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환상을 가진 적이 있었다. 내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은 일렬로 늘어선 색색깔의 캐비닛 안에 사건별로 잘 정리되어 있을 거라고. 구분하고 분류하는 일은 중요했다. 아무런 가치가 없어 보이는 기억들이라도 언젠가 찾아올 성장을 위한 이면지라 생각하면 아쉬움 없이 기억을 놓아줄 수 있었다. 언젠가 내가 살고 싶은 삶을 만나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그러니 분류의 목적은 어떤 특정한 결과였고, 매일매일 보고 듣고 겪은 것을 부지런히 정리하며 동시에 그 모든 것들을 잊어버렸다. 각이 진 알맞은 캐비닛들을 뒤로한 채 손을 툭툭 털고 나오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오늘치의 할 일을 끝냈으니 이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후회되는 일을 곱씹으며 불안해할 필요도 없다(그럴 필요가 없다 해서 그 일이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누군가의 따뜻한 미소, 안아주는 손길, 편안한 표정 같은 좋았던 순간도 캐비닛의 방에만 들어가면 납작하게 눌린 채 빛을 잃었다. 그곳에서 중요한 건 기억에게 부여된 이름표뿐이었고, 기억의 내용보단 그 기억이 어느 칸에 들어갈 것인가가 더 중요했다. 다시는 들여다보지 않을 캐비닛들이 높이 쌓여만 갔다.
이런 내 습관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좀 강박적인가?라는 생각은 들기도 했지만, 태어나 평생 같은 직업만 가진 사람이 그 직업의 일밖에 모르듯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 자체가 들지 않았다. 가끔 혼란스러울 때는 있었다. 새로운 경험을 했는데 이 기억을 어디에 넣어야 할지 모르는 경우. 이건 ‘과거의 행복했던 추억’일까 ‘행복한 줄 알았으나 뒤돌아 보니 다시 겪을 수 없는 아련한 추억’일까? 만약 내가 독자로서 이 글을 읽고 있었다면 진저리 쳤을 것 같다. 이 사람 왜 이래? 뭐 이렇게까지 생각해?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들을 예측하려 한다. 과거의 기억에 내가 추측한 미래를 당겨와 고무줄로 묶어 놓으면 좀 더 안정적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어쩌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이 하나는 있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인지도 모른다. 가끔 내 삶은 사람보다 앞서 뛰며 보채는 강아지 같으니까.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데 쌩쌩한 내 강아지는 줄을 잡아당기며 더 먼 곳으로 달려가기를 원하니까.
나의 캐비닛 방이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한 건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계속 변하는 상태에 있을 거라는 걸 깨달은 후이다. 그게 시간이 하는 일이었다.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지금 생각과 10분 후 생각이 달라졌다. 보존제라도 뿌린 듯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캐비닛 속 기억들이 시시각각 변하는 나의 생각을 따라 뭉개지고 겹쳐지고 튀어 오르고 날아다녔다. 캐비닛은 쓸모가 없어졌다. 기억들은 움직이며 흔적을 남겼다. 빨강, 주황, 초록, 파랑, 분홍, 여러 색의 물웅덩이가 서로 다른 크기와 모습으로 서로 다른 농도로 바닥에 고여 있었다. 색웅덩이는 서로 섞여 경계가 흐릿했다. 커다란 팔레트 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오늘 좋아했던 초록색은 내일이 되면 싫어졌다. 하지만 완전히 싫어지지는 않았다. 초록색에 섞여 있는 다른 색깔 덕분에 초록은 완전한 초록이 아니었고 어떤 색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그 색깔을 마음에서 아예 몰아내버리지는 않을 수 있었다. 지금은 의미를 모르겠는데 생기는 일들. 어쩌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들. 생생히 살아 있는 나의 생각과 감정들. 방부제를 쳐야 할까.
변화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요즘이다. 자연스러운 움직임. 뜨고 지는 해,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온도, 밀려왔다 사라지는 파도, 어느새 피어난 꽃들. 이들 속에선 나의 변화도 한 걸음 한 걸음 같이 따라가 볼 수 있을 것 같다. 모호한 경계를 가만히 놔둔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