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권 모든 것을 제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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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시민 전체'가 행복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소크라테스 선생님!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면, 선생님께서는 뭬라 변명하시겠습니까? '선생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그다지 행복한 사람들로 만들고 있지 않으시거니와, 이는 이들 자신에 기인하는 것이어서, 정작 나라는 이들의 것이면서도, 이들이 나라에서 좋은 일로 혜택을 입는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
419a
"내 생각으로는 같은 식으로 진행하다 보면, 해야 할 말들을 우리가 찾게 될 것 같으이. 우리는 이렇게 말할 테니까. '설사 이들이 이러하고서도 가장 행복하다고 할지라도, 이는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우리가 이 나라를 수립함에 있어서 유념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어느 한 집단(ethnos)이 특히 행복하게 되도록 하는 게 아니라, 시민 전체가 최대한으로 행복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건 우리가 그런 나라에서 올바름(올바른 상태, 정의: dikaiosynē)을 가장 잘 찾아 볼 수 있는 반면 가장 나쁘게 경영되는 나라에서는 올바르지 못함(올바르지 못한 상태, 불의: adikia)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며, 일단 이것들을 보게 되면, 우리가 오래 전부터 추구해 오던 것에 대한 판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일세.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고 있듯, 지금 우리가 행복한 나라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소수의 사람들을 따로 분리해 내서 이들을 이 나라에서 행복한 사람들이게끔 함으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온 나라를 행복하게끔 함으로써 하는 것이네."
420b-c
지난 3권은 수호자들이 행복한 특권적인 생활을 누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공동 주거에서 평생토록 통제된 공동 생활을 살아가야 한다는 내용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이번 4권은 그러한 정책에 대해 아데이만토스가 지적함으로써 시작한다. 한 국가의 요직이라고 할 수 있는 수호자들로 선발된 사람들이 이렇게나 자유를 빼앗긴 삶을 살아가게 되면 결코 행복한 삶을 누린다고 볼 수 없다는 지적이다. 이 대목은 그 누가 보기에도 꽤 타당해보인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여기에 대해 반박을 한다. 국가의 수립 목적이 원래 무엇인지를 다시 떠올려보라는 것이다. 국가는 어느 한 집단이 특히 행복하게 되도록 하는 게 아니라, 시민 전체가 최대한으로 행복할 수 있기 위해서 수립된다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어느 정도 그럴 듯한 주장이다. 하지만 그 말을 자세히 살펴보자. '시민 전체'가 최대한으로 행복해져야 한다고? 여기서 '시민 전체'가 가리키는 바가 정확히 무엇일까? 다시 한번 이야기하자면, 나는 그리스어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서 이에 대한 정확한 논의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정황상 두 가지의 경우가 떠오른다. 첫째, 최대 다수의 시민이 최대한의 행복을 누리도록 하는 경우다. 즉, 공리주의적인 관점에서 '시민 전체'가 최대한으로 행복해진다는 이야기를 해석한 경우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플라톤은 소수의 수호자들의 자유를 어느 정도 박탈하더라도 절대 다수의 시민들이 행복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가를 옹호했다고 볼 수 있다. 전체주의적인 정치체제로 흘러갈 수도 있는 위험성이 높은 사고방식이다. 과연 플라톤이 그렇게 생각했을까? 잘 모르겠다. 짐작컨대 이에 대한 선행 연구가 있을 것 같긴 하다.
둘째로 떠오르는 것은 '시민 전체'가 시민들 사이의 관계나 공동체를 의미하는 경우다. 예를 들어, 시민들끼리 모여 형성된 '대한민국'이나 '미국'과 같은 국가, '인천'이나 '서울'과 같은 도시 공동체 등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런데 이러한 경우에서는 '시민 전체'가 최대한으로 행복해진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불분명하다. 가령 "대한민국이 행복해진다"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분명히 이 문장은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가진 살아 움직이는 실체가 있어서 웃고 즐기며 행복해질 수 있다는 의미를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민들 사이의 관계나 관련 정치 시스템이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안정적으로 질서가 잘 잡혀있다는 뜻일까? 플라톤은 국가에 대해서도 조화롭고도 균형잡힌 질서를 굉장히 강조했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은 나름 설득력이 있는 듯하다. 그런데 이런 것이 '시민 전체'가 행복해지는 것이라면, 개별적인 삶을 살아가는 '진짜' 시민들의 행복은 어디로 가는가? 질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에만 신경을 쓰다가 정작 진짜 시민들의 행복은 놓칠 수도 있다. 애초에 훌륭한 질서라는 것은 개별적인 시민들 하나하나가 잘 살아가기 위해 기획된 것이기 때문에 본말전도가 일어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고방식 역시 전체주의적인 정치체제로 흘러갈 수 있는 위험이 크다. 정말로 플라톤이 적어도 위 두 경우 중 하나를 떠올렸는지에 대해서는 나도 확답을 할 수는 없다. 잘 아시는 분들께서는 언제든지 좋은 의견을 남겨주면 새겨듣도록 하겠다.
1. 모든 것을 제자리에: 국가의 삼분법
"그러니 여보게나, 이것이, 즉 '제 일을 하는 것'(to ta hautou prattein)이 어떤 식으로 실현되는 게 '올바른 상태'(올바름)인 것 같으이."
433b
"사실 '올바름'이 그런 어떤 것이긴 한 것 같으이. 하지만 그것은 외적인 자기 일의 수행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내적인 자기 일의 수행, 즉 참된 자기 자신 그리고 참된 자신의 일과 관련된 것일세. 자기 안에 있는 각각의 것이 남의 일을 하는 일이 없도록, 또한 혼의 각 부류가 서로를 참견하는 일도 없도록 하는 반면, 참된 의미에서 자신의 것인 것들을 잘 조절하고 스스로 자신을 지배하며 통솔하고 또한 자기 자신과 화목함으로써, 이들 세 부분을, 마치 영락없는 음계의 세 음정(horos) 즉 최저음(neatē)과 최고음(hypatē) 그리고 중간음(mesē)처럼, 전체적으로 조화시키네. 또한 혹시 이들 사이의 것들로서 다른 어떤 것들이 있게라도 되면, 이들마저도 모두 함께 결합시켜서는, 여럿인 상태에서 벗어나 완전히 하나인 절제 있고 조화된 사람으로 되네. 이렇게 되고서야 그는 행동을 하네."
440c-d
"그렇다면 이와는 달리 '올바르지 못함'은 이들 세 부분간의 일종의 내분(stasis)이며, 참견(polypragmosynē)과 간섭(allotriopragmosynē), 그리고 혼 전체에 대한 어떤 일부의 모반(epanastasis)임에 틀림없지 않겠는가? 이는 자신이 지배함에는 적합지 아니하되, 오히려 지배할 부류의 것인 것에 복종하는 것이 그 성향상 어울릴, 그러한 것이 혼에 있어서 지배하려 드는 것일 테고. 이런 등속의 것들이, 그리고 이들 세 부분의 혼란과 방황이 올바르지 못함이며 무절제요, 비겁이며 무지라고, 요컨대 일체의 '나쁨'(나쁜 상태, 악덕: kakia)이라고 우리가 주장할 것으로 나는 생각하네."
444b
플라톤은 국가의 구성원들이 '제 일을 하는 것'(to ta hautou prattein)이 어떤 식으로 실현되는 것이 올바름이라고 주장했다. 즉,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상태가 정의로운 상태라는 주장이다. 그 '모든 것'은 크게 지혜, 용기, 절제와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플라톤은 국가에도 지혜, 용기, 절제를 찾아볼 수 있음을 확인하고, 먼저 이것들 각각이 특히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나 집단에서 차자볼 수 있는 것인지 탐구한다. 국가가 지혜로울 수 있는 것은 소수의 통치자들의 지혜에 의해서, 용기있는 나라로 되는 것은 넓은 의미의 수호자들이 두려워할 것들과 두려워하지 않을 것들에 대해 소신(판단: doxa)을 언제나 보전케 해주는 능력을 통해 가능하다. 반면에 절제는 다스리는 자들과 다스림을 받는 자들이 서로 '한마음 한뜻'(한마음: homonoia)을 가지고 있을 때 국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절제는 다스리는 자들과 다스림을 받는 자들 모두에게 존재해야 하며, 그러한 의미에서 일종의 화성(harmonia)이나 협화음을 닮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절제에 대해서 자세히 생각해보면 흥미로운 점들이 많이 보인다. 플라톤에 따르면, 절제란 '자기 자신을 이긴다'는 표현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인간 자신 안에는 한결 나은 것과 한결 못한 것이 있어서, 성향상 한결 나은 부분(면)이 한결 못한 부분을 제압할 경우, 이를 가리켜 '자기 자신을 이긴다'고 말하"(431a)는 것이다. 국가에 대해서도 "어떤 것에 있어서 한결 나은 부분이 한결 못한 부분을 지배할 경우 이를 가리켜 절제있고 자기 자신을 이기는 자"(431b)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표현에는 인간의 혼을 적어도 두 부분 이상으로 나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무의식 구조의 사상적 기원은 어쩌면 플라톤에 있을 수도 있다.
2. 모든 것을 제자리에: 영혼의 삼분법
"그렇다면 '올바름'의 개념(형상) 자체의 관점에서는 올바른 사람은 올바른 나라와 아무런 차이도 없고, 닮은 것일 걸세."
435b
"그렇다면 여보게나, 개인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이와 똑같은 종류들을 자신의 혼 안에 지니고 있어서, 나라에 있어서의 그것들과 똑같은 처지로 인해서 나라의 경우와 똑같은 이름들로 불릴 자격이 당연히 있다고 우리는 판단할 걸세."
435b-c
플라톤은 이와 같은 '국가의 삼분법' 논의를 '영혼의 삼분법'에도 그대로 적용하고자 한다. "'올바름'의 개념(형상) 자체의 관점에서는 올바른 사람은 올바른 나라와 아무런 차이도 없고, 닮은 것일"(435b)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적용과정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그래서 나름의 섬세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모순율'에 대한 다음과 같은 논의다.
"동일한 것이 동일한 부분에 있어서 그리고 동일한 것에 대해서 상반된 것들(tanantia)을 동시에 행하거나 겪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건 분명하이. 따라서 이것들에서 이게 사실로서 드러나는 것을 확인하게라도 된다면 그것들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여럿인 것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될 걸세."
436b-c
위 구절은 서양 철학사를 통해 발견되는 모순율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중요성이 높다. 게다가 이러한 모순율은 철학이나 여타 학문들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전제라는 점에서 플라톤의 학문적 기여도 크다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이러한 모순율을 활용해서 인간의 혼이 하나의 자아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증명하려 한다. 예를 들어, "목말라하면서도 마시려고는 하지 않는 사람들"(439c)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그들의 혼 안에는 마시도록 시키는 것이 있는가 하면, 마시는 걸 막는 것이, 즉 그러도록 시키는 것과는 다르면서 이를 제압하는 게"(439c)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동일한 것이 자신이 동일한 부분에 의해서, 동일한 것과 관련해서, 동시에 상반되는 행위를 하지는 못한다고" 앞서 모순률에 대해 언급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의들을 기반으로 인간의 혼에도 이성, 기개, 욕구가 있다는 점을 증명한다. 과연 그렇게 인간 심리에 대해 명확하게 구분하는 방식이 정당할까? 이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심리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논란이 많다. 그러나 플라톤의 '영혼의 삼분법'과 같은 논의는 이후에 다양한 학문들에 크고 작은 영향을 많이 끼쳤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살펴볼만하다. 지금으로 치면 이 논의의 피인용지수가 어마어마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일단 아까도 언급했다시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도 사상적 기원이 될 수도 있다. 현재 유행하는 MBTI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칼 융의 분석심리학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융의 분석심리학은 인간의 집단무의식에 있는 원형들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적절한 '자기(Self)'를 확보하는 것에 큰 중요성을 두기 때문이다. 이는 플라톤의 "모든 것을 제자리에" 사상과 거의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현대 심리철학에서도 자유의지와 관련해서 크게 빚지고 있는 내용들도 있다. 특히 해리 프랑크푸르트의 자유의지 논제나 고차적 태도에 관한 개념들이 그러하다. (Frankfurt, H. G., 1988. ‘Freedom of the Will and the Concept of a Person,’ in his The Importance of What We Care Abou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1-25. (First published in 1971, Journal of Philosophy 68: 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