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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인 Mar 17. 2024

You are my sunshine

너는 내 선샤인이야


    9월부터 시작되는 추위 전, 모처럼 햇빛이 따뜻한 8월의 어느 날이었다. 미국 유타주에 교환학생으로 온 지 1주일 째. 평소엔 텅 비어 있는 캠퍼스 잔디밭이 백 개가 넘는 동아리 부스들로 빽빽하게 차 있었다. 무료 팝콘을 먹고 배드민턴부에 가입 신청까지 완료했으니 오늘 목표는 달성한 셈인데, 이대로 기숙사로 돌아가기는 아쉬웠다. 괜히 이곳저곳 부스 사이를 기웃거리는데 한 부스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게 보였다. 호기심은 두 발을 그 부스 앞으로 데려갔고, 내 눈 앞에 펼쳐진 건 온통 초록빛이었다. 식물 동아리였다. 


   룰렛을 돌려서 ‘plant(식물)’가 나오면 테이블에 놓인 식물 가운데 하나를 데려갈 수 있다고 했다. 내 차례가 되어 룰렛은 힘차게 돌아갔고 바늘 끝이 가리킨 곳엔 ‘스티커'가 적혀있었다. 안타깝다는 표정을 본 건지, 한 사람이 내게 다가와 ‘Do you wanna trade?(네 거랑 내 거랑 교환할래?)’라고 물었다. 그 사람의 한 손엔 연둣빛 잎을 가진 손바닥만한 식물 하나가 놓여 있었다. 자신은 집에 화분이 많다고 그래서 스티커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의 눈빛은 주저앉아 있는 시기를 보내던 내게 건네는 손바닥 같았다. 


    그 식물의 이름은 ‘sunshine foliage’, 한국어로는 ‘천사의 눈물' 혹은 ‘병아리 눈물'이라고 불렸다. 잎 하나하나는 새끼손톱보다 작았고, 그래서 눈물이라는 이름이 어울렸지만 나는 그 아이에게 ‘선샤인'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햇빛이 눈부신 날 데려와서 그런가, 눈물보다는 빛나는 것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외롭던 마음이 이 자그만 식물을 보며 실시간으로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비어있던 공간이 따스한 바람으로 채워지며 부푸는 느낌. 선샤인이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의 내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9월부터 찬바람과 함께 본격적인 수업과 과제가 불어왔다. 오늘 뭘할까 고민하는 날들이 줄어들었다. 늘 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책상 앞에 앉아 할 일을 하다 가끔씩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곤 했는데, 그러면 시야 한 구석에 선샤인이 보였다. 커다란 창문 앞 창틀에 놓인 선샤인은 바람이 세게 불면 날아갈 것 같았다. 같이 산 지 한달이 다 되어갔지만, 크기는 처음 만났을 때 그대로였고 잎의 끝부분이 노랗게 변해가고 있었다. 오늘 할 일만 다 하면 뭐가 문제인지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 날 할 일을 모두 끝내고 침대에 누울 때까지 선샤인이 아픈 이유를 찾아볼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어느 날은 마음을 먹고 아마존에서 식물용 LED 램프와 가습기를 샀다. 산림학을 공부하는 친구에게 물어보니 빛과 습기가 부족해서 시들해질수도 있다고 했다. 친구는 한국어로 된 ‘천사의 눈물 키우는 법' 링크를 여러 개나 보내줬다. 고마웠지만 귀찮은 마음에 읽어보진 않았다. 기숙사에 있을 때면 가습기를 틀어놓고 그 앞에다 선샤인을 놔뒀다. LED 램프는 오히려 수분을 뺏어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서랍 한구석에 넣어놨다. 그렇게 또 몇 주가 흐르고 선샤인의 노란 잎은 원래 노란잎이었던 듯 소리 없이 숨쉬고 있었다. 


    짧은 방학 기간 동안 선샤인을 기숙사에 있는 친구에게 맡겨두고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다시 돌아온 날, 마음이 돌 든 주머니처럼 축 늘어지는 걸 보고 한 생명을 돌보는 책임감이 무거웠다는 걸 깨달았다. 못 본 사이 선샤인은 생생해져 있었다. 친구는 선샤인이 빛이 부족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3,4일동안 선샤인을 본 친구가 나보다 선샤인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았다. 그날부터 LED 조명을 다시 틀어주기 시작했다. 조명 아래 빛을 받고 있는 선샤인은 드디어 만족스러워보였다. 6시간 단위의 조명 빛이 켜졌다, 꺼졌다, 다시 켜졌다. 꼭 가로등이 점멸하는 것 같았다. 이별의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기숙사에서 짐을 빼기 전날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선샤인을 데려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믿을 만한 친구에게 선샤인을 맡기고 떠나기로 했다. 선샤인과 함께하는 마지막날 밤이 왔다. 며칠 전에 상한 부분을 잘라내는 미용을 해서 선샤인은 여전히 처음 데려올 때 모습처럼 조그맸다. 두 손으로 화분을 감싸안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화분이 따뜻한 것 같았다. 물 주는 법을 몰라 헤매던 시간, 선샤인에게 흰색 곰팡이 같은 게 생겨서 당황스러웠던 때, 다시 초록잎이 나기 시작한 날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서서히 떠올랐다 연기처럼 흩어졌다. 문득 울고 싶어졌다. 교환학생 시기를 견디는 내내 선샤인은 내 곁에 있었다. 내 모든 시간들에 스며들어 있어서 역설적이게도 그 존재가 잘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의지했던 순간들, 혼자라고 생각하며 울고 있었을 때조차 내 우는 소리를 듣는 존재가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살리고 있었을까. 선샤인이 생각을 할 수 있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음 날, 친구의 집에 선샤인을 데려다주고 왔다. 마지막 사진을 여러 장 찍고, 잘 지내라고 고마웠다고 말했다. 뒤돌아 나가는데 자꾸만 눈에 밟혔다. 계속 돌아보다가 선샤인이 보이지 않게 되자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지난 3개월동안 나와 선샤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마음이 이렇게 요동치는 걸까. 하나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지만 굳이 풀고 싶지 않았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따스한 기운을 마음에 조각한 채 알 수 없는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는 세상에 대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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