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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s Oct 19. 2020

20대의 마지막 미련한 짓이랄까

부산행 자전거, 5일간의 생각

휴학생은 심심하기 마련이다. 제아무리 열심히 살아봐도 무엇인가 부족하고, 그렇다고 편안하게 쉬기에는 마음 한 구석이 불안한 청춘이다. 다른 사람들과 시차가 느껴질 시기.


앞으로 남은 몇 달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고민만 하다 떠나보내는 시간은 그중에서도 제일 아까운 것이다. 지금 이 시기는 정년퇴직 전까지 마지막으로 '미련하게' 살아볼 수 있는 시기일 것이라 생각했다. 정말로 미련하게 말이다.


출발 10일 전. 당근 마켓에서 자전거를 하나 샀다. 그냥 궁금했다. 과연 내가 이 5만 7천 원짜리 고물 자전거로 부산을 갈 수 있을까. 사겠다고 메시지를 보내기까지 한참을 고민했다.


자전거를 사서 가지고 오는 길에 후회하기 시작했다. 돈 몇만 원 더 줘서 조금이라도 더 좋은 자전거로 구해볼 걸. 녹이 슬어 기어가 잘 바뀌지도 않는 이 고철덩어리를 들고 어딜 가려는 생각이었을까. 그래도 이미 사 왔으니 어떡하리. 쓸만하게 정비해서 잘 끌고 가봐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출발 3일 전. 여행에 필요한 장비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전조등, 후미등, 짐칸, 끈, 물통 홀더, 인증수첩.


좀 더 미련해지고 싶었던 탓일까? 하루쯤은 야영이 해보고 싶었으니 텐트와 침낭도 챙겼다. 여행 중에 하루 정도는 강 옆 물안개 속에서 눈을 떠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이쯤 되니 자전거보다 자전거에 달려있는 짐들이 더 비싸고 무거워졌다.


출발하기 직전에 짐을 다 매달고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어떻게 하면 이 많은 짐을 좀 편하게 가져갈 수 있으려나 한참을 고민했다. 결국 짐을 묶기 위한 끈을 하나 더 샀고, 집에 있던 장바구니 끈도 동원되었다. 그래도 부족해서 자물쇠까지 써서 겨우겨우 짐을 묶었다.


짐을 지키기 위해 자전거를 묶는 것을 포기했다.


출발하기 전 며칠. 내가 과연 부산까지 갈 깡이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어 문득 집 앞 산책로를 10km나 달려보기도 했다. 어지러웠다.


출발 이틀 전. 주변 사람 몇몇에게 이 계획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대부분이 미친 짓이라 욕했으니 내게는 동기부여로 충분했다. 원래 반항심은 최고의 동기부여다. 어떻게든 완주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졌다.


출발 당일. 영양제를 몇 개 들고 가라는 엄마와 사소한 다툼이 있었다. 오전 7시에 알람이 울렸을 때 문득 출발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30분을 더 뒤척였다. 그렇게 9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겨우 집 밖으로 나왔다.


청라국제도시 역에 도착하기까지 참 많은 자전거인들을 만났다. 지하철에 타려면 어쩔 수가 없으니 그 자전거들 옆에 내 자전거를 세워 놓았다. 문득 그렇게 옆에 놓고 보면 내 것으로는 절대 저 사람들을 따라갈 수 없을 것만 같다. 아라뱃길 공원에는 내 자전거보다 훨씬 비싸고 화려한 자전거들이 더 많이 보였다. 그들은 날카로운 바람을 한 점 남기고는 이내  내 앞을 지나쳐 시야에서 사라지곤 했다.


저 사람들의 목적지는 어디일까. 나는 천천히 간다.


종주길 출발점에 서서 문득 내 여행이 자랑하고 싶어 졌다. 휴대폰을 들고 잠깐 걸으며 동영상을 찍어본다. 유튜브 영상이라도 만들어볼까 잠시 생각했지만 배터리가 아까웠으니 이만 접어두었다. 어쨌든 출발의 순간이 몇십 초나마 휴대폰에 남아 있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633 킬로미터. 얼마나 먼 거리인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뭐 가다 보면 언젠간 도착하겠지.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폰에서 작은 목소리 하나가 들렸다. "현재 1 킬로미터 라이딩 중입니다. 걸린 시간은 3분 몇 초입니다. 평균 속도는...."


무의식 중에 이 속도로 부산에 도착하려면 얼마나 더 가야 할지 계산하기 시작했다. 대략 32시간. 하루에 여덟 시간만 가면 되겠구나. 생각보다 그렇게 멀지는 않나 보다. 갈만하네!


서울에 진입했을 때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출발한 지 1시간쯤 지났을 때이다. 문득 완주 실패를 걱정하게 되었다. 두 시간쯤 더 달렸을까? 인증 도장 찍는 곳을 헷갈려 갔던 길을 돌아오고, 다 안다고 생각했던 길도 잘못 드는 일이 생겼다. 오후 4시, 팔당대교에 도착할 때까지 점심도 먹지를 못했으니 반나절만에 온몸이 피로에 찌들었다.


드디어 서울 밖을 벗어났을 때에는 오후 4시가 다 되어 있었다. 그제야 배가 고프기 시작했는데 때마침 다리 밑에 칼국수집 간판이 붙어 있었다. 칼국수집이 2층에 있는 게 원망스러웠다. 계단을 오르는 일이 하루 반나절만에 고통이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식사를 마치고 음료수라도 하나 살 생각으로 편의점에 들렀다. 그리고 파스를 하나 사서 나왔다.


자전거가 이모양이니 아무래도 걱정거리가 하나는 줄었다. 화장실을 가든 식당을 가든,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운 적이 없다. 어차피 짐을 묶는 데에 자물쇠를 써버렸으니 다시 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전거가 없어지면 내 종주 여행도 끝나겠지만, 뭐 아무렴 상관없다. 내 자전거는 절대 아무도 가져가지 않을 거다.


자전거길을 따라 걸어서 부산까지 가신다는 할아버지도 만났다. 한 20일 정도 걸릴 것 같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시는 게 대단하신 분이다. 무사히 완주하시길 바라면서 먼저 갑니다.


해가 떨어지고

공기 차가워질 즈음

저녁밥으로 순댓국을 먹었다


밥이 이렇게까지 맛있을 수가 없다

생양파마저 달다


첫날 많이 달려놓겠다며 무리를 했던 탓일까. 저녁 식사를 하고 나왔을 때 문득 왼쪽 무릎이 갑자기 말을 듣지 않았다. 오른발로만 페달을 밟으며 어떻게든 잘 곳을 찾아야만 했다. 길 저 멀리 불빛 많은 곳이 보이지만 그곳으로는 갈 자신이 없으니 나는 계속 가던 길을 따라간다. 언젠가 여행객을 위한 방 하나쯤은 있으리라. 아니면 텐트를 칠 잔디밭이라도 있으리라.


그렇게 지도에서 공원들을 찾아보며 달린 지 한 시간. 처음으로 공원 입구에서 만난 표지판은 내게 남아 있던 모든 힘들 앗아가기에 충분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면서 오는 길이었다. 그 한 통 전화가 없었다면 아마 난 텐트 치는 곳까지 가지 못했을 것이다. 가는 길에 방을 잡는 것이 어떻겠냐 계속 권유했다. 그 사람도 그랬고, 아마 내 마음속에서도 그랬다. 그렇게 고민하는 순간에도 다리는 움직이고 있었으니 이제는 앞으로 가기 위해 페달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이 습관이 되어 멈출 수 없었다 말하는 것이 더 옳은 상황이었다.


아마도 나는 이날 무조건 텐트에서 잠을 자리라 마음을 먹었는지 모른다. 이어지는 통화에서의 방을 잡으라는 권유는 한 편으로는 감사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귀에 가시처럼 다가왔다. 또 한 번의 반항심이 들었는지 어느 순간 전화를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두 시간을 더 달려 텐트의 뿌리를 내렸다. 사실 그곳이 야영이 가능한 곳인지는 지금도 모른다. 어쨌든 순찰을 도시던 분들도 나를 보시고는 그냥 지나치시니 이곳에서 잠을 청하기로 했다. 무릎은 이제 정말로 고장이 났는지 움직이기조차 힘든 지경이었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짐을 풀고 텐트를 쳤다. 자전거는 어차피 아무도 훔쳐가지 않을 테니 자물쇠는 그저 손잡이에 걸어두었다. 전조등을 떼서 텐트 조명으로 사용했고, 패딩은 돌돌 말아서 베개로 썼다.


새벽에 누군가 텐트를 툭 툭 치고 가는 듯했고, 다리가 저려오니 잠을 푹 잘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열네 시간 만에 누울 수 있었으니 이보다 편안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물안개가 스민 듯 무릎이 시렸다. 파스를 잔뜩 뿌리고 잠에 들어서일까. 여전히 다리를 절뚝거리며 텐트를 접으려는데 새벽 이슬이 떨어져 내 손과 발을 적셨다. 온몸에 한기가 느껴지니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서 출발해야겠다고 생각했으니 텐트를 번쩍 들어서 양 옆으로 흔들어 털기 시작했다. 젖은 상태로 접으면 이다음에 사용할 수가 없을 테니 선택지가 없었다. 텐트가 점차 마를수록 내 팔은 더 아파왔다. 덕분에 온몸에는 열이 올라 더 이상의 한기는 스며들지 못했다. 정신이 선명해졌다.


그렇게 출발하려는데 그제야 문득 낮게 깔린 물안개가 눈에 들어왔다. 향긋한 물 냄새


하루 종일 혼자 자전거를 타기란 여간 심심한 일이 아니다. 혼자일수록 쉽게 지친다. 저 멀리 여럿이 게이트볼 치는 모습을 보며 지나칠 때에는 더 그렇다. 그러니 노래를 더 크게 틀어놓고 지인에게 전화를 건다. 그러다 가끔은 너무 다른 곳에 정신을 판 나머지 길을 잃을 때도 있다. 되돌아오는 길에는 더 크게 노래를 틀고, 더 크게 따라 부른다. 누가 나를 신경이나 쓰겠는가?


그럼에도 가끔은 모든 잡음을 죽이고 무엇인가 흔들리는 소리에 집중하고 싶을 때가 있다. 자전거 바퀴와 바닥의 마찰음은 그 바람소리와 너무나도 잘 어우러진다.


"안녕히 가십시오. -경기도", "어서 오십시오. -충청북도"


길가의 표지판을 보고도 눈물이 나오는 수가 있다.


사과의 고장 충주의 길거리에는 그 이름답게 사과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앞을 제대로 보지 않고 달리면 한 순간 사과에 머리를 부딪히기 십상이다. 누구의 것일까. 문득 자전거를 멈춰 세우고 사과 하나를 집어 주머니에 잘 넣어 두었다. 지금부터 가야 하는 새재 길에서 작게나마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두 시간 정도를 더 달렸을까. 높은 언덕이 하나 내 앞을 가로막았다. 무릎이 여전히 고장 나 있었으니 그런 언덕에서의 페달질은 불가능했다. 언덕을 만날 때마다 안장에서 내려와 자전거를 끌고 올라갔다. 그렇게라도 해야 더 갈 수 있었다. 그렇게 이름 모를 고개 정상에 도착했을 때 문득 주머니에 사과 하나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도로변에 자전거를 잠시 세워두고 한 입을 베어 물었을 때의 그 여유는 정말로 기분 좋은 것이다. 길거리 사과밭의 주인에게 미안할 정도로 맛있는 사과였으니 남김없이 다 베어 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새재 자전거길 위에서 야영을 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었다. 차가워진 가을바람이 산을 타고 내려오며 한기를 더하니 하루 종일 자전거를 타던 여행객의 폐 속에는 냉랭함이 가득했다. 몸 안에 있던 힘이 전부 빠졌을 때의 그 느낌. 감기에 걸린 듯 정신이 몽롱하고 손 끝이 시려 몸을 움츠리게 하는 그 기분을 아는가?


아마도 그곳이 부산까지 가는 여정의 정확히 중간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다리는 이제 더는 움직일 기운이 없는 듯 아프고 저렸다. 저녁 6시쯤이었을까 수안보 온천마을에 도착했을 때 문득 오늘은 이곳이 내 종착지가 될 것을 알았다. 더 이상 앞으로 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날 저녁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몸을 담갔다. 얼어 있던 몸이 녹으며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제는 정말로 돌아갈 곳이 없으니 이 길에 오른 것을 마지막으로 한 번 후회해봤다.


국토종주 자전거길은 한강 자전거길, 남한강 자전거길, 새재 자전거길, 낙동강 자전거길, 이렇게 총 4개의 길을 지나간다. 그중에서도 새재 자전거길은 가장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길이라고 기억한다. 가끔은 5 킬로미터나 되는 어마어마한 언덕을 넘어야 할 때도 있다. 정말 내 자전거로는 도저히 타고 올라갈 수가 없어서 이른바 '끌바'를 해서 정상에 오르기도 했다.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다리는 아침부터 저려온다.


하지만 우린 올라온 만큼 내려간다. 또는 내려간 만큼 언젠가는 올라간다.


낙동강 700리의 시작. 표지판에 또 한 번 눈물이 나는 이유를 여전히 모르겠다.


상주에서 한 노부부를 만났다. 나는 힘이 들어 잠깐 쉴 겸 천천히 자전거를 끌고 걸어가는 중이었다. 부부는 자전거길 바로 옆에 있는 자그마한 감 밭에서 감을 따고 계셨다. 할머니가 구부러진 허리를 펴시고 팔을 높이 들어 올리시더니 어느덧 손에 빨갛게 익어가는 대봉 감이 하나 들려 내려왔다. 아침 일찍부터 일을 하고 계셨는지 이미 바구니에는 홍시가 가득 들어 곶감이 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문득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할아버지께서는 내게 인사를 건네시는 듯하시더니 나를 불러 세우시고는 이리 오라며 소리치셨다. "시간 있나? 이리 와봐."


하루 종일 자전거길 위에서 대화를 잊고 살았던 사람에겐 그 한마디가 그렇게도 반갑다. 길가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감 따는 일을 잠깐 배워봐야 하나 생각하며 할아버지께 걸어갔다. 내가 가까이 가자 할아버지는 문득 허리를 숙이시고는 바구니에서 빨갛게 잘 익은 감 하나를 꺼내어 주셨다. "눈 마주쳤으니까 주는 거야. 그냥 쌩 지나가는 사람들은 안 줘."


상주에서부터는 동행인이 생겼다. 상주보 인증센터에서 내가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것 같다며 말을 걸어오셨다. 그리고 우린 그 후로 완주하는 순간까지 동행했다. 내 텐트를 보시더니 "와 넌 그러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 감탄을 연발하셨다. 평생 형님으로 모셔야 할 분을 길에서 만났다.


사실 그전까지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이화령 고갯길에서부터 다들 함께 고생하며 달려서인지 잠깐 정이 들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거기까지였다. 어느덧 일정이 달라지면 헤어지기 마련이었고, 그 이후로는 만날 수가 없었으니 섭섭했다. 그럼에도 그 형님은 끝까지 나와 함께 하셨다. 어쩌면 그분 덕분에 내가 무사히 완주를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텐트를 치고 자겠다는 나를 말려 숙소로 들어오라 하시고, 걱정해주시고 격려해주셨으니 너무나도 감사할 따름이다.


"우리가 혼자 와서 만났으니까 이렇게 같이 다니는 거야. 둘이 온 다른 놈들 봐봐라. 친해질 수가 없다."


할 수 있는 만큼 천천히

비행기보다는 기차로

기차보다는 자전거로

때로는 두 발로


여행은 느려야 제맛이다


표지판에는 어느덧 '낙동강 하굿둑까지 5km'라고 쓰여있었다. 이미 부산광역시에 진입했고, 산책하는 사람들과 도시의 건물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다리는 이미 부서진 것처럼 아파서 다리는 그저 습관적으로 움직일 뿐이었고, 머릿속으로는 표지판에 나와 있는 저곳에 도착하는 순간을 상상하며 고통을 견뎠다. 주변을 구경하며 천천히 가겠다던 그 생각은 어느샌가 지워졌다. 그저 페달에 힘을 주는 데에 집중하며 바람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속도를 높였다. 결국 도착해 마지막 인증 도장을 찍었을 때 왠지 모를 허무함이 느껴졌다.


아... 드디어 왔네.


이번 여행이 나에게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무엇인가 느끼기 위해서 떠났던 것도 아니었으니 별로 바라는 것도 없었다. 가끔은 혼자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를 정도로 외로웠지만 결국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고, 행복했지만 결국에는 조금의 허무함이 공존했다. 어쨌든 이렇게 내 마지막 미련한 짓은 끝이 났다.


여행을 마치고 자전거를 되팔까 생각도 했지만 결국 집으로 다시 가져왔다. 사람이 의식이 없는 물건에도 정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문 밖에 있는 녀석을 보면 참 내가 저걸 가지고 어떻게 부산을 갔다 올 수 있었을까 아직도 신기하다. 무리를 했는지 페달은 삐걱거리고, 브레이크는 헐렁해졌다. 조만간 자전거 방에 가서 수리를 해주어야 할 것 같다. 너도 고생했으니 쉴 시간을 줘야지.


손잡이를 너무 오래 잡고 있었던 탓일까, 나는 아직도 네 번째 손가락이 저리다. 젓가락을 잡으면 손이 떨려 가끔 반찬을 놓치고는 한다. 얼굴은 전부 새빨갛게 타서 세수를 하려면 따가움을 참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나도 조금은 여독을 풀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머리카락과 기억이 하얗게 변할 때

문득 강어귀의 길 바람이 그리워질 때


다시 떠날 수 있다면

다시 손가락이 저릴 수 있다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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