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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인 Nov 11. 2022

조금 늦어도 괜찮아

어느 날, 뭔가 섬찟한 느낌에 누워 있다가 얼른 휴대폰 액정을 두 번 두드렸다. 휴대폰은 분홍색 바탕의 배경화면 위에 뚜렷한 흰색 숫자를 띄워주었다. 오전 11시 55분. 아, 12시 수업이 시작되기 5분 전이었다. '망했다.'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고 다음에 든 생각은 역시 '망했군...' 


우리 집에서 학교까지는 버스로 넉넉잡아 20분 정도 걸리기에 최소한 11시 40분에는 버스를 타야 했다. 하지만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고 나름 반듯한 모습으로 학교에 가서 앉아 있으려면 (내가 여러 번의 실험을 통해 알아낸 결과) 최소 11시 20분에는 일어나야 했다. 그래서 분명 10시 20분에 알람을 맞춰 놨지만 늘 11시 20분에는 일어났는데... 요즘 들어 몸에 힘이 없고 자도 눈이 피곤하고 따끈한 전기장판의 품에서 벗어나고 싶지가 않다. 여름에서 가을로 계절이 넘어가서 그런가? 해가 일찍 저무는 계절, 파란 하늘을 보고 싶었지만 막상 집 밖으로 나섰을 때 까만 먹물빛 하늘이 날 기다리고 있을 때 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까만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다 다시 집으로 들어간 적도 있다.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는 변화를 쉽게 알아차리는 사람인가 보다. 


어쩌면 새로 바꾼 항불안제 때문일지도 모른다. 약 2주 전에 기존에 먹던 항불안제 약을 다른 항불안제 약으로 바꿨는데 그 약 때문에 하루 종일 피곤한지도 모른다. 그래, 어쩌면 이렇게 이상할 정도로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든 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면 또 슬퍼진다. 물론 2주 후에 병원에 가서 불안 약을 다시 바꿔달라고 하면 해결될 문제지만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내 통제 밖에 있다는 생각에 어쩐지 슬퍼지고 불안해진다. 


아무튼 난 11시 55분에 일어난 날 학교에 가지 않았다. 처음으로 자체 휴강을 했다. 최근 내 몸 상태를 본다면 언젠가 한 번은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 어렴풋하게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로 학교에 가지 않는다니! 친구에게 자체 휴강한다고 문자로 말해놓고 침대에 누워 있는데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가 학교에 안 가도 되나?' '교수님께는 뭐라고 말씀드리지?' '오늘 수업 못 들은 부분 나중에 듣는 게 더 귀찮지 않나?' '늦어도 좋으니 지금이라도 학교에 갈까?' 쿵. 쿵. 쿵. 심장이 뛰는 소리에 맞춰 새로운 생각이 하나씩 나타났다. '하지만 이미 교수님이 출석을 다 불렀을 테고, 지금 간다고 해도 앞부분은 못 들었는데...' 수많은 가능성을 생각하다 보니 머리가 터질 것 같았고 나는 그냥 자기로 했다. 자면 적어도 생각을 안 할 수는 있다. 


문제는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필 그날은 팀플 수업이 있는 날이어서, 그 수업도 자체 휴강해버린 나는 팀플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침대에서 왼쪽으로 돌아누웠다 오른쪽으로 돌아누웠다를 반복했다. 머릿속에서 커다란 추가 왔다 갔다 움직이며 내 머리 전체를 울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결국 잠을 설치고 피곤한 눈으로 4시간 여를 누워있다 일어났다. 학교를 안 갔다는 불안한 마음에 (사실은 나 학교 못 갔을 만큼 힘들었다는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오늘 학교 못 갔어."


'어~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예상외로 담담한 반응) 왜 못 갔는데?'


"너무 피곤해서 아침에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어. 근데 학교 못 가니까 이상하게 죄책감이 들고 그래."


'그래서 전화했구나. 불안하면 늦게라도 학교 가지.'


"그게... 그러기가 싫었어."


'그럼 다음에는 늦어도 학교를 가봐. 이것저것 다양하게 시도해 보는 거지. 그러면서 네가 덜 불안한 쪽을 찾는 거야.'


"알겠어. (사실 모르겠지만 일단 알겠다고 했다. 이 때는 피곤해 죽겠는데 학교를 가라니 뭔 소린가 싶었다.)"



엄마랑 전화할 때는 이게 뭔 소린가 싶었던 것들이 며칠 후 '아하!' 하는 순간으로 내게 도착했다. 그러니까 나는 또 완벽주의의 함정에 걸려들었던 것이다. 내 머릿속 선택지에는 학교를 가거나 or 가지 않거나 둘 밖에 없었다. 늦게라도 학교를 간다? 이건 이미 시작부터 완벽하지 않은 일이다. 늦었으니까. 


하지만 또 학교에 늦게라도 못 갈 건 뭐냐라는 생각도 들었다. 학교에서의 나의 목표는 '성적 잘 받기'가 아니고 '출석하기'가 아니었는가? 그럼 늦게라도 출석을 하러 가면 되는데... 이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그래도 다음번에 지각할 것 같을 때 지각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 자체가 내가 많이 발전했다는 거겠지. 작년의 내 모습과 올해의 내 모습을 비교(싫어하지만 이럴 땐 어쩔 수 없이 비교를 하게 된다.)해본다면 구체적으로 얼마나 발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나아지고 있는 것 같다. 


'hope'. 희망. 내 휴대폰 뒤에도 붙여놓은 스티커가 너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이때까지 내가 한 노력이 헛된 노력이 아니었다고. 생각의 방향을 바꾸려 꾸준히 노력하고 결과가 바로 보이진 않아도 언젠간 나아지겠지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가려 노력했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 그럼에도 지금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은 그 모든 힘든 순간들을 지나왔기 때문일 테지. 나는 강한 사람이다. 나조차도 가끔 믿기 어렵지만 나는 부정할 수 없이 강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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