송장이 산소호흡기만 달고 있어 봐라. 자식이 호흡기를 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천년만년 그 상태로 내버려 둘 수도 없고. 나는 너거한테 그런 짐 안 준다. 내가 다 결정하고 선택하고 가는기라."


병동 간호사분께 말씀드렸더니 몇 분 후, 직원 한 분이 태블릿 피씨를 들고 병실을 방문했다. 직원 분은 '사전연명치료의향서'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더불어 엄마가 임종과정에 있을 경우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승압제 투여 등의 치료 목적이 아닌 수명 연장의 목적으로 시행되는 의학적 시술을 받지 않을 것에 동의하는지 거듭 물어본 후 서명을 받아갔다.


몸이 부서져라 일했지만 엄마는 항상 돈에 쫓기는 삶을 살았다. 그 와중에도 엄마는 행여나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 봐 20년 넘게 생명보험을 부었다. 바로 작년에는 간병인 보험까지 들어놓았다. 암 진단비가 입금되자 엄마는 바로 나와 언니에게 천만 원씩을 이체해 주었다. 앞으로 엄마, 아빠 관련해서 쓰는 비용은 다 여기서 충당하라는 것이다. 모자라면 말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항상 대학 친구들이나 회사 동료들의 부모님을 뵐 때면 속으로 우리 부모님과 비교하며 한숨을 쉬었다. 재래시장에서 장사를 한 세월과 비례해서 엄마는 점점 더 우악스러워져 갔고 행동거지도 갈수록 무식하게 변해갔다. 비닐장갑을 끼지 않고 맨 손으로 음식을 하는 것도 싫었고, 포기김치를 손으로 죽죽 찢어 먹는 것도 싫었다. 유난히 쩝쩝거리며 음식을 씹는 습관도 싫었고, 옷장에 옷이 많아도 자신이 편한 옷과 신발이 있으면 그 한 가지만 주구장창 입는 것도 답답했다. 엄마의 주름진 얼굴, 부르튼 손, 굽은 등, 엄마의 모습 그 자체가 우리 집안의 비루한 처지를 단박에 표 내는 게 너무 싫었다.


이제 보니 비루한 건 엄마가 아니라 나였다. 엄마가 숨을 내놓은 대가로 먹고 입고 배우고 자란 주제에 은혜를 모르고, 무식하다고 우악스럽다고 엄마를 부끄러워했다. 그깟 고생한 거 내가 돌려주면 되지 않냐고 큰 소리 뻥뻥 쳐놓고 엄마를 은퇴시켜주지도 못했다. 이제 보니 엄마는 내 주변의 어떤 어른들보다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사람이고 비루는커녕 누구보다 깔끔한 사람이었다.


대학 때부터 고향을 떠난 나는 겨우 명절 때나 친정에 가면서 친정에 머무르는 내내 엄마에게 짜증을 냈다. 말귀를 못 알아듣고 교양 없이 행동하는 엄마의 모습이 거슬렸다. 한편으론 죽어라 일만 하는 엄마의 처지가 너무 안쓰럽고 불쌍한데, 마흔이 넘도록 엄마를 은퇴시켜 줄 능력이 없는 나 자신이 밉고 답답했다. 엄마가 늙어갈수록 내 속의 죄책감도 커졌다. 이런저런 복잡한 감정이 들어 엄마가 말을 걸 때면 말끝에 항상 짜증을 달아 친정에 있는 내내 엄마가 내 눈치를 보게 했다.


"난 항상 너희한테 말 붙이기가 겁이 났는데, 요즘은 너희가 짜증 안 내고 나한테 잘하니 엄만 요즘 정말 행복해."


엄마가 폐암이라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잘해야 한다라는 차원을 넘어, 암 선고를 받고 엄마가 보여준 일련의 행동들은 진심으로 경이로웠다. 세상 어떤 위인보다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무식하고 부끄러운 대상은 나 자신이었다. 엄마의 자식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라는 점이 오히려 엄마에게 미안했다.


엄마가 20년, 30년 건강하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잠자듯 떠났으면 더 좋았을까? 그랬다면 나는 우리 엄마를 다 알지 못하고 엄마와 헤어졌을 것 같다. 다큐멘터리 제목처럼 암이 '앎'을 주었다.


엄마의 암 진단 이후 우리 가족은 모두 더 행복해졌다. 적어도 엄마가 큰 부작용 없이 항암치료를 잘 받고 있는 현재까지는 그렇다. 우리 삼 남매 단톡방은 요즘 엄마 이야기로 가득하다. 전에 없이 쏟아지는 자식들의 관심에 엄마는 외식도 자주 하고 트로트 콘서트도 가고 드라이브도 자주 간다. 언니도 나도 동생도 엄마와 참 좋은 시간을 보냈다며 엄마의 사진을 단톡방에 공유한다.


"니미럴, 몸속에 암만 없다면 얼마나 좋아."


이 좋은 것들을 암이 생기기 전에 누릴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실패한 자식들의 말끝은 항상 욕지기로 흐려진다.


Screenshot_4.pn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더 이상 참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