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여름날, 여름의 비는 낭만보다는 우악스러운 면이 있다. 특히 한국의 장맛비는 뭐가 그렇게 화가 났을가 싶게 퍼붓고 인정 없이 내린다. 그날도 그랬다. 일요일 밤, 동네의 가게들도 문을 닫고 열린음악회만 시끄럽게 떠드는 그때였다. 무서우리만큼 천둥이 치고 비가 무지막지하게 내렸다. 에어컨이 없어 열어둔 창문 밖으로 빗소리가 크게 들이치는 바람에 틀어둔 티비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걱정인 것은 날이 어두워졌는데 엄마가 안들어 온다. 어디갔지. 엄마는 휴대폰도 없는데.
이 걱정도 혼자만 한다. 아빠는 일요일이면 늘 밖의 약속을 나갔고, 언니도 그랬다. 대학생이지만 되도록이면 일요일에는 엄마와 같이 있으려고, 저녁이라도 같이 먹으려고 나는 집에 있었고 그날도 조금 이른 외출을 했다가 4시쯤 집에 왔다. 여느 때와 같이 혼자 엄마를 걱정하며 집을 지키고 있었다. 걱정이 조금 두려움이 되었을 무렵 내 책상의 첫번째 책상 서랍을 열었을 때, 나는 그 두려움이 현실일 것이라는 믿고 싶지 않지만 선명한 직감을 눈으로 보고 말았다.
하얀 봉투안에 엄마가 조금씩 꼼쳐놓은 돈이 있었다. 무려 40만원. 평소에 아빠몰래 돈을 아껴 나에게 몇만원씩 주던 엄마였다. 그런데 그날의 그 돈은 달랐다. 액수도 컸지만, 받아들이고 싶지 않지만 뭔가 큰일이 일어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흰봉투 속 엄마가 나에게 주는 용돈이었다. 그 사이 술취한 아빠가 들어왔고, 엄마가 없어진 것 같다고 내가 울면서 말했지만, 이미 만취한 아빠는 콧방귀를 끼며 '니네 엄마 어디 절대 안간다. 걱정마라'하며 남의 집 이야기하듯 한다.
불안한 나는 장대처럼 내리는 비와 무서운 천둥소리를 뚫고 가로등도 없는 깜깜한 골목을 지나 엄마가 이따금씩 가던 이웃집 아주머니 댁으로 달려갔다. '엄마 아까 나랑 맥주한잔 마시고 수다 떨다가 갔는데, 한참 됐어'라는 말에 다리에 힘이 풀린다. 여기 말고는 가늠되는 곳도 없는데. 다시 집으로 달려가서 울면서 큰이모에게 전화를 한다. 당연히 거기에 있을리가 없지. 평소같으면 걱정할까봐 하지 않았을 전화도 한다. 집근처에 사는 둘째 고모에게 엄마가 없어진 것 같다고 울면서 전화를 했다.
이건 20년전에 나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잊고 싶지만 잊혀지지 않아 나를 여전히 힘들게 하고 있는 일. 그 일이 있고 10년이 넘게 죄책감에 시달렸고, 원인모를 가슴통증으로 숱한 병원비를 썼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 난 죽을때까지 이 고통에서 벗어나긴 힘들겠구나 라고 포기이자 타협이자 위로를 하려고 한다. 많이 희미해진 줄 알았는데, 어제도 꿈속에서 이 경험과 유사한 광경에서 울다가 잠에서 깼다. 정말 많이 좋아진 줄 알았는데, 많이 희미해진 줄 알았는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것 같은 새벽의 그 캄캄한 적막.
내 잘못이 아니야.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하고 싶지만
그럼 엄마는 왜 사라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