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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s Oct 21. 2020

전역을 합니다

584일 동안의 생각들

작년 3월 19일, 훈련소로 가던 날. 약간의 체념이 섞여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백여 일의 유예기간 덕분일까. 사회와 잠시 거리를 두어야 하는 일이 그렇게 아쉽지만도 않았다. 아무것도 몰랐으니 딱히 무서울 것도 없었다. 새로운 삶을 살아보는 경험을 즐기는 사람인지라 오히려 약간은 설레는 기분도 없잖아 있었다. 적어도 훈련소 입구에 도착할 때까진 말이다.


입소식이 끝나고 가족과 마지막으로 만날 시간을 가졌을 때 비로소 슬픔 비슷한 어떤 감정에 휩쓸렸다. 아빠가 그렇게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은 태어나서 처음 봤다. 거의 막바지까지 맨뒤에서 묵묵히 지켜만 보던 아빠는 행사가 끝나기 직전이 되어서야 내게로 왔다. 엄마는 이미 나와의 마지막인 것처럼 포옹을 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잘 갔다 와라." 아빠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시간 금방 간다. 잘 갔다 와라."


짧은  마디.


그렇게 눈물로 시작했던 군생활 이제야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설레고 아쉽고 두렵다.


19개월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다만 지난 모든 시간이 기억에 남지는 않았으니 그렇게 느껴질 뿐이다. 그렇게 흘려보낸 시간이 아쉬울 뿐이다.


2%. 단 한 번뿐인 삶의 일부분을 통제당하는 일은 생각보다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은 군대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목표를 정해서 나오라고 한다. 확실한 무언가를.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군에 와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대학 입시를 위해 억지로 독서를 해야 했던 이후로 책에는 손도 대지 않았던 내가. 휴대폰이 없으니 너무 심심해서 어쩔 수 없이 읽게 된 것은 아닐까. 어쩌면 반드시 자기 계발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그렇게 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이곳에서 삶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은 그런 강박에 계속 힘을 실어주었다.


삽질은 낭비가 맞다.


훈련소 생활이 끝나고 처음으로 휴대폰을 받았을 때이다. 그동안 보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불쌍한 군인이 건 전화를 다들 반갑게 받아줄 것이라 상상했다. 대부분 그렇게 해줬으니 너무나도 고마웠다.


그럼에도 백여 명의 연락처를 삭제했다.


유격훈련에서는 기억에 남는 것이 몇 없다. 기억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이등병이 목소리가 그게 뭐냐. 더 크게 해라"


고양이 한 마리가 차를 몰래 얻어 타고는 부대에 들어왔다. 녀석의 부른 배는 손님이 하나가 아니라 주장하는 듯했다. 달마티안 강아지 같은 무늬의 녀석은 한 달 후에 새끼를 낳았다. 다섯 마리를 낳았지만 일주일 후에 살아남은 것은 겨우 두 마리. 하나는 어미를 닮아 '점순이', 다른 하나는 갈색 줄무늬를 가진 녀석 '삼식이'라고 이름을 붙여줬다. 어쩌면 점순이가 수컷이고 삼식이가 암컷일 수도 있겠지만... 그냥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성장은 그 주변까지 신선한 에너지로 물들인다. 녀석들도 어미를 닮아 사람을 굉장히 좋아하는 이른바 '개냥이'였으니 우리로선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탈 없이 무럭무럭 자라 다오. 집을 지어주고, 사료를 챙겨주고, 강아지풀을 뽑아 장난감도 만들어 주었다. 내 무릎 위에 앉아 놀던 녀석들의 부드러운 털과 체온은 한여름의 더위와는 다른 어떤 따뜻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행복한 한두 달이 지났을까. 녀석들은 어느덧 사냥을 할 수 있는 호랑이에 가까워졌다. 그러곤 모든 호랑이 그러하듯 어미를 등지고 문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독립.


잘 살아라.


사람이 문득 그리워진 적이 있다. 휴대폰으로 연락하는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은 어떤 그리움이 있다. "보고 싶다." 정말로 두 눈을 마주 앉혀야만 해소될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사랑의 어원이 사량思量인지도 모른다는 말을 본 적이 있다. 누군가에게 말하기 부끄러운 사실, 네사랑인지 모른다고 잠시나마 생각하기도 했다.


충성심은 사람들에게 강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단한 노력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군인들도 다 똑같은 사람인데, 마찬가지이다.


타인의 슬픔을 휴대폰으로만 전해 듣는 것만큼 가슴 아픈 일도 없다. 군인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돈 몇 푼, 아니면 두서없는 위로의 말 한두 마디 보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무너진 한 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는 상상.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라 미안합니다.


말년 병장이라는 시기가 나에게도 찾아왔다. 왜 군 전역자는 꼰대라는 소리를 듣는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문득 튀어나오곤 했다.


나 때는...


누군가 내게 말했다. 너도 어쩔 수 없는 선임이 되어버린 거라고.


책상 앞에서는 절대 현실을 깨달을 수 없다. 세상은 절대 우리가 계획한 시나리오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상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들은 그 작은 원탁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산불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산 능선의 풀과 나무를 모두 베어냈다. 2주 동안 이어지는 고된 작업. 원적산에는 매일 예초기의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까. 산은 어느새인가 다시 녹음을 품었으니, 우려했던 대로 우리는 세상 쓸데없는 짓을 했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책을 읽기 시작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 음을 털어낼 곳이 새하얀 종잇장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즐거웠던 옛 생각 늘어놓기엔 그만큼 좋은 곳이 없지 않은가?


종이의 결을 가르는 잉크의 날카로운 감촉, 종이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의 그 까슬함. 그것이 참 좋다.


군인들은 많이 다친다. 몸도 마음도.


함께 훈련하던 후임이 철에 무릎이 찍혀 한 발도 움직이지 못한 적이 있었다. 으신 분들은 그 상황을 보고도 아무런 조치 없이 그냥 가버린다.


과연 우린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안타깝다.


살면서 받아본 박수소리 중에 가장 크고도 희미한 박수였다. 위병소 문을 나서면서 이제 정말 집으로 돌아간다는 그 희열은 나의 모든 감각을 흐릿하게 만들 정도로 강했다. 그럼에도 집에 와서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 마음 깊은 곳에는 어느 정도의 아쉬움이 숨어 자리 잡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집에 가기 전날 밤, 유희열 씨가 스케치북 오프닝에서 이런 말을 했다. "어쩌면 우리는 사람이 그리워지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복학까지 5개월이라는 시간이 비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쩌면 지금이 인생을 미련하게 살 수 있는 마지막일 것이라는 생각이 계속 릿속을 찌른다.


한가한 사람은 시간과 마주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본 적이 있다. 어쨌든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에는 지금이 제일 좋은 시기이다.


이곳에서의 584일 어쩌면 갖은 잡념을 정리하기 위해 충분하지 않은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들 군대에 가면 생각이 많아진다고, 자기 자신에 집중할 시간이 많아진다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런데 나는 전히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잘 알지 못한다.


그동안 막사에서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조차 기억이 희미하다. 그래도 매일의 일과 생각을 종잇장에 고스란히 적어 놓았다는 사실은 작은 위로가 된다. 어디에라도 적어놓았으니 이젠 떠올리고 싶을 때마다 책장에서 슬쩍 꺼내어 훔쳐보면 될 일이다. 아무리 힘든 기억일지라도 언젠가는 술 한 잔 앞에서 웃음으로 털어버릴 날이 올 테니까. 이제 584일의 낡은 일기장은 30년 치의 안줏거리가 되어 책장 한 구석에 자리 잡고 더 많은 세월을 함께 늙어간다.


고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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