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그분들을 찾습니다. (Feat. 파친코)
얼마 전 부모님을 모시고 남동생 부부와 용인 천주교 공원묘지를 찾았다. 할머니 묘지에 검은 새 흙이 덮이는 것을 보고 나서 거의 20년 만의 일이다. 결혼한 손녀가 친조부모의 묘지를 찾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은 일이었나 보다.
오월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는 날, 할아버지 할머니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나란히 누워 계셨다. 어린 시절 서로 멀리 살아서 자주 뵙지를 못한 탓인 지 나는 그분들을 만나는 일이 늘 어색했고, 겨우 "안녕하세요." 하면 "왔니?" 하는 데면데면한 인사말 한두 마디가 대화의 전부였던 거 같다.
특히 할아버지는 큰소리 한번 내시는 법 없이 온화하셨으나 참으로 과묵하신 분이었다. 어릴 적 나는 그저 그분들은 조부모일 뿐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별다른 관심도 없었다.
이번에 새삼스레 묘비에 적힌 조부모님 성함과 생년과 망년의 숫자들을 하나하나 읽어 보며 할아버지가 1910년에 태어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일합방의 해다.
그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과 한국 근대사를 한 몸으로 겪었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할아버지는 여덟 살 차이 나는 할머니와 일본에서 결혼을 하셨다고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떻게 만나게 되셨어요? "
이제야 그들의 삶에 궁금증이 생긴 중년의 딸의 뜬금없는 질문에 아버지가 대답하셨다.
"두 분 다 십 대 후반에 제주에서 일본으로 가셨는데, 오사카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만나셨다. 그리고 일본에서 누님과 나를 낳으셨지."
우리나라 많은 지역이 그랬겠지만 일제 강점기의 제주는 끼니를 잇고 살아내는 일이 삶의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십 대 이십 대 젊은이들 중에서 밭농사나 물질(바다에서 해산물을 따는 일)에 희망을 버린 이들은 돈벌이가 된다는 일본으로 건너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나의 조부모 역시 그런 대열에 합류한 사람들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내가 십 대의 나이에 부모를 떠나 외국에 일자리를 찾아가려는 결정을 할 수 있었을까?
조부모는 일본에서 십몇 년을 살다가 해방이 되자 귀국을 택했다고 한다. 물론 해방이 되어도 일본에 잔류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은 지금의 재일교포 1세가 되었다.
고국을 떠나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원래는 팔레스타인을 떠난 유대민족에서 유래하였지만 지금은 신앙적, 경제적, 정치적인 이유로 조국을 떠나 살아가는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일컫는다.
예전에도 이런 디아스포라의 삶을 다룬 영화나 문학 작품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한국인 디아스포라들의 얘기인 <미나리>나 <파친코>등의 작품들이 자주 회자되고 있는 듯하다.
요즘 세상에는 교육이나 직업을 이유로 해외로 나가거나 외국에서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는 일들이 어떤 면에서는 부러움을 불러일으키지만, 평생 어느 쪽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이방인으로서 산다는 것이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닐 것이다.
각종 국제영화상을 휩쓴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에서는 한 한국인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한 후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만들기 위한 힘겨운 적응기를 실감 나게 잘 표현하고 있어서 호평을 받고 있다.
영화 제목이기도 한 미나리는 이민자들의 투쟁 같은 삶처럼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나는 강한 생명력을 상징하고 있다.
비슷한 맥락의 이민진 작가의 베스트셀러인 <파친코>는 일제강점기에 갖가지 이유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의 3대에 걸친 삶을 그린 소설이다. 식민지 사람이라서 푸대접을 받으며 살아가지만 꿋꿋하게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들을 담담하고도 흥미롭게 그려내고 있다.
‘파친코’는 일본의 대중 오락 게임사업 중 하나를 일컫는 말이며, 도박, 탈세, 폭력 등 위법적인 일과 연관되는 일이 많아서 일반적인 시민들이 택하는 사업은 아니지만, 일본의 주류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당시의 한국인들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지금도 재일동포라고 하면 ‘파친코’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특히 소설 <파친코>에는 일본에 건너간 다양한 한국인들의 모습들이 그려져 있어서, 읽는 중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조부모님의 모습이 오버랩되곤 했다.
한번 떠나본 사람들이 다시 떠날 줄도 아는 법인지, 조부모님은 귀향해서도 그대로 눌러앉지 않았고, 몇 년 후 대대로 고향이던 제주를 떠나 다시 서울로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상경하셨다고 한다.
낯익은 친족도 지인들도 없던 곳이었지만 두 분은 사업을 시작했고 새로운 동네에서 터줏대감이 되도록 사시면서 한 가족을 이루셨다. 그리고 먼 훗날 자손들은 용인 묘지에서 쉬고 계시는 그분들을 만나러 가게 되었던 것이다.
조부모님의 무덤가에서 아버지로부터 그분들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듣게 되니 가슴속 어딘가 뭉클해짐과 동시에, '그 분들이 살아 계셨을 때 직접 들을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솟아났다.
그분들은 이국에서 혹는 타향에서 수많은 역경들과 부딪혔을 것이고, 그때마다 미나리처럼 억세게 이겨 내셨을 것이다. 아마도 그렇게 가슴속 깊이 간직한 얘기들을 미처 다 표현할 수가 없어서 그토록 말씀을 아끼셨던 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