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안부를 가슴에 묻는 날
"내가 니 새끼냐?"
엄마에게 잔소리 하는 딸에게 엄마는 이렇게 일갈한다. 방송작가 박애희는 <엄마에게 안부를 묻는 밤> 책에서 돌아가신 엄마가 뱉은 '뼈 아픈 당신의 한마디'라 했다. 이어지는 엄마와의 대사는 한 달 전 우리집을 재연하는 듯했다.
"알았어. 앞으로 너한테 무슨 말을 하나 봐라.
정 떨어졌어. 딸도 다 소용없어
내가 죽어야지, 내가 빨리 죽어야지
- 엄마에게 안부를 묻는 밤, 153p ~ 155p -
토시 하나 안 틀리고 우리 엄마가 한 말과 똑같아 하이파이브는커녕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말았다. 한 달 전 나를 폭발하게 한 건 '죽어야지'였다. 내 새끼한테 만큼은 어미가 아파 자식 맘 아프게 하는 일은 없어야겠다는 게 생활신조였는데 내가 아파 들어 앉으니 자존심도 상하고 나름 속상하던 터였다.
엄마가 집에서 나를 낳을 때 둘 다 죽을 뻔 한 걸 내가 죽을 힘을 다했다고, 낳지 않으려던 아이였다는 말도 그동안 농담으로 받아쳤는데 그때 난 사자가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토록 자존감 낮게 태어났지!" 내 마음 속 엄마 대사는 '안 나았음 어쩔, 태어나서 행복하다'였다. 사십 평생 부리지 못한 생떼를 그날 탈탈 털어 부렸던 게다.
엄마는 손주가 학교 갈 때마다 총알같이 현관문 밖으로 튀어 나가 엘리베이터를 미리 눌러놓고 기다렸다. 그런 엄마에게 스스로 시간관리 하도록 놔두라고 했었다(엄마 몸 좀 편히 계시라 했다). 그런 내가 매일 아침마다 엘리베이터걸이 되고 있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춤 추는 하루 돼~"라며 엘리베이터 문이 입을 꾹 다물 때까지 문 틈 사이로 춤을 추고 있다. 아, 엄마는 이런 맛이었구나.
뼈와 연골이 닳고 닳은 엄마. 온갖 염증이 득실대는 엄마. 아토피에 척추협착, 디스크탈출증에 고관절 연골과 치아 잇몸까지 닳은 내게 "어디 닮을 게 없어 이런 걸 다 닮냐"는 엄마. '너 만큼은 아픈 데 없이 행복하게 살았으면'임을 이젠 안다. 헌데 엄마가 더 한 모진 말도 마구마구 내뿜었으면 좋겠다. 너무 잘해주면 막상 떨어졌을 때 그 감상에 젖어 안쓰러움만 더 할 테니까. 앞으로 스트레스까지 얹어 고춧가루 팍팍 쳐 주시길 바란다.
내 새끼는 그제 새벽엔 목구멍이 잔뜩 부어, 어제 새벽엔 몸살 기운으로 잠을 설쳤다. "밖에서 영양 제대로 먹고 다니는 거야?" 엄마가 내게 하던 레퍼토리가 내 입에서 툭 튀어 나왔다. 날 바라보는 엄마 속은 내가 널 바라보는 속이었겠구나. 아픈 아이에게 뭐가 제일 먹고 싶냐 하니 팥죽이란다. 본죽은 비싸 <초록마을>에서 파는 팥죽을 데워 주었다. 엄마가 손주를 키우며 자랑스럽고 뿌듯해 하는 건 바로 식성이다.
"영인이는 이 할미, 나 닮아 참 토속적이여~"
하긴 생후 4개월부터 된장 맛에 환장 된장 한 아이였으니. 엄마에게도 단팥죽을 드렸다. 역시나. "먹던 단팥죽 중 이렇게나 맛있는 건 처음"이라며 엄청 맛있다는 얘길 오늘 아침 다섯 번이나 했다.
올해 위암 검진 대상자라는 문자가 하도 날라와 좀 전에 위장내시경을 받았다. 엄마는 수능시험 때도 하지 않던 말을 나와 내 새끼 앞에서 두 손 모아 했다.
"부디, 꼭 좋은 결과 있기를!!!"
"엄마, 작년 검진 때 귀찮아 빼 먹은 거 받으라고 연락 온 거니 우리 오늘 저녁에 죽여주는 팥죽으로 죽도록 먹어 보자~ 콜!!!!"
* 닳고 닳은 연골로 대회를 연속해 나가는 엄마, 자랑스럽고 최고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