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의 숙명
유럽여행은 최소 1달 전에는 비행기표를 확정 짓고요, 최소 2주 전까진 숙박이나 입장권 등 제반 준비를 모두 마칩니다.(성수기엔 최소 3달 전이 추천)
임박해서 세팅하긴 했지만 저 역시 대충 그렇게 계획을 마쳤고요.
이제 비행기 뜨는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본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지사장님. 다음 주에 신임사장님하고 해외법인장/지사장 화상회의가 잡혔습니다. 첫 업무보고이니만큼 꼭 참석해주셔야 합니다."
"왓더? 아니, 나 그 주에 통째로 전지휴가 신청해 놔서, 그땐 유럽에 있을 건데요? 경영팀장이 대신 참석하면 안 될까요?"
"아... 첫 보고자리인데 그럼 영 이미지가.... 인터넷 화상회의인데 지사장님이 얼굴 비춰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이동 중이라면 인터넷 환경을 장담할 수가 없을 텐데요. 그럼 회의시간이....?"
"한국시간 오후 2시 입니다. 사전 접속은 오후 1시부터 열리구요."
"그럼, 런던에선 새벽 6시 되겠군요. 숙소에 있을법한 시간이니 가능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지사장님.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상세 접속주소는 이따 공유드리겠습니다."
휴가 취소 안 된 게 어디래요.
그나저나 휴가 때 신경 엄청 쓰이게 생겼네요.
1. 가뜩이나 줄이고 줄여 배낭짐 쌀 건데, 회의 참가용 셔츠+정장을 가져가? 그냥 캐주얼로 양해구하고 대충 드가?
2. 화상회의 접속은 랩탑PC? 리스크가 좀 있지만 그냥 스마트폰?
3. 경영진 참석 회의라면 회의자료만 한가득일 텐데, 그거 들고 다녀? 아님 전자파일링?
뭘 어떻게 해도 답이 안 나옵니다.
대충 내린 솔루션은
1. 여행에 그거 잠깐 쓴다고 정장 슈트는 무리. 대충 캐주얼 남방에 넥타이만 매는 걸로. 정장 상의는 바람막이를 깃만 잘 접어다가 실루엣만 정장처럼 보이게 코스프레!
2. 리스크 좀 있지만 스마트폰으로 접속 강행! 앵글은 어떻게든 현지 가서 맞추면 되지 뭐. 1g 무게절감이 아쉬운 배낭여행에 무슨 랩탑PC를 챙겨가누.
3. 회의자료 일체는 전자파일화 해서 폰에 담아놓고, 그걸로 보는 걸로. 아 잠깐, 스마트폰으로 접속해야 하잖아? - 돈워리. 누나 같이 갈 거니까 누나 폰 잠시만 빌려 쓰면 되지 뭘.
그리하야 대망의 그날,
여전히 시차 적응 안 돼서 비몽사몽 정신없는 새벽 5시에... 본사의 초청 콜이 왔고, 숙소 와이파이를 통해서 무사히 화상회의장 접속에 성공합니다.
여행 중인 게 들키면 곤란하니까 가상배경을 깔고, 정장 비스무리하게 코스프레해서 접속하니 아주 자세히 보지 않은 담에야 대충 그럴싸했고요, 앵글이 안 나와서 고생 좀 했으나 숙소에 있는 토스트기에 책 올리고 피클 병 기대서 적당히 맞춰보니 이 또한 그럴싸했답니다.
순번대로 발표하고 질문 주고받고 강평 듣고 화기애애 마무리 끝.
무탈하게 이번 경영진 화상회의도 종료되었어요. 휴우.
문제는... 이 날이 세인트 제임시즈 공원 산책하고 근위병 교대식 보러 갔다가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 관람하고 주변에 있는 광장인 레스터 스퀘어(Leicester Square)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마켓 탐방하고 배고파서 피시 앤 칩스 맛집에 가서 저녁 먹고 난 후에 트라팔가 광장 산책했다가 His Majesty's Theatre에 가서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 뮤지컬 보러 갔던 날이라서...
결국 오페라의 유령 뮤지컬은 반도 못 보고 비몽사몽 졸다 나왔음.

그래도 드문드문 기억에는 매우 재밌는 뮤지컬이었다는 ㅋㅋㅋ.
다음엔 안 졸고 봐야죠. ('다음'이 온다는 전제하에... 그래도 보고 온 게 어디냐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