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커피 한잔할래요?
2. 커피 한잔할래요
"커피 한잔할래요?" 밥을 같이 먹기에는 좀 부담스러운 사이라거나 간단히 누군가와 대화하고 싶을 때, 내가 가진 호감을 표현할 때 우리는 커피를 소환한다. 지금은 이렇게 손쉽고 간단하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음료이지만 사실 커피는 오랜 시간 "권력"과 "상류층"의 상징으로 소비되어 왔다. 커피는 에티오피아에서 아라비카 반도로 전래된 뒤 성직자들만을 위한 음료로 소비되다가 대중에게 전해졌다. 그 뒤 십자군 전쟁을 통해 유럽으로 전해진 커피는 당시 유럽에서 호환 마마보다 무섭게 여겨졌던 "이교도"의 음료로 배척당하는 듯했으나, 이탈리아로 전해져 무려 교황으로부터 공인받은 그리스도교의 음료가 되었다. 커피가 결국 아프리카, 서남아시아, 유럽을 모두 홀리게 된 것은 그 강력한 향기가 한몫했을 것이라고 나는 감히 추측해본다.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사람들도 그 향을 맡으면 모두 "커피 냄새 좋다~"를 연발하게 되지 않는가.
여하튼 그렇게 커피는 귀족들의 사치재, 상류층의 상징, 제국주의의 그늘, 검은 눈물, 기호품 등의 단계를 거쳐 현대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부와 교양의 상징이었던 음료에서 맛으로 마시는 게 아니라 살기 위해 마신다는 현대인들의 애환을 담은 음료로 탈바꿈하기까지, "금지"의 음료에서 "생존"의 음료로 변모하기까지 그 뒤에는 셀 수 없는 역사와 야사와 환희와 기쁨이 담겨있다.
사실 이렇게 커피가 대중화되고 나서도 커피는 대부분의 인생에서(한국만일 수도 있지만) 다시 "금지"된 음료로 첫 등장을 한다. 커피 냄새가 좋다는 것은 어린아이들도 안다. 기가 막힌 냄새에 이끌려 아이들이 한 모금 먹어보고 싶은 생각에 "나도 마실래!"를 외치면, 부모님은 대부분 "커피 마시면 머리 나빠진다"는 말로 단호하게 거절한다. 내가 겪은 바에 따르면, 사실 녹차나 홍차에도 카페인이 들어있는데 아이들이 "나도 녹차 마셔볼래" 라든지 "홍차 한 입만 마셔볼래" 하면 그래 한 입만이야 라고 허락하지만, 커피는 단호하게 "안 돼"라고 하는 부모님이 많은 것 같다.
그렇게 금지의 때를 지나 어느 정도 머리가 크면 부모님 몰래 커피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는데, 첫 블랙커피를 먹었을 때의 충격은 강렬하게 머리에 남곤 한다. 커피 냄새는 그냥 커피 냄새 그 자체이다.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향긋하다' 정도로만 지칭할 수 있는 대체 불가한 독보적인 냄새다. 그래서 도저히 무슨 맛일지는 먹어보기 전에는 상상이 안 간다. 그렇게 상상 속에서 한껏 커피 맛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리다가 막상 먹고 나면 그 실망감이란… '냄새는 그렇게 좋았는데 맛은 이렇게 쓰다고? 도대체 이걸 왜 먹는 거지?' 하는 생각에 몇 입 먹지 못하고 내려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 역시도 첫 커피가 블랙커피였는데 그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차라리 부모님이 한 입 마시게 해줬더라면 그 오랜 세월 커피 맛을 갈망하며 지내지 않았을 것 같다.
그래서 다시 쳐다볼 것 같지 않은데, 이상하게 우리는 또다시 커피로 회귀한다. 우유와 시럽을 추가한 바닐라 라테나 캐러멜 마키아토, 카페 모카 같은 메뉴로 다시 커피를 입에 대게 되면, 향긋한 커피 냄새와 함께 입에 감기는 부드럽고 고소한 우유의 맛, 달콤한 시럽의 맛까지 빠져나갈 수 없는 커피의 굴레에 다시 빠지게 된다. 정말 안 건강한데 미친 듯이 중독적인 믹스커피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렇게 달달한 커피 메뉴들 사이를 부유하다 보면 어느새 '단 메뉴는 조금 질리니까 다른 걸 마셔볼까?'하는 생각이 빼꼼히 고개를 쳐든다. 이제 과거에 호되게 쓴맛을 보여줬던 아메리카노나 드립 커피에도 눈을 돌린다. 몇 번 마셔보니 그렇게 많이 쓰지도 않은 것 같고, 쓴맛 사이에 숨겨져 있는 단맛과 신맛, 과일, 초콜릿, 스파이시, 흙, 꽃향기 같은 것들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여름 아이스 아메리카노만이 줄 수 있는 청량한 시원함이나 추운 겨울 손에 든 따뜻한 블랙커피가 은은한 향기를 풍기며 손끝은 물론 속까지 덥혀주는 것을 경험하고 나면 이제 아메리카노는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버리고 만다.
사실 커피는 철저히 기호식품이다. 한국인들은 특히 신맛은 극도로 싫어하고 탄 맛이 나도록 강하게 볶은 (강배전) 커피를 좋아한다. 사실 커피 고유의 쓴맛이 아니라 탄 맛이 두드러지게 올라온다면 잘 된 로스팅이라고 할 수 없지만, 한국에서는 흔히 "제대로" 볶은 커피보다는 태운 커피가 더 잘 팔린다. 입맛은 맞고 틀리는 것이 없기 때문에 결국 한국 시장에서는 탄 맛이 두드러진 커피가 "제대로" 된 커피 맛인 것이다. 그런 틈바구니 속에서 신맛이 두드러지는 원두와 탄 맛을 싫어하고 약하게 볶인 커피(약배전)를 선호하는 나는 입맛에 맞는 커피 찾기가 참 힘들다. 그래도 요새는 산미가 나는 원두도 선택할 수 있도록 커스터마이징 마케팅을 펼치는 카페가 많아지는 추세지만 불과 5년 전만 하더라도 전문 로스터리 샵이 아닌 일반 카페에서 에스프레소의 원두에 선택지가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대중적인 대세는 아직도 탄 맛 나는 커피인 것 같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비주류인 내 입맛이 주류가 되는 것은 포기하고 그냥 대세에 나를 맞추어 탄 맛 나는 커피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했고, 어느 정도 참고 마실만은 해졌다. 하지만 집에 가정용 로스팅기까지 장만하신 까다로운 입맛의 커피 마니아와 친했던 터라, 그분을 따라 맛있는 커피를 찾아 전국 이곳저곳을 돌아다녀 보니 내 입맛에 딱 맞는 커피를 마셨을 때의 그 기쁨을 너무 잘 알아서 탄 맛과 적당히 타협할 수가 없다. 잘 볶인 탄자니아 AA 원두를 전문가의 드립 솜씨로 하리오 드리퍼에 내려 따뜻할 때 마시면 눈이 번쩍 뜨이는 신맛과 동시에 느껴지는 묵직한 바디감과 쓴맛, 그 안에 숨은 단맛의 조화에 너무 행복해진다. 에티오피아 하라 원두로 내린 드립 커피를 처음 마셨을 때의 충격은 내 미천한 커피 인생의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향긋한 꽃향기에 이어 느껴지는 과일의 산뜻하고 깔끔한 신맛 그리고 따라오는 특유의 발효된 듯한 오묘한 단맛과 쓴맛, 흙 향이 어우려져서 "와, 이거 뭐야" 하는 말이 절로 나왔다. 안타깝게도 두 원두 모두 취급하는 곳이 많지 않고 하라는 특히 드물어서 어디서 발견이라도 하는 날에는 잘 볶였는지 어떤지는 따지지 않고 일단 구매하고 본다.
이렇게 커피에 있어서만큼은 확고한 입맛을 가지고 있는 나지만, 새로운 커피를 마셔보는 것은 언제나 행복하다. 우리 동네에 생겨줘서 너무 고마운 커피 맛집에(지금 이 글도 그 카페에서 쓰이고 있다) 있다 보면 사장님이 종종 새 원두가 들어왔다고 소개해주시면서 서비스 커피를 주신다. 처음 들어 보는 원두나 이름만 알고 있는 원두로 커피를 내려주시면 커피라는 음료가 가진 맛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은가 새삼 감탄하게 된다. 디테일에 집착하는 나 같은 사람이 이름을 붙였다면 아마 인도네시아 만델링과 요새 유행하는 게이샤 종류의 커피를 같은 커피라는 이름 아래 두지 않았을 것 같다. 코프나 커핀 정도쯤의 차이는 두었을 것이다.
커피란 이렇듯 수천 종의 원두와 그에 버금가는 다양한 메뉴를 가지고 있기에 모든 사람이 다 입맛에 딱 맞는 자신만의 커피 메뉴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다양한 이유로 커피를 좋아하지 않거나 마시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보면 사람이라는 존재는 이 수천수만의 커피보다 더 다양한 취향을 가지고 있다. 내 개인적인 이야기만 조금 늘어놓았을 뿐 아직 이탈리아인들의 에스프레소 사랑과 아메리카노 혐오, 뉴질랜드와 호주의 플랫 화이트 원조 싸움 같은 커피에 얽힌 이야기들은 시작도 못 했는데 벌써 지면이 모자란 것처럼 커피에는 수많은 이야기와 역사가 있다. 하지만 커피보다 더 무궁무진한 개인의 역사를 담은 인간이라는 객체들이 70억이 넘게 있다는 생각이 해보면 그 다양성을 가늠할 수조차 없다. 커피 한 잔에 담긴 역사와 기호와 행복과 눈물보다 더 다양한 행복과 슬픔과 분노와 상처와 사랑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에 담겨있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우리가 지구라는 거대한 카페에서 팔리는 수억의 커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커피 냄새와 마찬가지로 다르게 표현할 수 없는 "사람 냄새"를 지닌 우리들은 각기 다른 환경에서 성장하며 고유한 나만의 맛을 만들어간다. 주어진 환경이나 예기치 않은 사건, 사고 때문에 누군가는 강하게 볶이기도 하고 누군가는 약하게 볶이기도 한다. 거의 타도록 볶인 커피처럼 유독 고난이 많은 사람의 인생은 본인은 힘들지만, 대중들은 '인간승리'라는 이름을 붙여 감탄하면서 소비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향 고양이 똥으로 키운다느니 하는 프리미엄이 잔뜩 붙은 값비싼 커피처럼 각종 화려한 타이틀과 눈부신 재력을 가진 사람들을 동경하기도 한다. 수천의 커피처럼 수억의 사람이 오늘도 이 지구에서 골라지고, 볶아지고, 포장되고, 갈아지고, 추출되고 다른 재료들과 섞이기도 하면서 자기만의 맛을 만들어나간다.
인간이란 그렇게 다양한 군상으로 살아가기에, 누군가는 나에게 입맛에 딱 맞는 에티오피아 하라 같은 사람인 반면 누군가는 한 입만 마셔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지독하게 탄 맛 나는 커피 같은 사람이기도 하다. 아마 나 역시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존재이겠지. 우리가 내 입맛에 맞지 않는 커피는 억지로 마시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굳이 나에게 상처 주는 사람을 끌어안고 가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당신 입맛에 끔찍한 커피는 버려도 된다. 그 사람의 개성과 다양성은 존중해주되 그냥 내 마음속에서 그 사람의 커피잔을 뒤집어 하수구에 흘려보내자. 맛없는 커피를 미워하면서 나의 소중한 마음을 쓰지 말자. 그러기에 아직 맛보지 못한 내 입맛에 꼭 맞는 커피도 정말 많이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