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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졸리 May 21. 2024

빠른 년생의 유년시절

나는 항상 한 살 더 많은 사람처럼 보여야 했다.

몇 살이세요? 

⎯ 아 저는 99년생이에요. 근데 빠른...


1999년이 시작되고 아홉 번째 날로 넘어가는 새벽 12시. 엄마와 아빠의 첫 자식인 나는 서울의 모 산부인과에서 힘찬 울음과 함께 세상 밖으로 나왔다. 단 9일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빠른 년생의 운명이 주어질 거란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어떻게 해서든 '1998년'이라는 마감기한에 맞추어 태어나기 위해, 열흘만 더 일찍 엄마 배 밖으로 나오기 위해 발버둥쳤을지도 모른다.


나의 본격적인 '빠른 년생' 라이프는 네 살부터 시작되었다. 초등학교를 조기입학시키기 위해 우리 엄마는 나를 어린이집부터 조기입학시켰다. 보통 어린이집은 5세부터 다니고, 6-7세에는 유치원에 다닌 뒤, 여덟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게 정석이다. 그러나 나는 네 살 때 어린이집 5살 반을, 다섯 살 때 유치원 6살 반을, 여섯 살 때 유치원 7세 반을 들어갔고, 일곱 살 때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생물학적 또래보다 훌륭하고 야무지게 크길 바랐던 엄마의 큰 그림이었던 셈이다. 항상 같은 반 아이들보다 한 살 어리다는 사실을 숨기고 섞여야 했던 나는, 살아남기 위해 '야무짐', 혹은 '열등감에서 우러난 발버둥'이라는 속성을 체득해갔다.


내가 '빠른년생'으로 이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언제부터 인지하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내 추측으로는 초등학교 입학 전 엄마가 나에게 "너는 이제 98년에 태어난 친구들이랑 같이 학교에 다니게 될 거야. 얌전하고 야무지게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이랑도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라고 일러주었거나, 영문도 모른 채 학교에 입학했다가 내 생년월일을 듣고 한 친구가 "야, 너 우리보다 한 살 어리잖아. 언니, 오빠라고 불러 봐."라는 웃기지도 않은 장난을 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세상은 '빠른년생'과 '그렇지 않은 친구들'로 은연 중에 나뉜다는 분위기를 서서히 읽게 되었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빠른년생이라고 해서 따돌림을 당하거나 용납하지 못할 정도의 놀림을 받았던 기억은 다행히 없다. '언니 오빠라고 해보'라는 장난 빼곤 아무도 나에게 뭐라 하지 않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빠른 년생'이라는 정체성은 욕심많고 자립심 강한 나의 기질과 엮여서 자연스레 내면화되어 갔다.


아, 지금 이 글을 쓰며 어렴풋이 떠오르는 한 장면이 있다. '초등학교 조기입학 통지서' 같은 서류가 집으로 날아온 적이 있었다. (그게 정확히 통지서였는지, 조기입학 대상자들이 초등학교 입학신청을 하기 위해 동사무소에 내야 하는 서류였는지는 모르겠다) 엄마 말에 의하면 또래들보다 빨리 한글을 뗐던 나는 그 종이를 읽으며 엄마에게 "엄마, 이거 뭐야?"라고 물었었다. 엄마는 그 때 나를 앉혀놓고 조기입학이란 무엇인지, 내가 왜 조기입학을 해야 하는 건지 설명해주었다. 그 때 우리 엄마가 나에게 "이건 조금 늦게 태어났는데 똑똑한 애들이 학교에 빨리 가서 친구들이랑 같이 수업 들으라고 하는거야. 학교에 빨리 가는 만큼 더 똑똑해지고 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어." 라고 얘기해주었던 것 같다. 


그 이후 유년 시절 동안, '똑부러져야 해'. '야무져야 해'라는 주위의 기대는 나를 움직이는 가장 큰 동력이 되었다. 또래보다 한글도, 가위질도, 종이접기도 빨리 뗐고, 2차 성징도 빨라 월경도, 브래지어 착용도 빨리 시작한 나는, 시력도 일찍 나빠졌고, 남들보다 조숙하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그렇게 거의 모든 생애주기적 통과의례를 빠르게, 일찍 쳐내던 나는, '역시 우리 딸은 참 야무져. 참 빨라'라는 엄마의 칭찬인지 압박일지 모를 반응에 힘입어 '자의식 과잉'의 유년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친구가 나에게 '야, 너 우리보다 한 살 어리잖아. 언니, 오빠라고 불러 봐'라고 장난으로라도 한마디 하면, 지기 싫어서 절대 '언니, 오빠'라 안 하고, 눈을 부릅뜨며 시퍼런 눈초리를 갈기기 일쑤였다. 유치원 때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는데, 같은 반 친구들과 선생님이 다같이 캐리비안베이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딸이 라커룸에서 혼자 씻게 될 것을 우려한 엄마는 딸에게 한 달 전부터내게 혼자 씻는 훈련을 시켜주었다. 그러나 정작 견학 당일, 캐리비안베이 사우나에서 선생님들이 돌아가며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씻겨주고 있는 것 아닌가. 차례대로 선생님의 손에 의해 씻겨 나가는 아이들을 보며, 내 차례가 다가오기 전에 혼자 샤워를 마치는 게 나의 비밀스런 미션이 되었다. '혼자서도 잘 해요'를 사방팔방, 동네방네 알려야 직성이 풀렸던 것 같다. 그렇게 선생님이 나에게 비누거품을 잔뜩 묻힌 샤워볼을 들고 다가왔을 때, "아니에요!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집에서 배웠어요!"라고 소리치던 그 장면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 이후로 내가 배운 '혼자 씻기 스킬'은 초등학교 1학년 때 다니던 수영장 라커룸에서도 발휘되었다. 남자 선생님께 개인 강습을 받게 되었는데, 수영장까지 그 선생님 차로 이동하느라 부모님이 동행하지 않으셨다. 엄마는 걱정했지만 나는, "나 혼자 할 수 있어!"라고 소리치며 일주일에 세 번, 사우나와 수영장 라커룸에서 혼자 씻고, 수영복을 갈아입고, 수영 끝나면 또 다시 혼자 씻고, 파우더룸에서 아줌마들 사이에 섞여 혼자 머리를 말리고, 면봉으로 귀까지 파고, 어른들 쓰는 로션을 얼굴에 촵촵 바르기 일쑤였다. 허구한 날 반에서 키번호 3번 안에 들 정도로 키도 작았던 여덟 살 꼬마를 지켜보던 동네 아줌마들은 늘상, "어머, 너 몇 살이니? 어쩜 애가 이렇게 똑부러지고 야물딱지니~"라고 물으셨고, 나는 그 때마다 얼굴에 흐뭇한 표정을 띠운 채 "저 여덟 살이에요."라고 여유있고 새침하게 대답하곤 했다. 어른들에게 '야무지다', '성숙하다', '언니같다' 라는 말을 듣는 것은 나에게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훈장과도 같았다. 


커가면서 왜 그리도 어려보이지 않는 것, 만만해보이지 않는 것에 집착을 했는지 모르겠다. 사회적 나이로 스물 일곱이 되어 버린 지금의 나는, 작년부터 도입된 '만 나이' 제도에 매우 흡족해 하며, 어디 가서 "만으로 (아직) 스물 다섯살이에요!"를 외치고 다니기 바쁘다. '더 늙어 보이고 싶다'는 나이에 대한 왜곡된 강박은 나이가 어느정도 먹어가며 자연스레 치유되었지만, 그 때 형성된 '남들보다 뛰어나야 한다'라는 강박은 아직도 나를 따라다니며 스스로를 괴롭게 만든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선생님들과 부모님의 인정을 갈구했고, 운이 좋게도 그게 먹혀 들어갔다. 최근 심리상담을 받으며 내가 가진 방어기제 중 '특이성(eccentric)'과 '우월성(narcissistic)'이 높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서야 빠른 년생으로서 꿀리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던 어린시절의 나(inner child)에게 가장 중요한 말을 해주기 시작했다. '특별하지 않아도 돼', '남들보다 못나도 돼', 그리고 '실패해도 괜찮아'라고.





매거진 '삶사이트 26년산'

틈만 나면 깨닫고, 틈만 나면 감동받는 20대 애 어른. 고작 26년 살았을 뿐이지만 평생 지금처럼 삶의 가장 깊은 곳까지 흠뻑 느끼며 살고 싶어 글을 씁니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인사이트를 정교한 언어로 정리해내며 묘한 희열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 매거진에서는 조금은 두서없지만 저와 가장 닮아있는 글, 어쩌면 당신과도 닮았을지 모를 이야기들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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