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어때!>
[그림책항해_작은위로] 표지부터 강렬한 불편함이 몰려온다. 콧수염부터 목에 맨 뭉텅이 리본은 또 뭐란 말인가. 반쯤 감긴 눈과 역삼각형 입은 쩍 벌어졌다. 두 손은 '어쩌라고?' 하는 느낌이라 매우 불량하다. 맞다. 그래서 매우 불편한 감정을 부른다. 첫 만남부터 이렇게 불편한 감정을 일으키다니! 다음 장 넘기기가 망설여진다. 그런데 책장을 넘길 수밖에 없다. 미치도록 궁금하다. 아저씨가 저지를 일들이!
불...불편하다. 이름도 적당 씨라니.
알람은 오전 11시에 울렸다. 지각 확정. 그런데 저 느릿느릿한 행동은 뭐란 말인가. 기왕 늦었으니 아침은 제대로 먹어야 한단다. 또 목에 맨 건 알고 보니 넥타이였다. 목에 매어 있기는 하니 그것도 대충 지나간다. 버스에 올라타고서도 신문을 읽는 여유로움은 보통의 정서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어떻게 하나도 급하지 않다는 말인가.
적당 씨는 정거장을 지나쳤다. 회사는 점점 멀어지기만 하는데 내릴 생각은커녕 창 밖을 보며 평소와 다른 풍경을 즐긴다. 눈까지 감고서 말이다. 이토록 여유로운 표정을 마주하고는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아니, 제정신인 거야?' '회사는? 뒷감당은?' '혹시 부자인가?' 그림책 속 상황을 현실에 가져와 해석하기 시작했다.
부지런한 편은 아니지만, 적당 씨는 나와 대척점에 서 있는 캐릭터다. 내 세계에는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올라왔을 때, 아이가 생각났다. 적당 씨처럼 하루의 루틴이 깨진 상황 앞에서 나는 아이에게 왕왕 짜증을 냈다.
개수대에는 설거지가 가득 들어찼고, 좁은 집은 물건들로 가득 차 빈 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환경이었고, 집안 모든 물건은 내 몸이 움직이지 않으면 부동의 자세를 취했다. 아이를 화장실로 몰고 나의 의식은 베란다 빨래통으로 향했으며 출근 후 처리해야 할 일들과 늦지 않게 아이를 픽업해 돌아와 빨래를 몇 번 돌릴 수 있는지 타임라인을 계산하느라 바빴다.
그때
"엄마아, 있잖아..."
늘어지는 부름이라도 있으면
"아~ 왜! 빨리빨리 좀 움직여! 세수는 제대로 했어? 이는 닦았어? 로션은 발랐니?"
질문인지 짜증인지 모를 말 덩어리들을 내뱉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 이런 일은 매우 빈번하게 펼쳐졌다. 왜? 적당 씨 같은 여유는 없었던 걸까. 눈을 떴는데 늦은 아침의 서막이 펼쳐졌다면 이미 벌어진 상황이고 짜증이나 화를 내 봐야 기분만 상할 뿐이다. 아이에게 종종 이미 벌어진 일을 두고 짜증 내지 말라며 훈계했으면서 정작 부모로서 보인 모습은 조급하고 분주한 모델뿐이었다. 적당 씨가 불편했던 이유는 대척점에 서서 내 모습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만들어서다. 한편으로는 그 여유로운 삶의 태도가 부러워 시기심의 시선이 섞여있었다.
아이와 <뭐 어때?>를 다시 읽었다.
혼자 볼 때는 분명 너무도 불편했던 모든 장면에 아이는 "뭐야? 뭐야? 어떻게 저래?"라 말하며 크게 웃었다. 웃음에 섞인 즐거움이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래 우리 입장에서는 이해가지 않는데, 이건 화나거나 답답할 일이 아니라 우스운 거지? 아이야, 너의 삶도 엄마와 다르지 않나 봐. 엄마는 어쩌지? 넌 고작 9살인데...'
아이의 삶을 팍팍하게 만든 모든 순간을 주워 담고 싶었다. '나도 처음 살아보는 인생이라 서툰 것뿐이야.'라며 자조하고 위로하기에 부모라는 자리는 너무도 커다랗다. 우리는 부모로서 남달라야 한다. 그것이 부담이어서는 아니 된다. 숨 쉬듯 당연해야 하고 최고가 아니라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살아내야 한다. 아이들은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오늘을 사는 부모를 보고 성장하니까.
아이는 단 한 번 그림책을 읽어 놓고는 모든 페이지를 기억했다가 저녁 늦게 만난 아빠에게 들려주었다. 그러고는 종종 자신의 실수에 "뭐 어때?"라며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작은 실수나 실패에 다른 아이들보다 큰 좌절감을 느끼는 아이는 그림책 한 권으로 다른 표현을 배웠다.
글작가 사토 신과 그림작가 돌리에게 큰 감사와 기쁜 소식을 전한다. 두 분이 내 아이의 정서 한 귀퉁이에 지분을 가졌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