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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현 불가능한 정의의 딜레마

201023

by 이건우

킬링 디어 (The Killing of a Sacred Deer,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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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공평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나마 이게 정의에 가까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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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일반적 정의와 특수적 정의로 구분한다. 일반적 정의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법에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특수적 정의는 크게 분배적 정의, 교정적 정의로 나뉘는데, 전자는 당사자의 가치에 따른 기하학적 비례를, 후자는 손익의 산술적 비례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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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은 술에 취한 채 심장수술을 집도했다가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한다. 환자의 아들인 마틴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통해 스티븐에게 복수를 가한다. 마틴의 아버지를 죽인 대가는 자신의 손으로 가족 중 한 명을 죽여야 하는 것이다. 마틴은 자신의 결여를 스티븐의 결여로 교환하고자 한다. 그것이 공평한(fair)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나마 정의(justice)에 가깝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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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은 명망 있는 의사이자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다. 자신의 손으로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거나 빼앗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을 토대로 그는 가정에서도 자신만의 질서와 체계를 세워 운영해 나간다. 아내와 자녀들은 그것에 복종한다. 분배적 정의에 따르면, 그는 그의 능력과 그 능력의 가치에 비례하는 권력을 획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것은 정의로운가? 일견 분배적 정의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성)이라는 근본적인 가치를 따져본다면 누군가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는 권력 또한 가치에 따른 분배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그러한 권력에 의해 아버지를 잃은 마틴은 그 권력을 비웃기 위해 그 권력을 역으로 이용한다. 인간은 감히 인간을 죽일 수 있는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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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잃은 마틴은 교정적 정의를 실현하고자 한다. 아버지의 죽음을 등가 교환하고자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마틴에게는 그것이 정의다. 그가 공평한(fair) 것인지는 모르겠다고 말할 때, 이미 그는 단순한 산술적 비례에 따른 ‘교정’을 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티븐은 결국 마틴에 굴복하고 ‘총구를 돌려’ 방아쇠를 당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은 정의로운가? 마틴도 잘 알고 있듯, 그것은 ‘그나마 정의에 가까운 것’이다. 인간(성)이라는 가치는 산술적으로 계량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마틴의 정의는 애초에 실현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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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의 나약함은 이처럼 정의의 문제를 두고서 드러난다. 모든 인간은 누구나 권력을 쥔다. 어떠한 권력도 갖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 권력은 누군가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게 한다. 분배적 정의는 이러한 문제 앞에서 실현 불가능한 것이 된다. 나아가, 그러한 권력으로 인한 누군가의 상처는 무엇으로 갚아주어야 하는가. 인간(성)은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는 점에서 교정적 정의 또한 실현 불가능한 것이 된다. 이처럼 마틴은 정의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자다. 그가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하는 초월적인 존재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물음을 마주하는 자가 어떻게 인간성을 잃어가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한 명이 희생된 스티븐의 가족이 식당에서 마틴과 마주할 때, 스티븐과 애나의 표정은 무표정과 경멸 사이의 어딘가에 있다. 정의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또 다른 복수를 낳을 지도 모른다. 다양한 인간 군상 가운데서 정의의 문제는 이렇게 영원히 부유할 것이다. 우리는 정의에 가까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정의로울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인간(성)의 본질적 가치는 정의를 실현하기에는 지나치게 무거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실현 불가능한 정의의 딜레마는 필연적으로 인간(성)을 희생하고 말 것이라는 비극이 여기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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