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ole of science is to foresee. It extracts and retains from the material world that which can be repeated and calculated, and consequently that which is not in a state of flow."
- pp.10-11 -
"To metaphysics, then, we assign a limited object, principally spirit, and a special method, mainly intuition. In doing this we make a clear distinction between metaphysics and science. But at the same time we attribute an equal value to both. I believe that they can both touch the bottom of reality. I reject the arguments advanced by philosophers, and accepted by scholars, on the relativity of knowledge and the impossibility of attaining the absolute."
- p.41 -
베르크손에 따르면, 과학과 형이상학은 서로 우열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 다루고 있는 영역과 그 방법론이 다르다고 한다. 쉽게 말해서 과학에는 지성의 영역을 할당하고, 형이상학에는 직관의 영역을 할당한다고 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즉 실증과학은 물질에 대한 감각적 관찰에 호소하는 지성의 작업물이라 할 수 있다. 후자의 경우, 즉 형이상학은 지성만으로는 결코 파악할 수 없는 정신을 직관을 통해 직접 인식하려는 작업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형이상학과 과학 모두 실재의 밑바닥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고, 지식은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먼저 실증과학에 할당된 지성은 진화 과정에서 물질을 이해하고 파악하도록 맞추어져 있는 능력이다. 물질은 과학자의 눈에 점점 더 수학적 관계로 해소되고, 지성의 본질적인 능력은 기하학에 적용될 때에만 절대적으로 정확하게 기능한다. 지성은 특히 인간에게 있어서 발달된 형태로 진화를 했다.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사례로 17세기에 인류가 과학혁명에 접어들면서 이전보다 차원이 다를 정도로 자연을 예측하고, 설명하며, 제어할 수 있게 된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를 통해 지성에 바탕을 둔 실증과학은 생존에 편리함을 제공한다는 그 맡은 바 목적에 충실하게 기능하게 되어 인류의 번영을 누리게 해주었다.
"If the intellect has been made in order to utilize matter, its structure has no doubt been modelled upon that of matter."
- p.42 -
"finally, I believed I had found pure, unadulterated inner continuity (duration), continuity which was neither unity nor multiplicity, and which did not fit into any of our categories of thought (cadres). That positive science had not been concerned with this duration was, I thought, quite natural: its function after all is to compose a world for us in which we can, for the convenience of action, ignore the effects of time."
- p.11 -
그런데 지성은 생물을 다룰 때에도 물질을 다룰 때처럼 대한다. 이제 지성이 생명의 연구에 다가갈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살아 있는 것을 죽어서 정지된 것처럼 취급하며, 이 새로운 영역에 물질을 탐구할 때 너무도 잘 성공했던 것과 동일한 습관들을 옮겨 놓는다. 철학은 그런 실용적인 고려를 버리고 생명을 봐야 한다. 생물학이나 심리학적 사실들을 실증과학에 맡겨버리면 곤란하다. 그러면 모든 것이 물질의 논리에 따라 취급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환원주의의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 그 유혹은 정신의 표면까지만 사용된 실증과학의 성공적인 절차를 정신의 가장 깊은 곳까지 적용하는 것이다. 이 유혹에 굴복하면 결국 마음의 물리학과 몸의 물리학이 함께 형이상학을 구성하게 된다. 그러나 이 형이상학은 마음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부정확하고 피상적인 지적 결과를 낳게 된다. 자연적 사물과 인간적 사물 사이의 외견적 유사성에 속게 내버려두지 말자. 그러한 접근은 결국 파탄을 맞게 되어 과학의 단일성을 절대로 세운 형이상학적 독단은 진정한 실재를 놓치게 된다. 즉, 외견적인 악순환을 피하려다 모든 경험을 과학에 맡기고 모든 실재를 순수 오성에 맡김으로써 형이상학은 선험적으로 놓고 출발한 단일성을 좇게 되는 진정한 악순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To sum it all up, what is wanted is a difference in method between metaphysics and science: I do not acknowledge a difference in value between the two."
- p.48 -
결국 이와 같은 이원론적 구도는 『The Creative Mind: An Introduction to Metaphysics』 서문 첫 구절에 쓰인 다음 구절과 관련된다. “철학에 가장 결여되었던 것은 정확성이다. (What philosophy has lacked most of all is precision.)” 이와 더불어서 "시간이 있고 그것은 공간적인 것이 아니다"(j’ai dit que le temps était réel, et qu’il n’était pas de l’espace)라고 요약할 수 있는 그의 철학적 견해와도 관련된다. 한편으로는 지성이 기반이 되는 실증과학이 공간적 사유를 담당함으로써 물질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직관이 기반이 되는 형이상학은 그동안 잊고 지내온 진정한 시간과 관련된 사유를 담당함으로써 직관을 통해 우리의 내적 지속(internal duration)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이원론적인 분담을 통해서 그동안 철학에 결여되었던 정확성을 한층 더 회복해나갈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