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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나라의어른이 Jun 20. 2020

라면 때문에

싸움 직전까지 갔다.

라면 때문에 내가 폭발했다. 



전 날 여행을 다녀와서 너무 피곤한 나머지 아침은 라면을 먹기로 했다. 아침에 뭐 먹지.. 하면서 냉장고를 뚫어져라 쳐다봤는데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뭐 꼭 여행 때문은 아니더라도 가끔? 아니면 자주?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가 있다. 눈치 빠른 남편이 그럴 때면 귀신같이 알고 자기가 알아서 했는데, 오늘은 게임을 하느라 그런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요새 할 일이 많아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지 게임으로 스트레스를 자주 풀곤 했는데, 그게 길어지다 보니 아침에 눈을 뜨고 저녁에 눈을 감을 때 보는 남편의 모습이 게임하는 모습이었다. 어쨌든 라면이나 먹자 하고 물을 끓이고 라면을 꺼내렸는데 라면이 없었다. 내가 먹고 싶은 건 그냥 라면이었는데 집에는 비빔면이랑 짜짜로니밖에 없었다. 순간 짜증이 밀려왔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배도 고픈데 막 화가 났다. 화풀이는 자연스럽게 게임을 하고 있던 남편에게로 쏠렸다. 



"나는 아침에 눈 뜨자마자 뭐 먹나 고민하고 있는데 오빠만 게임만 하고 그래서 나 짜증 나. 나 아무것도 안 할 거야." 불을 끄고, 냉장고에 있던 타르트를 꺼내 먹었다. 그냥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단 걸 먹었는데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내가 내뱉은 말이 너무 찌질해 그것도 짜증이 났다. 딸기 타르트를 하나만 먹고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 남편이 그러면 자기가 짜짜로니를 만들겠다고 했다. 아무 말 없이 남편은 짜짜로니를, 나는 집 청소를 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몸이라도 자꾸 움직였다. 



짜짜로니가 완성되고 뭐라고 하며 먹긴 했는데, 면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내가 "나 게임하는 남자 싫어. 싫은데 오빠를 만나고 싫어하는 거 좋아하려고 노력 중이야. 게임의 순기능에 집중해보려고 해. 근데 한 달 동안 아침에 일어나고 잠 자기 전에 보는 오빠의 모습이 게임하는 모습이잖아. 그게 한 달 동안 쌓여서 오늘 폭발했어. 나 혼자 어제 여행 다녀와서 피곤한 거니까 오빠한테 화풀이하면 안 되는 건데 그건 미안해."라고 운을 띄웠다. 남편도 "나도 요새 게임을 좀 줄여야겠다고 생각했어. 나도 좀 많이 한다고 느꼈거든. 근데 게임하는 게 잘못됐다고 생각은 안 해." 흠. 앞의 말은 잘 안 들리고 뒷 말만 자꾸 내 머릿속에서 맴돌아 짜짜로니를 더 이상 먹을 수 없었다. 억지로 한 두 젓가락 더 먹다가 그만 먹겠다고 했다. 내가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그 대답에서 남편의 빡침이 느껴져서였을까? 갑자기 그때부터 체할 것 같이 속이 답답해졌다.



 "그동안 여보가 아무것도 하기 싫어할 때 내가 아무 말 없이 대신 다 했잖아. 오늘 뭐 때문에 화가 난 거야?"라고 물었다. "글쎄 배고픔과 피곤함의 콤보? 그리고 한국 가기 전의 일련의 상황 때문에 짜증남?" 나 나름대로의 원인을 생각해 봤다. "그건 그냥 트리거이지 주된 원인은 아닌 것 같은데?"라고 남편이 다시 물었다. 다시 잘 생각해보려는데 꼭 울 것 같아서 그만 말하기로 했다. 



"아직 우리 한 번도 안 싸웠는데, 그럼 우리 짜짜로니 먹으면서 처음으로 싸운 거야? 나 그럼 좀 쪽팔릴 것 같은데?"라고 내가 말했다. 남편이 이건 싸움도 아니라며, 간단한 논쟁 정도?라고 대답했다. 그 후에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흐지부지 분위기가 좀 나아졌고, 서로 미안하다며 사과를 했다. 남편이 농담으로 "라면이 잘 못 했네."라고 말을 했다. 나도 "나 변덕스러운 거 알잖아"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다음엔 그냥 평소의 분위기로 돌아왔다. 



오늘을 우리의 첫 싸움으로 기록하기에는 부족하다. 하지만 만일 진짜 우리가 싸운다면 어떤 느낌인지 싸움의 과정 중의 답답함, 상대가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 같은 공포감, 나의 마음을 몰라주는 상대에 대한 섭섭함등의 여러 감정을 맛보았다. 아마 이렇게 서로 콕콕 찔러보다가 빵 하고 터지면 본격적인 우리의 첫 싸움이 시작하겠지. 오늘의 사건으로 인해 하나 느낀 건 싸움의 근처에만 가도 이렇게 마음이 무겁고 답답한데 진짜 싸움을 하고 나면 우리가 감당해야 할 것이 엄청나게 클 거라는 거다. 항상 내 편인 줄 알았던 사람이 갑자기 돌아서서 나를 향해 무섭고 독한 말을 할 때 그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될지. 싸움의 아우라만 풍겼을 뿐인데 남편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고 무서웠다. 언제나 다정한 남편이 순간 차갑게 보여서 놀랐다. 남편의 다정함이 사라지지 않으려면 나의 노력도 필요함을 느꼈다. 



라면 사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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