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이지만 피겨는 하고 싶어
누군가 그랬다. 덕질의 끝은 직접 해보는 거라고.
처음에 진지하게 아이스 스케이트를 고민했던 건 작년이었다. 웬만한 피겨와 쇼트트랙 경기들은 다 챙겨볼 정도로 해당 종목들을 즐겨 보던 내가 직접 해볼 생각을 한 건 사실 그리 얼마 되지 않았다. 제대로 배운 적은 없지만 어렸을 때 아이스 링크에 가면 곧잘 타기도 하고, 선생님이나 주변에서 잘 탄다고 했던 기억들이 생각나면서 심사숙고 해봤지만... 이미 20대 끝자락의 나이와 유연성과 근력이라고는 없는 내 말랑말랑한 몸뚱아리로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도전은 흐지부지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올해 들어서 자꾸만 생각이 났다.
최근 한국에서 열린 쇼트트랙 세계선수권에 직관을 하러 간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 같은데, 직관이 처음이었던 나는 사실 그 현장감이 너무 너무 너무 좋았다. 여러가지 감정과 생각이 들었는데, 그중 하나는 '나도 그냥 빙판 위에서 달려보고 싶다 or 돌아다니고 싶다' 였던 것.
그래서 세계선수권 마지막날 모든 경기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한 것은 가까운 링크 홈페이지에 들어가 정규 강습을 알아보는 일이었다. 여기서부터 두 가지 고민이 들었는데, 하나는 '쇼트트랙을 탈 것이냐, 피겨를 탈 것이냐'였고 나머지 하나는 정규 강습은 전부 내가 근무하는 시간과 겹쳐서 듣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물론 새벽 6시 수업이 있긴 했으나, 이 수업은 쇼트트랙만 있었고 해당 시간대는 스케이트화 대여가 어려워서 구입을 해야하는데 그러면 더더욱 신중하게 종목을 선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일주일간 고민의 시간이 계속됐다. 선수들의 경기들, 좋아하던 경기들을 보다가 여러 일반인 분들이 해당 운동들을 하는 것을 열심히 찾아봤다. 그래서 왜 피겨로 결정을 하게 되었냐 하면, 계속 상체를 숙여서 타야하는 쇼트트랙이 개인적으로는 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 뿐만은 아니고, 워낙 평소에도 자세가 안 좋아서 꼿꼿하게 서 있는 운동이 나에게는 조금 더 도움이 될 것 같다는 판단도 있었다. 피겨로 결정을 하고 나서는, 바로 링크에 전화를 해서 정규 강습 외에 소규모로 진행하는 강습을 문의했다. 직원 분은 나에 대한 몇 가지 메모를 하고 담당 코치님이 배정이 되면 해당 코치님이 연락을 줄 것이라 안내해주셨다. 오, 근데 나는 정말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할 때, '서른'이라고 말하는 것이 괜히 묘하긴 했다.
보통 2-3일 정도 걸린다고 했는데, 바로 다음날 오전에 코치님께 전화가 왔다. 4월부터 시작해서 주 2회를 희망한다고 말씀드리긴 했지만, 차주에 선생님과 내 스케줄을 보고 정확한 강습 시간은 정하기로 했다. 4월 강습까지 2주도 안 남은 시점에서 미리 스케이트화를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피겨화를 구매할 수 있는 곳들을 또 이리저리 알아보기 시작했다.
#0. 3월 23일 금요일, 인생 첫 피겨화 GET!
서울 아월코, 군포 스포텍 중에 매우 고민하다가 스포텍이 실측과 착화를 해보는 데에 더 좋을 것 같다는 판단 하에 거리는 좀 있지만 스포텍에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마침 금요일 회의가 저녁 6시여서 오후에 운전해서 급하게 다녀왔다. 다행히 내가 갔을 때는 대기가 없어서 가자마자 바로 앉아서 사이즈를 잴 수 있었다. 직원 분이 생각보다 내 발이 커서 놀라셨다. 보통 양쪽 발 길이 차이가 있기도 하던데, 나는 양발 동일하게 237mm으로 잭슨 6 size 정도라고 말씀해주셨다. (사실 잭슨 기준 6 size는 정확하게 239mm지만, 이 정도면 잘 맞는 편이라고!)
참고로 보통 피겨 입문화로는 잭슨, 리스포츠, 에디아 이렇게 세 브랜드에 대표적인 모델들이 있는데 스포텍에서는 잭슨과 에디아 위주로 보유하고 계신 듯 했다. (특히 스포텍은 에디아, 아월코는 리스포츠를 주로 취급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발사이즈를 잰 후, 직원 분께서 잭슨 1790을 먼저 가져와주셨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발을 넣어보는데, 웬걸 생각보다 잘 맞았다. 잭슨이 발볼이 좀 있는 사람들은 신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발볼이 넓지 않은 편이라 무사히(?) 신어볼 수 있었다. 엄지가 앞코에 좀 닿는 느낌 제외하고는 복숭아뼈나 다른 쪽에 불편함도 전혀 없어서 직원 분께서도 이걸로 하는 것이 좋다고 말씀 주셨다. 왜냐하면 잭슨 1790이 에디아 웨이브보다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다. 선수화도 아니고 입문화이기 때문에, 발만 괜찮으면 가성비를 선택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직원 분의 말씀을 듣고 잠시 생각하다 '그래도 에디아 한 번 신어는 보자!' 해서 웨이브 착화를 부탁드렸다. 에디아랑 잭슨은 사이즈 표기가 좀 다른데(보통 에디아는 잭슨에서 한 사이즈 더 크게 한 표기라고 들었다), 내 발에 딱 맞는 에디아 사이즈는 없어서 한 사이즈 아래로 신어보게 됐다. 안 들어갈 줄 알았는데, 꽉 맞게 들어가서 그때부터 또 고민이 시작됐다. 왼발은 잭슨, 오른발은 에디아로 고민의 늪에 빠져있을 때 나를 구출해주신 직원 분! 둘 다 착화감이 비슷한 거면 이때는 가성비를 따르는 것이 현명하다면서! 근데 나도 그말에 매우 동의했다. 좀 더 비싼 스케이트화는 다음에 부츠를 바꿔야할 때 데려오는 것으로 기약했다. 에디아가 좀 더 가벼운 느낌이긴 했는데, 잭슨이 좀 더 발목이 좀 높아서 안정감 있게 느껴졌고 사실 개인적으로 잭슨 디자인이 더 예쁘기도 했다.
결정을 하고 나서는 양쪽을 다 신어보고 불편한 지점을 말씀 드리면 프레스를 해주신다. 일종의 성형 작업이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나는 다른 쪽은 크게 불편하지 않았고 칼발이라 그런지 엄지가 유독 앞에 잘 닿는 느낌이 들어서 그 부분을 말씀드렸다. 프레스 후, 신어보니 차이가 좀 느껴졌다. (물론, 온 아이스 했을 때의 감각이 없기 때문에 "완전 괜찮아요!"라는 확신은 없었지만!) 피겨화는 신고 벗는 것에도 요령이 있어서 직원 분들이 설명해주실 때 눈과 귀를 다해 집중하고 집중했다.
프레스가 끝나면 피겨화 이외에 필요한 가드독(플라스틱 날집), 털날집, 장갑, 양말, 가방 등을 설명해주신다. 가드독은 화이트와 블루가 반반 들어간 것으로, 털날집은 진짜 고민하다가 화이트랑 어울릴 민트로 골랐다. 장갑은 까만색, 양말은 살색과 흰색, 가방은 연보라 색으로 PICK!
장갑은 서비스로 주셨고, 원래 나머지는 다 구매 대상이었는데 카드 결제 대신 계좌 이체로 양말 하나는 서비스로 처리해주셨다. 삼각형 가방에 예쁜 피겨화와 이것저것 넣어주시는 다음, 건네 주시는데 괜히 마음이 설레고 벅찼다. 어깨에 가방을 매어 보는데, 선물 꾸러미를 진 산타가 된 기분. 하지만 그 기분도 잠시 퇴근 시간에 차가 밀려 회의를 늦을까 서둘러 운전해 서울로 복귀했다.
#1. 3월 26일 일요일, 본격적인 시작 전에 충동적으로 들어본 원데이 클래스 / 첫 피겨 수업!
4월 강습 전, 혹시라도 한 번 타볼 수 있을까 해서 찾아보다가 마침 일요일에 원데이 클래스가 있길래 급하게 연락을 해서 등록을 했다. 같은 서울이지만 서초까지는 꽤나 헬인데, 호기심과 설렘이 그것을 이겼다. 얼마 전 사둔 스케이트화를 신고 처음으로 타 볼 생각에, 신는 내내 신이 났다. 그리고 대망의 온 아이스!
"선생님, 저 처음이라 잘 부탁드려요오..."
이미 몇 개월은 탄 지 된 중학생도 안 된 꼬맹이들 사이에 성인은 나 하나뿐. 속으로 '얘들아, 안녕? 어려서 부럽다. 언닌 서른 되어서 배우러 왔는데-'하던 것도 잠시였다. 피겨화가 일반 스케이트화랑 다르게 생긴 건 알고 있었는데 정말 달라서- 얼음 위에 서는 순간, 멀쩡히 서서 존재하기 위해 온갖 잡생각은 강제 안녕.
처음에 벽을 짚고 무릎 올려 걷는 것부터 시작했다. 어색한 것도 잠시, 다행히 금방 벽에서 벗어나 밀면서 앞으로 가는 것을 배웠다. 이때 느낀 건 처음엔 엉성하더라도 반복해서 하면 확실히 점점 좋아진다는 것. 엄청난 동작도 아니고 그저 걷기 위해 배우는 기초적인 것들인데도 그런 성취감이, 그 감각이 너무 좋았다. 개인적으로 밀기 보다 앞으로 항아리를 그리는 것이 더 쉬웠고, 선생님도 "잘하시는데요?"라고 칭찬을 날려주셨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바로 back 항아리... 앞으로 항아리를 그리며 가던 것을 반대로 뒤로 가는 건데, 정말 어려웠다. 선생님이 설명해주시는 것들이 이해는 되는데, '몸이 안 따라준다는 것이 바로 이런 거구나'를 체감! 백 항아리를 어느 정도 연습하다가 제자리에서 걸은 후 회전하는 것까지 배워봤다. 50분이 정말 후딱 지나갔고, 혹시라도 추울까 걱정했는데 땀이 나고 덥더라. 껄껄.
오늘 첫 온 아이스에서 내가 가장 크게 들었던 생각/감정은 두 가지.
1. 근력이 정말 중요하다.
몸이 뻣뻣한 내가 피겨를 배워보는 것을 망설였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유연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많은 분들이 유연성은 물론 있으면 좋지만 사실 오래 배운 후 어려운 기술들을 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하지, 유연성 보다 중요한 건 근력이라고 했었는데- 그 말이 뭔지 정말 잘 알 수 있었다.
근력이 없다보니 일단 가장 큰 문제는 코어가 약해 상체가 자꾸 무너진다. 상체는 고정하고, 다리만 밀면서 나가야 하는데 상체가 하체와 같이 움직이는 경우가 반복됐다. 또, 배와 엉덩이 힘으로 버텨야하는 순간들이 많은데 아직 그 힘이 약하다 보니 엉덩이가 자꾸 뒤로 빠진다. 엉덩이가 뒤로 빠지면 자세도 자세지만, 동작 자체가 완성되기 어렵고 멈춰지게 된다.
코어만 문제여도 쉽지 않을텐데, 난 정말 전반적으로 근육이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코어말고 발목과 하체가 지탱할 때 버티는 힘이 또 필요한데 그것도 약하더라. 뒤로 항아리를 그릴 때, 그 약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얼음을 지지하고 있는 바닥 쪽으로 발목 아래로 중심을 누르듯 지지해줘야하는데, 자꾸 선생님이 "발목에 힘 주세요! 버티세요!"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해야 힘이 들어가는지 조차 몰라서 여쭤봤다. 발목에 힘을 주라는 게 어떤 거인지부터 차근차근 여쭤보고 노력해봤지만 오늘은 쉽지 않았다.
2. 하지만, 정말 재밌다!
엄청 잘 탄 것도 아닌데, 신기하게 너무너무 재밌다. 한 시간 강습 시간이 끝나고 신발을 갈아신고 차에 타는데, 바로 집에 가는 게 너무 아쉬웠다. '당장이라도 좀 더 타고 싶어!'하는 생각이 퐁퐁 솟았다. 이래서 다들 강습 시간 외에도 대관해서 연습하시고 하나 보다. 나도 출발하기 전에 집 근처 미니링크들 찾아볼까 하다가 첫날 너무 오바하는 것 같아서 기분 좋은 아쉬움으로 내려두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수업은 경험 삼아 들어본 원데이 클래스라 이것저것 정말 맛만 본 거지, 정석으로 제대로 잘 배운 느낌은 아니어서 추후에 코치님과 시작하고 나서 개인 연습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
그렇게 '더 타고 싶어!'는 다음으로 미뤘지만, 운전하고 오는 내내 이 감정과 생각들을 기록하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오늘 어떤 점이 문제였고, 내가 어떤 부분에 신경을 써야하는지 매번 온 아이스 끝나고 적어두면 좋지 않을까. 물론, 내가 선수도 아닐 뿐 더러 거창한 목표가 있어서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발전해나가고 차근차근 무언가를 완성해나간다는 것은 좋은 거니까. 나는 사실 오늘 내가 그렇게 잘 탄 것이 아님에도 재밌어 하는 것에 놀랐기도 했고, 그 지점이 좋았다. 어렸을 때는, 못하면 재미가 없고 싫었는데 이제는 잘해도 괜찮다는 걸 알게 된 것 같아서. 물론 앞으로 재미가 없어질 수도 있고, 권태기가 올 수도 있지만- 나는 오늘 온 아이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안 되는 동작을 계속해서 집중하고 연습하는 그 순간순간들이었다. 속으로 '다시, 다시!'를 외치며 동작을 수정해보고, 반복해보는 그 순간순간들이 좋았다. 성공하지 않더라도, 뭔가에 집중해서 조금씩 나아지는 것. 당장 나아지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도전해보는 것. 수업의 내용과 나의 실력적인 상태와 상관없이 오늘의 경험은 두고두고 값진 순간으로 남을 것 같다. 피겨를 해보기로 결심한 내 자신이 좋아지는 날이다. 내일 코치님께 연락해서 강습 스케줄을 잡을 생각에 설렌다! 앞으로 끈질기게 잘해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