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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른봄 Jan 09. 2021

화투 칠 줄 아세요?

  아버지는 고스톱을 치지 않으셨다. 두어 달에 한 번씩 집집마다 돌아가며 모임을 할 때마다 아버지의 친구들은 밤늦도록 훌라며 고스톱 판을 벌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늘 곁에서 구경만 하실 뿐 게임에 끼는 법이 없었다. 언젠가 아빠는 왜 같이 안 해? 고스톱이 재미없어?라는 내 물음에 재미있지, 재미있는데 할아버지가 평생 고스톱을 치셔서 아빠는 안치고 싶네 하셨다. 아버지가 생략하신 자세한 내막을 몰랐지만 어린 마음에 화투는 몹쓸 물건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화투를 알려주신 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였다. 두 분은 매일 화투놀이를 하셨는데, 민화투를 치시기도 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갑오 띠기라 불리는 숫자게임도 하셨다. 방학이면 외가에 한참씩 머무르고는 했는데, 우리 집에 없는 화투장을 만질 때면 금기를 깨는 것 같이 불안했지만 두 분이 매일같이 하시는 화투놀이를 배우지 않기는 어려웠다. 민화투보다는 고스톱이, 둘 보다는 셋이서 하는 게 더 재미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어릴 때 배워 그런지, 지금도 트럼프보다는 화투패를 섞는 느낌이 훨씬 좋다. 자주 칠일은 없지만.   


   

  지금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외할머니 혼자 사시기 때문에 할머니의 민화투 상대가 되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더군다나 코로나 때문에 노인정 나들이며 친구 모임을 전혀 할 수 없어 할머니의 화투놀이는 갑오 띠기 하나로 한정되었다. 민화투고 고스톱이고 여럿이 앉아 대거리를 해가며 쳐야 재미있는데, 혼자서 우두커니 갑오 띠기만 반복하고 계실 할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릴 때가 있다. 사실 나는 민화투며 고스톱을 치는 방법만 알지 제대로 칠만한 기술이 없지만 할머니를 만날 때면 일부러 더 말씀드린다. “할머니, 한 판 쳐야죠!” 할머니는 언제나 콜이다. 어린 시절 할머니께 배운 화투가 몇십 년이 지나 효도 아닌 효도하는 방법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화투는 그냥 카드게임의 일종이다. 판돈과 사행성을 빼면 남녀노소 누구나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보드게임일 뿐이다. 그래서 큰 아이가 화투는 도박이라며 경찰이 올 수도 있다고 펄쩍 뛰었을 때, 조용히 일러주었다. 화투는 네가 좋아하는 우노며 원카드 게임이랑 다를 바 없는 카드게임이야. 그 게임에 돈을 걸고 도박을 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거지, 게임 자체에는 문제가 없어. 엄마는 어렸을 때 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께 화투놀이를 배웠지만 도박 같은 거 안 하고 잘 살잖아. 걱정 마.  


    

  둘째는 이제 외할머니의 화투놀이 절친이 되었다. 오랜만에 외할머니 댁을 방문했던 날, 처음 보는 알록달록한 화투장이 신기했는지 둘째는 증조할머니 옆에 딱 붙어 앉았다. 할머니가 갑오 띠기 하는 것을 유심히 보고 있으니 할머니는 둘째에게 방법을 알려주셨다. 갑오 띠기는 화투장 세장의 합이 9,19,29가 되는 경우 화투장을 떼어내면서 운세를 점치는 놀이인데, 각각의 화투장이 상징하는 숫자의 합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할머니의 속도는 혀를 내두를 정도인데, 아들은 할머니 옆에 붙어 앉아 점점 속도를 올려가는 중이다.      



  외할머니와 손녀, 증손주가 함께 화투장을 가지고 노는 장면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그림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어린 시절 할머니께 화투를 배웠고, 화투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좋다. 아흔이 가까우신 할머니와 열 살 남짓한 증손주들이 깔깔대며 함께 할 수 있는 놀이가 하나쯤 있다는 것이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다. 내일도 이른 아침이면, 할머니는 조용히 앉아 갑오 띠기로 하루 운세를 점치고 계실 것이다. 내게 화투는 외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남을 것을 이미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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