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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화과나무 Jun 07. 2021

오래전 명왕성

난 열두 번째별이 좋더라.


 

  “저기요!”

  컴퓨터 학원 수업을 마치고 바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오는 길이었다. 놀라서 쳐다봤더니 계단 모퉁이 구석에 서 있던 그는 컴퓨터 반에서 같이 수업을 듣는 남학생이다. 뭔가 물어볼 것이 있나 싶어 다음 말을 기다리던 나에게 그는 말없이 서류 봉투 같은 것을 내밀었다.  

 



  사회 초년생 때의 일이다. 회사에서 갑자기 사내 시스템 관련 업무를 맡게 되었다. 이전 업무와는 전혀 다른 일이기도 했고 컴퓨터에 대해서는 초보였기 때문에,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느라 한 달 동안 컴퓨터 학원을 다닌 적이 있었다. 그 학원은 대부분 대학생들이나 젊은 청년들로 가득했다. 난 회사 업무 중 배려해준 시간을 이용해서 학원을 다니는 처지라서 매일 일정이 빠듯했다. 수업 시작하는 시간에 겨우 맞춰 학원에 도착했고, 마치자마자 쏜살같이 회사로 들어가야 했다. 그러다 보니 한 교실에 있는 수강생들을 눈여겨볼 새도 없었다. 그러던 중 마지막 수업 일이 되었는데 그날도 역시 수업을 마치는 동시에 문밖을 빠져나오고 있을 때 누군가 계단 복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불렀던 것이다.

 

  서 있던 사람은 얼굴만 겨우 알고 있었을 뿐 이름도 잘 모르는 이였다. 어리둥절한 나는 그 봉투를 받아 들고 집에서 풀어보았는데, 거기에는 나를 ‘명왕성’이라고 부르기로 했다는 인사말로 시작되는 긴 편지 한 통과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너무 뜻밖의 일이었지만,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한 달을 지켜보면서 이 편지를 써 내려갔을 그 마음에 당황스러움과 고마움이 함께 뒤섞였다. 더구나 이메일이나 기타 통신기기로 소식을 주고받는 것이 익숙해서 그런지 손편지라는 것 자체가 왠지 설렘을 느끼게 해 주었다.

 


 

 ‘명왕성’. 학창 시절에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을 반복하며 태양계 행성들을 달달 외우던 기억 말고는 나와 전혀 상관없었던, 그저 아홉 번째 행성에 불과했던 명왕성이란 별은, 그때부터 수많은 별들 중에서 마치 알고 지내왔던 친구처럼 가깝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2006년, 하루해가 정신없이 뜨고 지던 바쁜 워킹 맘이던 어느 날, 뉴스에 이런 기사가 떴다. “명왕성이 태양계의 마지막 지위를 잃었다.” 그 기사를 보는 순간 잊혔던 옛 기억이 떠오르며 명왕성이 태양계 행성에서 그저 이름 없는 왜소 행성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에 괜히 서운해졌다. 그리고 뭔가 내 별 하나를 잃어버렸다는 아쉬움이 생겨 우주와 태양계 관련 정보를 꽤 열심히 찾아봤던 기억이 난다. 당시 과학자들의 관찰 결과, 명왕성과 같은 궤도를 도는 행성 중에서 명왕성과 비슷하거나 심지어 더 많은 질량을 가진 행성도 발견되어, 명왕성이 행성으로서 부적합하다고 결정이 내려졌던 것이다.

 

  교과서에 나오는 중요한 별인 줄 알았던 명왕성이 어느 순간 무명의 왜소 행성이 되어버렸듯이, 삶을 살아가다 보면 중요했던 일이 사소한 일이 되기도 하고, 격했던 감정도 거짓말처럼 사라지거나 변해간다. 가끔 첫사랑을 못 잊는다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대상을 좋아하는 감정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 감정은 이미 변한 지 오래고, 그들이 그리워하는 것은 첫사랑의 순수하고 소중한 감정을 가졌던 그때가 아닐까?

 

  난 편지를 받은 이후 그와 연락을 해본 적도 없고 지금 그 사람의 모습이 전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마 그 사람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명왕성이라고 불러줬던, 불렸던 그때의 설레는 기억들은 아련한 빛깔로 서로에게 남아 있지 않을까?

 



  최근에 세계적인 케이 팝 그룹인 방탄소년단의 노래들을 듣다가 왠지 끌리는 노래 하나가 있어서 찾아봤더니 그 제목이 특이하게도 숫자만으로 되어 있는 ‘134340’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난 다시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134340’은 오래전 명왕성이 왜소 행성이 되면서 그 별에 붙여진 번호였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명왕성’이란 글을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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